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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빛의 일기>.
 <사임당 빛의 일기>.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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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언쟁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숙종·경종·영조 때 관료인 정내주의 <동계만록>에 남아 있다. 언쟁이라지만, 좀 점잖은 언쟁이다. 감정이 섞여 있어 부부싸움이랄 수도 있지만, 상당한 예의를 갖추고 진행됐기에 아무래도 언쟁이라 표현해야 할 것 같다. 

40대 후반의 사임당이 죽음을 목전에 둔 때였다. 그는 바람기 있는 남편이 새장가를 들어 자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했다. 남편 이원수는 주막집 사장 권씨를 가까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 주막집 여성이 율곡 이이를 비롯한 자녀들의 새엄마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동계만록>에 따르면 사임당은 단도직입적으로 "제가 죽은 뒤에 재혼하지 마세요"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자녀들이 이미 많으니, 무슨 자식이 더 필요하겠습니까?"라며 "<예기>의 가르침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예기>는 예법 사상을 담은 책이다.

이원수는 아들 이이와 달랐다. 이이가 과거시험 각 단계에서 9차례나 1등을 해서 구도장원으로 불린 것과 달리, 이원수는 과거시험에 끝내 급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이 50에 연줄을 타고 공직에 특채됐다. 시험을 못 치는 것이 꼭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원수의 경우에는 그랬던 것 같다. 이 점은 잠시 뒤에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사임당에게 비협조적이었던 남편 이원수

이원수에 비해 사임당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사대부 지식인들로부터 '안견 다음가는 화가'라는 평가를 들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였다. 거기다가 유교 경전에 대한 소양도 깊었다. 과거시험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도 아들 이이처럼 고득점을 올렸을 수도 있다.

사회적 성취라는 면에서 아내에게 열등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이원수는 사임당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이 점은 "제가 죽은 뒤에 재혼하지 마시라"며 "<예기>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라는 사임당의 간청에 대한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아내의 간청에 대해 빈말로라도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라고는 말하지 않고, 이원수는 대뜸 빈정대기 시작했다. "공자님이 아내를 내보낸 것은 예법에 맞는 일인가요?" 공자님도 아내를 버렸으니 자신도 아내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새장가를 들 수 있는 거 아니냐는 빈정거림이었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파주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파주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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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가 단순히 시험을 못 치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은 사임당의 다음 언급에서 드러난다. 사임당은 "공자님은 아내를 버리지 않았어요"라면서 "전란을 만나 아내와 떨어져 산 것뿐이죠"라고 대꾸했다. 이원수는 책을 꼼꼼히 읽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공자의 생애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입력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원수는 지는 게 싫었다. 아내한테 지는 것은 특히 그랬던 모양이다. 공자의 이혼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틀리다는 지적을 받자, 이번에는 공자를 계승한 증자를 거론하면서 "그렇다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요?"라고 쏘아붙였다. 증자도 이혼했으니 자기도 증자처럼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장가를 갈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사임당은 "증자가 아내를 버린 것은 아내가 시부모 봉양을 못했기 때문이죠"라면서 "그러나 증자도 새장가를 가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임당이 죽은 뒤의 재혼 문제를 둘러싼 부부간 대화는, 이렇게 서서히 이원수의 짧은 지식을 드러내는 논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원수에게 사임당은 '너무 부담스러운 부인'

이원수는 유교 경전을 달달 외우고 공자·맹자·증자·주자를 입에 달고 사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경기도 파주의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 사람이 유교 성현들에 대해 이처럼 얕은 지식을 잔뜩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런 지식을 거리낌 없이 술술 내뱉고 살았다. 그랬으니 신사임당이 속으로 얼마나 안타까워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된다. 공자·맹자에 관한 정보가 엉터리라는 게 드러났는데도, 이원수는 굽힐 줄 몰랐다. 급기야 그는 주자의 이름까지 거론한다. "주자의 집안에서도 이혼하고 새장가든 일이 있지 않소?"라며 반격을 재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원수는 강타를 맞았다. "주자는 47세 때 부인과 사별했습니다. 그러고는 새장가를 들지 않았습니다."

훗날 율곡 이이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지은 글이 있다. <선비 행장>이란 글이다. 선비(先妣)는 죽은 어머니에 대한 높임말이다. 그래서 <선비 행장>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대기>다.

이 글에 묘사된 이원수는, 뜻은 크지만 집안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원대한 것을 말하고 큰소리를 치기는 하지만, 현실적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사임당은 예술 활동에 종사하면서도 자녀교육과 집안일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성격적으로 정반대였다. 

부부의 성격이 정반대여도 조화가 잘 이루어지면 시너지 효과가 생기겠지만, 이 부부의 경우에는 그 조화란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원수 입장에서, 사임당은 너무 부담스러운 부인이었다. 아내로 대하기에 벅찬 상대였다. 그래서 이원수가 사임당을 심리적으로 기피했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조화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성격도 정반대이고 조화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두 사람이 좋은 부부가 될 리도 만무하고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질 리도 만무했다. 그래서 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양처가 되기도 힘들었다. 사임당은 양처가 되고 싶었겠지만, 이원수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데릴사위를 원했던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

요즘처럼 연애결혼을 하는 세상이었다면, 애당초 두 사람은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임당이 처음부터 이원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수 있고, 이원수도 처음부터 사임당에게 접근할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다.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속의 이원수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사임당에게 어떻게든 접근해 보려고 애쓰지만, 실제의 이원수가 동일한 상황에 처했다면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신사임당과 이원수의 합장묘. 파주 이이 유적에 있다.
 신사임당과 이원수의 합장묘. 파주 이이 유적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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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들의 결혼은 성사됐다. 드라마 <사임당>에서는 사임당이 처음엔 왕족의 후예와 결혼하려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결혼을 포기했으며, 이 때문에 급하게 구한 짝이 자기 집에서 식객 생활을 하던 이원수였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물론 이것은 드라마 속 이야기다.

실제로 이들의 결혼이 성사된 데는, 사임당의 아버지인 신명화의 부성애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명화의 입장에서는, 사위가 너무 똑똑해서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해 한양 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 강릉 생활에 익숙한 자기 딸의 미술 활동이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선비 집안 출신이되 능력이 크지 않고 강릉 자기 집에서 오랫동안 데릴사위 생활을 할 수 있는 사위가 필요했다. 그래서 구한 사위가 이원수였다.

이원수는 대단한 여성과 결혼한 게 자랑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다. <선비 행장>에 따르면, 사임당이 이원수에게 충고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임당은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충고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이원수가 충고를 잘 받아들였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렇지도 않았기에 사임당의 잦은 충고는 부부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사임당은 남편에게 충고를 많이 하면서도 남편을 제대로 고치지는 못했다. 앞서 소개한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사임당은 점잖은 방법으로 남편을 가르쳤다. 이런 방법이 통하는 상대방도 있지만, 이원수처럼 열등감을 느끼고 어깃장을 놓는 남편한테는 잘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래서 사임당의 충고는, 입만 아프고 효과는 없는 충고였다.

직설에 화 잘 내고 변덕도 심했던 주막집 사장

항상 선생님처럼 충고하는 아내한테 이원수는 싫증을 느낀 모양이다. 그는 집밖에서 새로운 여자를 찾았다. 새 여자인 여성은 사임당과 정반대였다. 주막집 사장님인 권씨는 직설적이고 화를 잘 냈으며 변덕도 심했다. 그리고 '회사 제품'을 자기 입속으로 많이 넣는 사람이었다. 음주가 지나쳐 아침에도 해장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원수는 그런 권씨가 더 좋았다. 그는 심리적으로 사임당한테서 도망쳐 권씨에게 의존했다. 그에게는 권씨가 좋은 부인이요 양처였던 것이다. 만약 이원수가 저세상에서 다 지켜보고 있다면, 그는 후세 사람들이 사임당을 현모양처로 추앙하는 모습이 불편할 것이다. "우리 애들한테 현모였던 것은 맞지만, 나한테 양처였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그는 중얼거릴지 모른다. 5만 원권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이 자리에 권 마담 사진이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권씨의 존재에 불쾌감을 느낀 사임당은 죽음을 앞두고 이원수에게 재혼 불가 방침을 던졌다. 하지만, 이원수는 냉소와 비웃음으로 대응했다. 이런 태도는 사임당이 죽은 뒤에 현실로 이어졌다. 사임당이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권씨가 율곡 이이의 새엄마가 됐던 것이다.

오늘날, 이이의 친가가 있었던 경기도 파주에는 사임당·이원수 부부의 무덤이 있다.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있는 합장묘다. 저세상의 사임당도 이런 합장묘가 불쾌하겠지만, 이원수의 불쾌감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이원수의 입장에서는 불쾌함도 불쾌함이지만, 무엇보다 답답함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권씨와 함께 살고자 신씨가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영원히 신씨 곁에 눕게 됐으니 말이다.


태그:#사임당 빛의 일기, #신사임당, #이원수, #현모양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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