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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의 일이다. 당시 내가 살던 주택에는 옥상에 딱 한 칸의 방이 있었으며 그나마 올라가는 계단도 외진 구석에 있었다. 때문에 옥탑방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그래서 사실상 왕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어느 저녁,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나는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밟는 소리를 들었고, 이윽고 그 발걸음은 내 방주변을 배회했다. 처음엔 옥상을 구경하러온 새 입주자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인기척의 주인공은 옥상을 떠날 줄을 몰랐다.

나는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머릿 속으로는 끔찍한 상상들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 상태를 못이긴 나는 식칼을 등뒤로 숨기고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그러자 오늘 이사를 왔다는 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왔다고, 사람이 살고있는 줄은 몰랐다며 사과했다.

그제서야 나는 안도감을 느꼈고 식칼씩이나 집어든 스스로가 유난스럽다며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후에 나는 이 일이 우스운 해프닝인냥 친구에게 이야기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내가 겪은 일을 전혀 재밌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씁쓸한 표정으로, 만약 자신이었다면 그 남자가 내려간 후에 더 큰 불안에 시달렸을 거라고 말했다.

당시에 나는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그리 안전한 공간이 아니며 심지어 집조차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 같은 반응이 나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성인 나는 낯선 남자가 내가 혼자 살고 있음을 아는 것이 위험한 일이 아니었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나 내가 살던 곳은 인적도 드문 옥상이었으니, 그 친구가 내 이야기를 듣고 그런 불안을 떠올린 것은 당연했다.

젠더화 된 공간

흔히 공간을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공간의 구획에는 특정 사회의 체계나 가치관이 반영된다.
 흔히 공간을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공간의 구획에는 특정 사회의 체계나 가치관이 반영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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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공간을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곤 한다. 장소란 인간에 의해 단지 점유되는 수동적인 대상이며, 아무런 사회적 권력관계가 기입되지 않은 자연적인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성의 지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관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공간의 구획에는 특정 사회의 체계나 가치관이 반영되며, 같은 장소도 누가 점유하느냐에 따라 그 곳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또한 이 같은 차이는, 사회의 서로 다른 주체들이 같은 장소에서도 상이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가령 일터와 집이라는 전통적인 공/사 영역의 분리는 남성 생계 부양자 중심의 이성애 제도를 반영한 구분이며, 이 구도에서 공적 영역은 노동의 장소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개인적인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으로 의미화 된다.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인 시선이다. 가령 여성 가사 노동자에게 집은 일터와 대비된 휴식의 공간이기 보다는 물리적 노동의 현장이자 누군가를 보살펴야 하는 감정 노동의 공간에 가깝다. 하지만 가정을 바라보는 주류화 된 시선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집을 사고하는 경우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말하자면 장소는 성별에 따라 그 의미가 판이한, 젠더화 된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남성의 경험과 인식만을 중심으로 공간을 해석하고 그것이 성 중립적이라 생각해온 경향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좋을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SNS상에서 벌어진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 운동이다. 이 움직임은 2015년 발간된 사진집 <자취방>이 논란이 되자 일어났다. 자취하는 여성을 테마로한 이 작업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여성의 공간에는 어떤 의미가 부여되었나

작가는 이에 대해 '집에서 편하게 있는 모습을 예쁘게 담고 싶었다'는 해명을 했다. 하지만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고 몸매를 강조하는 포즈를 취한 모델들을 보고 있자면, 이게 성적 대상화가 아니면 무엇인가 싶을 정도다.

사실 여성의 자취방에 대한 성적 환상은 이 사진집만이 보여준 것은 아니다. 사람들,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혼자사는 여성의 집이 성적인 공간으로 의미화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자취하는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말이나 '혼자 사는 여성과 사귀면 모텔비를 아낄 수 있다'는 농담을 보자.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일상에서 너무도 만연하며 방송에 그대로 전파가 될 정도로 전혀 문제시 되지 않고 있다. 물론 누군가의 집이 충분히 성적으로 능동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개인 공간에 성적 의미를 덧씌우는 것은? 그건 심각한 문제다.

여성의 집을 바라보는 이 같은 시선은 기성의 남성중심적 공간관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성애적 성별 규범과 이에 기반한 공간 구획의 결과이기도 하다. 사회가 공/사 영역으로 분리되고 전자가 남성의 것으로 후자가 여성의 것으로 구분될 때, 이에 따른 역할이 각 성별에 부여된다. 그리고 익히 알려져 있듯 이 규범에서 여성은 집안을 가꾸고 가족들을 돌보는 위치를 할당 받았으며, 이는 기껏해야 남편을 보조하는 부차적인 일로 여겨져왔다.

또한 이성애 관계는 성적 관계이기에 여성들에게는 그에 따른 의무도 주어졌다. 가령 '낮에는 정숙한 부인이지만 밤에는 요부'와 같은 남성들의 판타지가 이런 규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구도에서 여성들은 오직 남자들을 위해서만 노동하고, 그들이 원하는 순간 원하는 만큼만 성적이여야 한다. 여성과 집(혹은 남성)이 맺는 관계가 종속적이기에 남성이 여성의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집의 여성'이 독립적인 개인으로 치부되지 않았던 것처럼 '여성의 집' 남성들의 쾌락을 위한 수단처럼 소비된다. <자취방>과 같은 사진집이 나오는 이유다.

이게 여성의 자취방이다

누군가의 개인 공간에 성적 의미를 덧씌우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누군가의 개인 공간에 성적 의미를 덧씌우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 이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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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여성의 자취방을 둘러싼 남성들의 문제적 시선 기저에는 남성 가부장 중심의 사회 체제와 그 속에서 여성들의 종속적인 위치를 할당 받는 문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남성들은 이러한 구조에 기반해 여성관을 확립한다. 왜 여성 개인의 공간이 그렇게 손쉽게 침범의 대상이 되었겠는가. 그 곳이 존중되어야 할 독립적인 한 사람의 생활 영역이 아니라 남성의 성적 기대와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곳으로 사유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이 같은 인식은 남성이 여성을 어떤 존재로 치부하는 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홀로 사는 여성들에 대한 남자들의 범죄는 문제적 개인의 일탈로 볼 수 없다. 이는 불평등한 젠더 관계, 식민화 된 여성의 위치, 그리고 그것에 기반해 형성된 폭력적인 남성 섹슈얼리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래서 여성의 자취방에 대한 남성의 환상과 말들은 낡은 것에 더해 위험하기까지 하다.

물론 이 같은 상황이 발디딘 체제는 지향일 뿐 현실은 아니지만(많은 가구가 '공적 영역'에서 노동하는 여성들의 임금에 의존한다는 것은 젠더화 된 공/사 구분이 허구임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사회⋅문화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일례로 그래서 여성들은 밖에서도 일하고 집에서도 일하지만 그게 노동으로조차 인식되지 않으며 가정 내에서의 여성 개개인의 경험은 손쉽게 비가시화 되고 만다. 그런 맥락에서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운동은 성적으로 의미화 된 여성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던 당사자의 경험과 관점을 가시화 시킨 의미가 있다.

그곳은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가 실현되는 곳이 아니라 그것이 범죄가 되는 곳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누군가의 개인 공간을 침범하는 것은 폭력이다. 이렇게 이 운동은 남성들의 일그러진 욕망에 함몰되었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정의들을 다시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쓰며 고정 수입과 독립적인 공간을 여성이 인간적인 존엄을 찾고 자립할 조건으로 사유한 바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런 여성들은 점점 늘어 났고 더 이상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내 주변에는 그런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독립적인 생활을 즐기는 동료들이 많다. 그 공간에서 그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기도 한다. 가족들과는 키울 수 없었던 반려 동물들을 키우거나, 사랑하는 소품으로 가득 방을 꾸미기도 한다.

그 장소는 온전히 그녀 스스로만을 위한 공간이지 남자들의 낡고 유해한 성적 판타지와 그것이 초래하는 폭력을 자리 할 공간이 아니다. 그러니 아직도 여성의 자취방에 대해 성적 농담을 하고 싶은 남성들이 있다면 정신차리자, 이게 여성의 자취방이다.


태그:#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 #여성주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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