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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날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다 같이 코코넛 밥을 해먹었다. 우리가 재료를 사 오고 마을 어른들이 요리를 해줬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음식 마련을 다해서 대접하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양을 해야 하고, 이들의 입맛에도 맞아야 했다. 본의 아니게 또 신세를 진 건 아닐까 했지만 막상 다 같이 저녁을 먹으니 작은 축제를 벌인 것 같기도 해서 좋았다. 그동안 우리들이 밥을 할 때 도움을 받은 적은 많았지만 함께 먹은 건 처음이었다.

메뉴는 나시 우둑(Nasi Uduk: 코코넛 밀크 밥)과 생선 구이. 마을 아저씨가 직접 딴 코코넛의 과즙은 마시고, 알맹이는 기계로 곱게 간다. 물을 넣고 여러 번 걸러내면 뽀얀 코코넛 밀크가 완성되고 쌀과 함께 끓인 뒤 다시 찜통에 넣으면, 나시 우둑 끝.

항해 전날 마을 사람들과 먹는 만찬
 항해 전날 마을 사람들과 먹는 만찬
ⓒ 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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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동안 우리는 2층 보금자리 아래에서 불을 지펴 음식을 해먹었다. 그러면 마을 어른들이 도와 주기도 하고, 아이들은 구경을 하느라 우리를 에워쌌다. 우리끼리 먹는 게 미안해서 쏭에게 식당에서 사먹고 오면 안 되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쏭은 우리가 직접 요리를 해서 먹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더 좋은 쪽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마을 사람들과 10년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여기는 음식 값이 저렴해서 쉽게 돈을 주고 살 수도 있지만 계속 사먹는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가 돈을 잘 쓰는 외국인들로 비춰지게 될 것이고, 결국 마을 사람들과 우리 관계에서도 돈의 논리가 들어오기 쉽다는 의미였다. 너무 미리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세밀하게 신경을 쓴 점이 10년간 이곳 루아오르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했다.

저녁을 다 먹은 후 쏭은 우리가 지금 있는 술라웨시 섬과 이번 항해에 대한 브리핑을 해주었다. 이제 정말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술라웨시는 인도네시아 섬들 중에서 크게 구분되는 5개의 섬 중에 하나로 전체 크기는 한반도 정도이다. 술라웨시 섬은 북부, 서부, 동부, 중부 등등 분리돼있다. 지역별로 종족들도 다른데 남부에는 부기스족, 마카사르족이, 서부에는 또라자족과 만다르족 그리고 부기스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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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뿐 아니라 배 모양의 무덤도 있는데 그 독특한 문화를 보기 위해 외국 여행객들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찾는다. 익산도 얼마 전에 이곳에 다녀왔다고 사진을 구경시켜주었다
▲ 전통 가옥인 통코난(Tongkonan) 집 뿐 아니라 배 모양의 무덤도 있는데 그 독특한 문화를 보기 위해 외국 여행객들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찾는다. 익산도 얼마 전에 이곳에 다녀왔다고 사진을 구경시켜주었다
ⓒ KOMPAS/RENY SRI A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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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자족(Toraja)은 선조들이 탔던 배의 모양을 본떠서 집과 무덤을 만들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다. 그들의 조상은 중국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설도 있고, 꽤나 공격적으로 알려진 부기스족(Bugis)을 피해 산속 깊은 곳으로 이동하였다는 얘기도 있다.

술라웨시 북부에 있는 포소(Poso)는 인도네시아에서 대표적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 갈등 지역이다. 예로부터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최전방 군사 기지역할을 하던 곳으로 기독교도의 비율이 높다. 과거에는 유혈 충돌도 빈번했으나 요즘은 평화롭다고 한다. 그러나 또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를 곳이다.

그 외에도 술라웨시 북부 끝에 있는 마나도(Manado)를 비롯한 바닷속이 아름다운 곳들도 많은데 이번 여정에는 갈 수 없지만 나중에 꼭 가보라는 쏭. 관광으로만 인도네시아에 왔다면 알 수 없었을, 인도네시아 현지인들조차 관심이 없다면 모를 얘기들을 들으며 나는 느꼈다. '나는 술라웨시에 또 오겠구나'

안전 항해를 위한 마을 사람들의 기도

오전 6시에 기상하여 짐을 꾸리고 오전 8시 반쯤 출발하였다. 가방은 물에 젖을 수도 있어서 비닐로 꽁꽁 싸서 요트 짐칸 안에 넣어야 했다. 마을의 종교 지도자 '이맘'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기도로서 우리의 안전을 빌어주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여자들은 배를 못 탄다. 그래서일까, 아줌마들은 여자들인 나와 다코타를 보고 무섭지 않느냐고 여러 차례 물었다.

배는 이안과 접안 중요하다. 육지 가까이에 가면 수면이 낮아지면서 암초나 바위에 배가 부딪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성게도 조심해야 한다
▲ 출항을 돕는 마을 사람들 배는 이안과 접안 중요하다. 육지 가까이에 가면 수면이 낮아지면서 암초나 바위에 배가 부딪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성게도 조심해야 한다
ⓒ 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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쏭과 아부가 선장이 되어 총 두 대의 배로 15일 안에 랑카이 섬까지 갔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야 한다. 첫날 쏭의 배에는 다코타와 바람말이 탑승, 나는 익산과 로미와 함께 아부 배를 타기로 했다. 빠레빠레에 사는 아부 아저씨는 쏭과 3~4년 전 배를 함께 탔다.  평생 어부 일을 해온 아저씨는 아주 능숙하게 배를 다룬다.

아이들은 바다에 떨어진 아부 아저씨의 모자를 주워주었다
▲ 배를 타고 노는 아이들 아이들은 바다에 떨어진 아부 아저씨의 모자를 주워주었다
ⓒ 수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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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을 가리기 위해 얼굴을 가린 로미와 익산
 햇볕을 가리기 위해 얼굴을 가린 로미와 익산
ⓒ 수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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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과 로미를 보며 IS같다고 놀리니 로미와 익산도 함께 웃어주었다. 한국에서 IS가 어떤 이미지인지 안다는 표정이었다. 무슬림인 로미는 한국에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말해주었다. 로미는 공항에서 기도할 장소를 찾았지만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한창 그때 국제뉴스에서 IS에 대해 시끄러울 때였던 것 같다. 괜히 미안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웠는데 익산이 인도네시아 전통의상 사롱(sarong, 크고 긴 천으로 되어, 허리 등에 감아서 싸는 형태로 입는다)을 빌려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긴 팔, 긴 바지를 입었지만 피부가 타는 것만 같았다. 특히 다리 쪽에는 검정색을 입어서 바람에 지나가는 햇볕마저 잡아들였다.

나만 빼고 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라 항해 내내 지루하지는 않을까,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건 아닐까 조금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보다 우리 항해에 있어 대화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연을 즐기며 각자의 역할을 하고, 서로 위해주고 그러다 한마디씩 나누고, 웃고, 그게 다였다. 바람이 잔잔하여 배가 잠시 섰을 때는 풍덩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고 나면 옷이 마를 때까지 더위가 좀 가셨다.

그럴때는 풍덩 바다로 뛰어들면된다. 그러고 나면 옷이 마를 때까지 더위가 좀 가셨다
▲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았다 그럴때는 풍덩 바다로 뛰어들면된다. 그러고 나면 옷이 마를 때까지 더위가 좀 가셨다
ⓒ 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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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좀 보고, 점심 먹고, 물에서 좀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좀 부치니 벌써 늦은 오후가 되었다. 쏭팀과 우리 팀이 가야할 목적지보다는 가까이에 대는 것이지만 해가 지고 있어서 더 갔다가는 표류할듯하여 아부 아저씨의 지휘에 따라 육지에 정박하기로 하였다.

오후 5시 반쯤 라부앙(Labuang)에 도착
 오후 5시 반쯤 라부앙(Labuang)에 도착
ⓒ 수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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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기다리면 저 멀리서 흰 돛이 보이겠거니, 해가 다 떨어지기 전에 물 속이나 구경하자 싶어 스노클링을 했다. 해가 뉘엿할 때쯤 몸이 으슬으슬해졌는데 낮 동안에 데워진 바닷속은 따뜻했다. 우리가 탄 배는 종교 지도자 이맘의 배를 빌린 것이다. 쏭의 배(개척자들이 10년간 탔던)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빠르다. 속도 조절을 하면서 맞춰야 했지만 바람을 타면서 항해를 하다 보니 격차가 점점 더 커졌고 이렇게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들은 팀별로 핸드폰을 준비했지만 문제는 망망대해에서는 전화가 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되는 구역도 있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쏭은 인도네시아에서 1년에 한 번씩 평화항해훈련을 10년간 하면서 두대의 배로 항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했다. 이런 일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쏭의 배는 해가 다 질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쏭의 배는 해가 다 질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 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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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지 3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별까지 보인다. 랜턴으로 돛을 비추며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응답은 없다. 결국 배에서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쏭 없이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했었는데…. 짐을 내리던 중 바닷가에 있던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물었고, 사정을 듣고는 단번에 우리를 집에 초대해주었다. 그러고 보면 그전에 다코타가 이런 식으로 항해했을 때 매일 타인들의 도움으로 잠을 자고 식사도 했다는데. 이런 게 무전여행이려나. 요즘 세상에 무전여행이라니. 이곳은 물질적으로 부족해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은 풍성한 사람들이 있다.

한류의 바람은 미라네 집까지

아저씨를 따라 간 집에 가니 그의 가족들은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 젊은 여자 미라는 만디(샤워)할 때 쓸 사롱(사롱의 역할은 참 다양하다)도 빌려주고, 잠자기 전에도 잘 때 쓰라고 또 새 사롱을 꺼내주고, 잠옷으로 입으라고 원피스도 빌려주었다. 재워주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잠자리까지 정성스레 준비해주니 정말 오래된 친구를 환대 해주는 것도 이것보다 더 해주지는 못할 것 같다.

집은 컸다. 1층에 샤워실이 있고 2층에 거실, 방, 부엌이 있었다. 티브이에는 우리나라 K팝스타 같은 노래 경연 방송이 나왔다. 인도네시아에 와서 티브이를 제대로 본 적은 처음이다. 미라는 23세인데 갓난아기가 있다. 옆에 있는 신타는 13세 여동생. '아저씨가 돈이 좀 있으니 어린 미라와 결혼을 했고 여동생까지 함께 지내도록 해주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남편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버지였고, 미라의 남편은 일찍 잠이 들었다고. 뭔가 다행스럽고 민망한 이 기분.

모두들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 신타와 미라 그리고 사촌들 모두들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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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타는 한국에도 관심이 있고, 요즘 학교에서 아랍어를 배우고 있다며 내 손에 아랍어로 이름을 써주기도 했다.

미라는 노트북을 꺼내며 다운 받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여주었다. 풀하우스(태국버전), 내 여친은 구미호, 영화 스물, 퓨전사극드라마 퐁당퐁당러브(Splash Love), 영화 7번방의 선물까지 나도 못 본 작품이 많았다. 나중에는 옆집에 사는 미라 친언니와 그녀의 딸들까지 왔다. 한국인을 실제로 본 일은 처음인듯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고 내 이메일 주소를 알려줬는데 아버지 폰을 가져와서 페이스북으로 내 이름을 검색하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인터넷이 느려서 친구 추가는 못했지만 나중에 하라고 이름을 적어주었다. 한국에 대한 사진을 보길 원했는데 업로드를 별로 해놓지 않아 좀 아쉬웠다.

이렇게 환대해주는 인도네시아 사람들. 이들을 한국에서 만났다면 나는 이만큼 친절을 베풀 수 있었을까. 정작 가까운 동남아시아 나라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유럽이 배낭여행의 로망이었다. 나는 얼마나 편향된 시각의 대중미디어에 물들어 있었나.

제작진으로서 <세계테마기행>과 같은 외국여행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세계사에 관심이 생겼다. 언론에서 단편적으로 알려준 테러와 난민, 분쟁 지역에 대한 정보 이면에는 소위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칭하는 나라들의 갈취로 인한 역사. 그 아픈 역사의 씨앗이 아직까지 그 나라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오고 싶지 않았던 나라,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에서도 1965년 수하르토(1966~1998년)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고 공산당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대량학살로 드러난 것만 100여만 명이다. 하지만 그들의 배후에는 제3세계 친미·반공 정권을 밀어주는, 소위 '세계 경찰'이라고 스스로 일컫는 미국이 있었다.

학살을 주동한 청년들은 이제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가 되어 현재까지 국민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다큐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많이 죽일 수 있었는지 직접 재연을 해주기도 하는데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 이 영화 덕분에(?) 나에게 인도네시아는 가보고 싶은 나라들 중 열외 대상이었다. 그러나 근현대사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이 있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의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전통 배를 타고, 이렇게 낯선 집에서 잠까지 자게 되다니.

다들 무사할까. 그나마 바람말이 한국에 있는 팀에게 페북 메시지를 남겼다고 로미가 전해주어 조금 안심되었다. 나는 이렇게 편한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들은 어디서 밤을 지새울까. 걱정을 하면서도 이내 내려앉는 눈꺼풀은 어쩔 수 없었다.

참고: 김동춘의 저서 <미국의엔진, 전쟁과시장>

덧붙이는 글 | 평화 항해를 위한 배를 구합니다 dlgidfla2001@naver.com



태그:#인도네시아 항해, #액트 오브 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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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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