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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망'이라는 신조어의 뜻을 전해 듣고 탄식이 절로 나왔다.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라는 신조어들은 분노의 표현이었다. 지옥 같은 나라. 태어날 때부터 계급을 타고 나는 사회. 분노만큼 바뀌어야 한다는 의지도 응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신조어 '이생망'은 분노도 어떤 의지도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담담하게 써 내려간 유서를 보는 것 같다. 벌써 그 나이에 생이 망했다니. 체념의 깊이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청년실업이 2000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2013년부터 계속 상승한 청년실업은 2016년 상승률 10.7%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보수적인 수치일 뿐 구직단념자(실망실업자) 등 숨은 실업자는 포함되지도 않았다. 대학 졸업예정자 10명 중 3명이 졸업을 유예한다고 하고, 대학 졸업자의 절반이 백수라는 생생한 증언들도 봇물을 이룬다. 수천만원 학자금 대출을 떠안고 취업의 희망도 없이 떠밀리듯 나서는 졸업. 그래서 젊은이들이 절규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이번 생은 망했다

경기탓이라고 한다. 저성장이 청년들을 실업자로 내몬다고 보수언론과 경제지가 한 목소리를 낸다. 경기 회복과 기업의 성장이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는 주장에는 어떤 이견도 허용되지 않는다. 정부는 수출과 대기업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지원한다. 법인세를 낮추고 수천억 원의 전기요금마저 할인해 주는 것도 기업이 잘되어야 일자리가 생긴다는 논리의 반영이다. 정부 R&D 자금 6923억 원을(2014년 기준) 대기업에 직접 지원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이 직접 기부자로 나서 청년희망펀드를 조성한 것이 2015년 9월의 일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200억 기부를 필두로 기업들이 나서고 은행 직원들까지 강제 모금하다시피 해서 1400여억 원을 모았다. 민간재단으로 만들어진 청년희망재단은 막대한 예산으로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후 황교안 권한대행도 수시로 청년실업 문제 해결 의지를 밝혔다.

그런데도 청년 실업률은 2013년부터 해마다 증가했다. 호봉제로 돼 있어서 청년 일자리가 부족하다던 이기권 고용노동부장관의 주장대로라면 성과연봉제를 도입한 기업에서는 청년고용이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성과연봉제 도입으로 일자리가 늘어난 기업은 찾기 힘들다. 법인세를 낮추고 전기요금을 깎아주고, 대통령이 나서 청년희망 펀드를 만들고 장년들의 소득까지 양보를 해도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청년 일자리. 이 정도 되었으면 청년 실업이 경기 탓인지, 정부나 기업탓인지 한 번쯤 되짚어 봐야 하는 건 아닌가.

대기업의 나 홀로 성과급 잔치

설을 앞둔 지난 1월 말, 삼성을 위시한 대기업들은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삼성전자는 연봉의 50%, 연차가 낮은 사원들도 1700만 원 이상의 성과급을 받았다. 정유업계인 SK이노베이션은 기본급 대비 1000%의 성과급이 지급되었다. 과장급 2500만 원. 팀장금 3500만 원 선이다. 에스오일 기본금 대비 1000% 예정이고 GS칼텍스 700% 성과급 규모가 정해졌다. 화학업계인 한화토탈 1100% 화장품업체인 아모레퍼시픽 500% 롯데면세점 330% 현대산업개발이 150%성과급이 확정되었다. 정유업계를 필두로 화학·전기 전자, 화장품·유통·건설 등 대기업 계열사 대다수가 수백만에서 수천만 원의 성과급을 지급하거나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과급 잔치는 기업의 실적에 기인한다. 기업이 적자를 보면서 직원들에게 기본급의 500%, 1000% 성과급을 지급하지는 않는다. 삼성전자는 2016년 4/4분기 매출액 53조3300억원, 영업이익 9조2200억 원으로 2013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한해 3조4000억 원 영업이익을 냈다.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는 영업이익이 8조를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화장품 회사인 아모래퍼시픽도 영업이익 1조 원을 돌파했다. 최악의 불경기, 세계적인 불황이라고 말했던 작년 한해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의 흑자를 낸 것이다.

그토록 어렵다던 경기. 기업들은 규제를 풀지 않으면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정부는 일자리를 위해서 노동자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라고 윽박지른 2016년를 생각하면 대기업의 사상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은 어리둥절하다. 수백, 수천만 원의 성과급 지급도 이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불황,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기업과 정부의 경제진단은 한낱 노동자와 국민들을 겁주기 위한 쇼에 불과했나.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는 현실에서 대기업들의 나홀로 사상 최대 성장을 박수치고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해 불가한 일은 따로 있다.

사실 기업의 흑자는 투자로 이어지는 것이 정석이다. 사상 최대의 매출과 이익을 냈다면 설비 투자, 인력보강으로 더 큰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기업의 경영원리다. 또 국가가 기업에게 온갖 혜택을 부여해서 사상 최대의 흑자를 냈다면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는 제공하는 것은 기업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원들에게 수천만 원의 성과급을 지급하고 임원들에게 수억 원의 스톡옵션을 안겨준 대기업 어디에도 신규채용 규모를 늘린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환율과 대통령 탄핵 등 정치적 이유를 들어 채용 규모를 대폭 줄이는 기업이 태반이다.

청년실업이 경기탓? 웃기는 소리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직원 300명 이상 대기업 1월 취업자수는 작년보다 4만 6천명이 줄었다. 국내 10대 대기업 중 채용 계획을 밝힌 곳은 현대차그룹, SK, GS 세곳 뿐이다. 잡코리아 조사에서도 채용기피 현상은 두드러진다.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 중 응답기업 312곳 중 신규채용 진행기업은 34.3%, 상반기 신규채용 없다는 기업이 44.6%에 이른다. 같은 조사에서 기계·철강은 전년대비 대졸신입 채용규모가 48.9%가 줄었다. 설립 이후 가장 큰 흑자를 냈던 석유 화학 에너지도 15% 채용규모를 줄였다.

대기업의 성과급 지급은 연례행사처럼 이루어져 왔다. 경기침체·국제시장 변동 등 갖가지 이유를 들어 위기를 외치던 기업들. 정부는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생긴다며 온갖 혜택을 남발했다. 연말·연초가 되면 대기업들의 흑자 행진이 이어지고 스톡옵션과 성과급 지급으로 돈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일자리를 늘리거나 계열사 비정규직 전환 등 안정적인 대책은 전무했다. 이런 악순환은 해마다 반복돼 왔다. 기업은 막대한 사내유보금을 쌓았고, 대기업 직원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워킹푸어로 전락했다. 급기야 청년들이 닫힌 기업의 문 앞에서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절규하는 지경에 왔다. 

청년 실업이 경기탓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정부가 청년희망펀드나 만들어 기업 삥뜯기나 하고 있으니 이렇게 된 거다. 기업이 국가의 특권으로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리고도 집안 돈잔치만 하고 있으니 청년들이 설 자리가 없는 거다. 이명박 정권의 비즈니스 프랜드리 정책(기업하기 좋은 나라 정책)에 이어 박근혜 정권의 범죄적 정경유착이 청년들에게 유서 같은 '이생망'을 공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태그:#청년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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