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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홍세화, 창비, 2006)를 읽고 택시 운전사인 저자와 기자가 만났다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 작성한 서평입니다. - 기자 말

프랑스 파리 공항에는 비가 내렸다.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린다기보다 앞에서 뒤로 불어 닥쳤다. 여행 온 첫날 악천후라니, 나도 참 운이 없다. 어쨌든 파리에 왔으니 에펠탑으로 가야지. 공항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에펠탑, 에펠탑!".

비가 와서인지 도로는 막혔다. 택시기사와 나는 어색하게 창밖만 바라봤다. 그때였다, 택시기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신가 봐요." 동남아 쪽 사람인 줄 알았던 택시기사는 나에게 한국말로 말했다. 그는 자신도 한국인이라고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홍세화입니다."

'공동묘지에 한번 가보세요. 몽마르트르 공동묘지든지 뻬르 라셰즈 묘지든지 아니면 몽빠르나쓰 공동묘지든지 다 좋지만 뻬르 라셰즈가 제일 좋아요. 말 없는 묘석들을 바라보며 걷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요. 마음이 꽤 차분해지니까요.'(32쪽)

택시기사는 나에게 프랑스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했다. 한국에 전화하는 방법에서부터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 파리라는 도시의 역사 그리고 사기당하지 않는 방법까지. 그런데 내가 한국인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이런 말을 한 마드무아젤(아가씨)이 있었어요. 저기 아시아 사람이 온다. 나는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일본 사람, 무표정으로 느긋하게 걷는 사람은 중국 사람, 화난 얼굴에 급하게 걸어오는 사람은 한국인, 특히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사람은 99프로 한국인.'(35~37쪽)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창비, 2006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창비, 2006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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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 홍세화는 다니던 무역회사 일로 프랑스에 나와 있었는데 한국에서 '남민전 사건'이 터져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에 남아서 관광 안내, 택시 운전을 하며 20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 이것은 내가 갖고 있는 여행문서(TITRE DE VOYAGE)의 목적지란에 적혀 있는 말이에요. 다시 말해, 제네바협정에 의거 내가 발급받은 여행문서는 나에게 다른 모든 나라에는 갈 수 있으나 꼬레에는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요.'(8쪽)

그는 망명신청을 할 때, 프랑스 관리와 대화를 나눴던 경험을 말해줬다. 그는 관리에게 자신이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한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관리는 "그래서 당신은 그 조직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냐"고 물었다.

그때 홍세화는 몇 차례에 걸쳐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자는 삐라를 뿌렸다고 했다. "우리 조직은 미제국주의에도 반대하였소"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관리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당시 '불온한 생각'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처벌받았던 대한민국의 상황을 프랑스 관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비가 잦아들었다. 꽉 막혔던 도로도 점점 숨통이 틔었다. 에펠탑이 가까이 보였다. 내릴 때가 됐지만 택시기사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저씨, 저기 앞 카페에서 이야기를 더 나눌..."
"'되 마고' 카페는 어때요? 사르트르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실존주의를 논했다는 카페에요."

그는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카페 앞에 택시를 세웠다.

다른 그대로 남을 용인하는 것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또 서로 미워합니다. 다시 말해 프랑스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일단 그의 것으로 존중하여 받아들인 다음, 논쟁을 하여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데 비하여 우리는 나의 잣대로 상대를 보고 그 잣대에 어긋나면 바로 미워하고 증오해요.'(138쪽)

홍세화는 프랑스 생활 초기 한 프랑스인과 다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프랑스인이 부당하게 큰 몫의 이익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한바탕 다투고 홍세화는 '요 쥐새끼 같은 놈하고는 다시는 말도 나누지 않으리라'하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프랑스 친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그 프랑스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워했어요. 그의 주장이 틀렸으면 그 주장을 반박하면 그만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했어요. 그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에게는 단지 그와 내 생각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죠.'(137쪽)

우리나라에서는 주장과 사람을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두 개를 구별하는 의식도, 노력도 없어 보인다. 대학교 수업시간에 토론할 때도 그렇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두 팀은 수업이 끝나면 인간적으로 불편해진다. 비슷한 이유로 교수의 말에 반대하는 의견을 쉽게 낼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비판한 게 아니라, 서로의 '주장'을 반박한 것일 뿐인데 말이다.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강요하거나 강제하는 대신 토론합니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다 벽에 부딪히면 "그에겐 안 된 일이지만 할 수 없군!" 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섭니다. 강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치고받고 싸우지도 않습니다. 또 미워하지도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350쪽)

'똘레랑스는 '관용'이라기보다 '용인'이며 '화이부동(和而不同)'입니다. … '서로 화평하면서 획일화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양성과 '다름'을 존중하라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똘레랑스란 나와 다른 사상, 신앙, 출생지, 성적 정체성, 피부색을 '다른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름을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373쪽)

권력 남용이나 부정부패는 절대로 용서 못해

25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제14차 박근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시민이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집단을 규탄하고 있다.
▲ 박근혜 탄핵반대 집회 '빨갱이는 죽어도 좋다' 25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제14차 박근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시민이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집단을 규탄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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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을 멈추고 나에게 물었다. "아, 요즘 한국도 아주 난리지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묻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똘레랑스가 넘치는 사회에서 부패한 정권을 어떻게 대할까? 그것도 조건 없는 똘레랑스로 용인해야 하나?

2차 대전 직후 나치 협력자에 대한 프랑스의 처벌은 철저했다. 나치 정권의 정치경찰인 게슈타포 책임자 가운데 하나인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를 40년이 지난 뒤에 잡아들여 재판을 열었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후 그는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나치에 협력한 뽈 뚜비에(Paul Touvier)는 50년이 지나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도 감옥에서 죽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재판들에 대해 그들을 처벌한다는 목적보다는 역사에 저지른 책임을 물어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똘레랑스가 흐르는 프랑스 사회지만 권력의 남용이나 공직을 이용한 부정부패는 절대로 용서되지 않습니다. … 똘레랑스는 개인이 권력에 요구하는 것이지 권력이 개인이나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에는 역사에 대한 책임만이 철저히 요구될 뿐이지요.'(365쪽)

하늘이 맑게 갰고 따듯한 햇빛이 비쳤다. 비는 멎은 지 오래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홍세화, 창비, 2006)의 저자 홍세화는 다시 택시로 돌아갔다.

서로의 주장에 반박하고 토론하는 게 아니라 인격을 향해 욕하는 지금, 사상이나 취향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지금, 권력을 향한 비판을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지금, 당신도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를 만나보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저자 홍세화 선생님과 기자가 만났다는 상황은 철저히 '가상'입니다. 홍세화 선생님은 2002년에 귀국하셨습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판

홍세화 지음, 창비(2006)


태그:#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프랑스, #르포, #똘레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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