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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버리고 이사 갔대."

주인이 이사 간 후 텅 빈 마당에 홀로 우두커니 있는 옆집 개를 보며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1980년대였던 당시는 '반려동물'이라는 말도 없었고, 동물에 대한 배려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다. 그러나 주인에게 버림받고 빈집에 남겨진 개의 모습은 '책임감'이 뭔지 몰랐던 어린 내게도 인간의 비정함을 느끼게 했다.  

세월이 흘러 '동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반려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시대에 역행하듯, 삼성동 사저로 이사를 가면서 기르던 개들을 버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책임한 모습이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관련 기사 : "박근혜 전 대통령은 왜 개 9마리를 버렸을까?").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현재 상황에서 동물까지 챙길 여력이 어디 있겠냐"며 "사람보다 동물이 중하냐"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실제로 동물보호 운동을 하다 보면 "동물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반발에 종종 부딪힌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답한다. 동물보호는 인간의 권익에 반하는 일이 아니라고.

동물보호는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보호받는 세상을 구현하는 운동이다. 간디는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성은 그 나라의 동물들이 어떻게 대우받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만 대우받는 사회가 아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더 나아가 스스로 권익을 외칠 수 없는 동물까지 배려하는 사회가 진정 정의로운 사회라는 뜻이다. '목소리 없는 약자'인 동물까지도 제대로 대우하는 나라에서 인간을 홀대할 리 없다. 동물보호는 '동물 애호'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다.

15일 공청회에서 동물학대를 주제로 발표하는 박소연 동물권단체 ‘케어’ 대표
 15일 공청회에서 동물학대를 주제로 발표하는 박소연 동물권단체 ‘케어’ 대표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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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조기 대선을 앞두고, 동물보호 정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대시민 공청회가 지난 1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공청회는 동물보호단체들이 19대 대통령과 정부에 바라는 동물보호 정책을 '동물보호 5개 분야, 5대 과제, 10개 정책'으로 정리하여 시민들에게 제안하고 의견을 듣는 행사였다.

이날 제안된 '동물보호 5개 분야, 5대 과제, 10개 정책'은 반려동물·농장동물·실험동물·야생동물·일반 종합으로 이뤄진 5개 분야와 각 분야를 대표하는 5대 과제, 이러한 과제들을 실현하기 위한 10개의 정책들로 이뤄졌다.

제 1과제(반려동물 보호):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 책무 강화
정책 1. 반려동물 복지 향상
정책 2. 개 식용의 단계적 금지

반려동물 보호와 관련해서 ▲2022년까지 유기동물을 5만 마리 이하로 줄이기 ▲길고양이 티엔알(TNR)의 전면적인 실시(티엔알: 길고양이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정부에서 시행하는 정책이다. 고양이를 포획(Trap)하여, 불임수술(Neuter)을 한 후, 원래 살던 곳에 방사(Return)하는 작업으로 이뤄진다) ▲지자체 직영 유기동물보호소 확대 및 전면 실시 ▲'강아지 공장'으로 문제가 되는 반려동물 생산·판매와 관련하여 동물복지형 전문 브리더제 시행이 제안됐다. 

개 식용의 단계적 금지를 위한 정책도 소개됐다. 이를 위해 ▲개 농장에 대한 전국적 실태 조사를 통한 동물학대·환경오염·방역문제 파악 및 해결 방안 도출 ▲불법으로 운영되는 개 농장 적발과 행정 조치 ▲축산법에서 '개'를 삭제하고 도살을 금지하는 입법 활동 등이 거론됐다.

제 2과제(농장동물 보호): 지속가능한 축산과 위험 관리를 위한 축산 패러다임 개혁
정책 3. 지속가능한 동물복지 축산정책 천명
정책 4. 동물복지 확보 및 효과적인 위험 관리를 위한 방역 정책 수립

농장동물 보호와 관련해서 ▲산란계를 A4 용지 한 장보다 작은 공간에 가둬 기르는 배터리 케이지의 단계적 금지 ▲몸을 한 바퀴 돌릴 여유도 없는 비좁은 우리에 암퇘지를 가둬 기르는 스톨 사육의 단계적 금지 ▲동물복지축산 농장에 대한 인센티브제 구축 ▲축산물 사육환경 표시제 도입 ▲동물복지 도축 및 인도적 운송 시스템의 구축 △육식 문화 지양 및 채식문화 조성이 거론됐다.

조류독감·구제역 등의 전염병으로 살처분되는 동물과 관련해서 ▲생매장 금지 ▲인도적인 살처분 시스템 구축 ▲효과적인 방역 정책 수립도 거론됐다.

제 3과제(실험동물 보호): 실험동물의 윤리적 이용에 대한 국가 정책 수준 향상
정책 5: 동물실험 규제의 선진화
정책 6: 대체시험법 사용의 의무화, 범정부 차원의 대체기술 전략 및 인프라 구축

실험동물 보호와 관련해서 ▲3R 원칙에 따른 실험을 하고 있음을 연구자가 책임지고 입증하는 제도 및 데이터 구축(3R 원칙: 살아있는 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실험방법으로의 대체(Replacement), 실험에 사용하는 동물 수의 감소(Reduction), 마취 등을 통해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완화(Refinement) 등을 통해 실험동물의 희생을 줄이는 원칙을 말한다) ▲영장류 실험 금지 ▲화장품 동물실험의 완전한 금지가 제안됐다.

동물실험을 대체하기 위한 시험법에 대한 정책도 제안됐다. 이를 위해 △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대체시험법의 개발 투자 및 보급과 의무화, 이를 위한 범정부 차원의 전략 및 인프라 구축 등이 거론됐다.

15일 국회에서 열린 동물보호 정책과제 의견수렴을 위한 대시민 공청회. 이날 공청회는 ‘동물복지국회포럼’과 ‘동물보호단체 연합’이 공동주최했고,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가 사회를 맡았다.
▲ '19대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에 바란다!' 15일 국회에서 열린 동물보호 정책과제 의견수렴을 위한 대시민 공청회. 이날 공청회는 ‘동물복지국회포럼’과 ‘동물보호단체 연합’이 공동주최했고,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가 사회를 맡았다.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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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제: 인간과 야생동물의 올바른 관계 모색
정책 7: 야생동물 보호 정책 강화
정책 8: 전시동물 시설의 관리 기준 강화

야생동물 보호와 관련해서 ▲모피 제품 수입·판매 제한 ▲푸아그라·샥스핀·루왁커피 등 식용으로 유통되는 동물학대 제품에 대한 판매 제한이 제안됐다.

동물전시 시설에 대한 관리 기준을 강화하는 정책과 관련해서는 ▲현재 등록제로 운영되고 있는 동물원을 허가제로 전환하여 자격을 갖춘 동물원만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동물쇼 금지 ▲야생에서 포획한 동물의 전시 금지 ▲돌고래 전시 금지 ▲수족관 시설 및 관리 강화가 제안됐다.

제 5과제(일반 종합): 인간과 동물의 생태적 공존을 국가 의무로 천명 및 실현 기구 설립
정책 9. 인간과 동물의 생태적 공존 실현을 위한 기반 마련과 행정 정비
정책 10. 국가 '동물복지위원회'의 설립

지금까지 언급한 동물보호 정책들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정적 기반이 구축돼야 한다. 이를 위해 ▲동물복지 실태조사 및 데이터 구축 ▲정부와 지자체에 동물보호 전담부서 설치 ▲유럽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동물권' 명시 ▲동물보호 교육을 초·중·고등학교 정규과정에 편성하는 정책이 제안됐다.

동물보호법 주무부서를 현재의 농림축산식품부에서 환경부 등 다른 부처로 이관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 이유는 축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존재하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동물보호 업무는 도외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보호 업무를 다른 부처로 이관하고,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장 전염병 대처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제안이 거론됐다.

동물보호 정책을 통합적으로 수립하고 시행하는 추진체로서, 대통령 직속 또는 국무총리 산하의 국가 '동물복지위원회'을 설립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현재 동물에 관한 업무는 농림축산식품부(반려동물·농장동물), 환경부(야생동물), 해양수산부(수생동물), 문화재청(천연기념물), 식품의약품안전처(실험동물)로 분산되어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동물보호는 고사하고 동물에 관련된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국회에는 4곳의 길고양이 급식소가 있다. 황동열 동물유관단체대표자협의회 간사 겸 동물보호단체 '팅커벨' 대표는 국회 급식소가 모범적으로 운영되어 전국의 공공기관에 길고양이 급식소 설치를 당당히 요청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 국회에 설치된 길고양이 급식소 겸 쉼터 국회에는 4곳의 길고양이 급식소가 있다. 황동열 동물유관단체대표자협의회 간사 겸 동물보호단체 '팅커벨' 대표는 국회 급식소가 모범적으로 운영되어 전국의 공공기관에 길고양이 급식소 설치를 당당히 요청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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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제안 후 시민 발언이 이어졌다. 전채은 '동물을 위한 행동' 대표는 농장 전염병과 관련하여 바이러스에 대한 국가적 이해가 전혀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질병이 인간에게 전파될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에, 인간 질병과 동물 질병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연구하는 국가적인 행정체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본인을 '휴메인 소사이어티 인터내셔널' 소속 활동가로 밝힌 한 시민은 실험동물 보호와 관련하여 국내 동물보호법은 3R 강화를 강조하지만 과학기술이 발전된 외국에서는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실험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는 추세를 소개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캣맘' 활동을 한다는 한 대학생은 환경부에 의해 유해조수로 지정된 비둘기가 개체수 조절 등의 대책 없이 혐오동물로만 낙인찍혀 있는 실정을 비판했다. 비둘기가 문제가 된 배경에는 인간의 자연파괴가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본인을 유기동물 보호 활동가로 밝힌 한 시민은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개·고양이 보호를 위한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기자 본인은 캣맘 보호 및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제안했다. 캣맘은 길고양이 개체수 조절을 위해 국가 정책으로 시행되는 TNR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다. TNR은 수컷의 경우 고환을, 암컷의 경우 자궁을 적출하는 대수술로 이뤄진다. 따라서 수술 후 충분한 보살핌과 관찰이 이뤄지지 않으면 자칫 동물학대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며, 실제로 수술 봉합 부위가 터져 내장이 드러난 채 죽어있는 길고양이들이 발견된 사례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사비를 들여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건강을 보살펴주는 캣맘은 국가 정책인 TNR의 인도적 시행에 공헌하는 자원봉사자다. 이런 캣맘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는 사람과 마찰을 빚을 때 지자체는 적극적으로 중재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 길고양이 보호와 캣맘의 역할을 알리는 홍보물 배포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캣맘이 그저 고양이 애호가가 아니라 길고양이와의 공존을 도모하는 지역 봉사자임을 널리 홍보하고, 밥을 주지 말라는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중재하는 지자체의 역할이 필요하다. 또한 길고양이에게 올바른 방식으로 밥을 주고 보살피기 위한 캣맘 소양 교육도 필요할 것이다. 

15일 공청회를 주최한 '동물보호단체 연합'은 이날 논의된 정책에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각 정당 및 대선후보들에게 제안하고 답변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태그:#동물보호, #동물복지, #대선, #19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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