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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회식 자리에선 종종 성추행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진은 KBS에서 방영된 <오작교형제들>의 한 장면.
 직장인들의 회식 자리에선 종종 성추행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진은 KBS에서 방영된 <오작교형제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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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늘 자괴감에 빠졌다. 어제의 회식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저질러진 상사의 성추행을 그 자리에서 비판하지 못한 데에 따른 감정이었다. 남의 몸을 허락도 없이 만진 건 그 상사인데, 왜 다음 날의 괴로움은 가해자인 상사가 아니라 피해자인 나의 몫인가.

'내가 왜 그랬지?' 하고 다음 날 아침 이불을 뻥뻥 차고 죄스런 표정으로 사무실에 겨우 기어와 내 눈치를 살피며 사과를 건네도 모자란 데, 그는 뻔뻔하게 웃으며 '어제 잘 들어갔어?' 라고 내게 물었다. 고민은 언제나 그가 아니라 내가 해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그때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 하는데 지금 말하면 너무 늦지 않았을까. 결국, 그러다 늘 기회를 놓치고 혼자 속으로 분노하다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몇 달간 계속된 상사의 성추행... 회식이 괴로웠다

상사의 성추행은 수개월 동안 지속됐다. 기분이 좋다며 2차 장소로 이동하다가 내 손을 꽉 쥐어 잡고, 이러이러한 일이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내게 괜찮다고 위로하면서 허벅지에 손을 얹거나, 3차로 이동한 노래방에서 술 취한 채 노래하다 볼을 매만졌다. 처음엔 그가 그렇게 하는 행동들이 성추행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같이 취해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 상사가 사무실에선 워낙 젠틀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업무 처리가 늘 깔끔했고 다른 업무 부서와의 갈등도 스마트하게 해결하는 등 일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나는 내심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설마 그분이 일부러 그랬겠어?"하는 마음으로, 피해자인 나 스스로가 그 사람을 먼저 방어하고 나섰다. 그렇게 여겨야 그 사람뿐 아니라 나도, 내 사회생활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견고해질수록, 나는 내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회식 때 그의 옆자리를 피해 앉고, 최대한 말 섞지 않고 멀리 앉아도 찰나의 순간를 놓치지 않고 그는 성추행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볼을 쓰다듬거나, 모두가 취한 상태로 장소를 이동할 때 내게 착 달라붙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당황하여 재빨리 그 상황을 벗어난다 해도, 결국 또 성추행을 당했다는 괴로움이 자꾸 마음속에 쌓였다. '이거 성추행이예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도 스스로 배신감을 느끼고 화가 났다.

그러기를 일 년째, 이제는 안 되겠다고 결심을 굳힌 아침이 왔다. SNS에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이 이어질 때였다. 그 선언들에 용기를 받아 오늘은 꼭 어제의 성추행을 말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출근했다. 마침 그날 오후 팀원 전체가 참여하는 팀 전체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전에 먼저 팀 내 여성 사원들에게 메신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팀 회의 때 상사의 성추행 사건을 이야기하겠노라고, 내가 말을 꺼내면 '아니 정말 그랬어?'라는 식으로 발언이 묻히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 후 계속 속으로 말을 연습했다. '모 선배의 취중 성추행을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참고 참다 순식간에 나온 말 "왜 만졌어요?"... 머릿속은 하얘졌지만

그날따라 시간은 더디게 갔다. 회의 시간만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이윽고 회의시간이 되자 긴장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팀원 전체와 회의실로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걸어가는데, 얼굴로는 웃고 있지만 사실 머릿속엔 '성추행... 고발... 못참겠습니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때, 상사가 나를 툭 건드리며 내가 정말 증오하는 예의 그 인사말을 건넸다.

"어제 잘 들어갔지?"

"어제 제 허벅지 왜 만졌어요?"

말이 나온 건 순식간이었다. 지금까지 준비했던 말들이 무색하게, 굉장히 원색적인 물음이 튀어나왔다. 상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고, 기존에 계획된 시나리오와 갑작스럽게 달라져 다른 여성 사원들도 어떻게 말을 보태야 할지 당황해했다. 나도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으나, 입은 자동반사처럼 이미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제 제 허벅지 만지신 거 기억 안 나세요? 제가 왜 이렇게 자꾸 참아야 되나 싶고요,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요. 이제 좀 그만하세요. 와이프한테 부끄럽지 않아요?"

잠시 주춤했지만 다른 여성 사원들도 곧 와서 '그런 일이 있었어?', '아이고 너무 힘들었겠다!' 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삽시간에 팀원들에게 둘러싸인 상사는 '아니... 내가 그랬나? 아니... 그... 미안... 하게 생각해, 미안해!" 하더니 구둣발로 뛰어서 도망가 버렸다. 회의실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더니, 몇 분 후 팀원 숫자만큼 커피를 사 왔다.

"내가 정말 미안했어, 앞으로 진짜 조심할게. 정말 미안! 미안한 의미에서 커피라도 쏠게. 다들 마셔."

원래 계획했던 것처럼 제대로 된 문제 제기나 고발은 아니었지만, 게다가 그 상사는 결국 젠틀한 이미지도 끝내 잃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이 사건이 꽤 중요한 경험으로 남았다. 이 뒤로 상사는 확실히 성추행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더는 회식 날 또 성추행이 일어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됐고, 회식 다음 날에도 기분 좋게 출근할 수 있었다. 이제 내가 겪었던 불안함을 상사가 겪는지, 그는 회식 날마다 여성 사원들과 멀리 떨어져 앉고 1차만 끝나면 부랴부랴 귀가해버렸다. 불안도, 고민도 원래 해야 할 사람 앞으로 옮겨졌다.

변화를 위해 큰 행동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이 작은 행동을 왜 그동안 못했던 걸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망설이고 고민하는 그 시간 덕택에 그 말 한마디라도 만들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소심한 행동으로 세상이나 사회를 바꾸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적어도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는 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훨씬 행복해졌다.

덧붙이는 글 | '소행성'은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 '우주당'의 프로젝트입니다. 여성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소심하지만 나름대로 노력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우주당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세요(http://wouldyouparty.org/events/7),



태그:#소행성, #우주당, #직장내플러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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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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