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분야의 덕후들이 있다. 애니메이션 덕후, 게임 덕후, 아이돌 덕후, 드라마 덕후…. 그리고 내 안에는, 드라마 <킬미힐미>의 지성을 연상케 할 만큼의 수많은 덕후들이 숨어있다.

[하나] '덕후'의 탄생, 애니메이션

애초에 '덕후', 즉 '오타쿠'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데에는 애니메이션이 크게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덕후'다. 우리 모두 놀이터에서 놀다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에 맞춰 서둘러 집에 돌아가는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교복을 입으면서 대부분의 아이는 '난 이제 초등학생이 아니야!'하며 어설픈 어른 흉내를 냈지만, 난 그때도 지금도 애니메이션을 사랑한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들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하이큐>

애니메이션 <하이큐>. 스포츠에 관심 없던 나를 그 열정적인 코트 위로 빠지게 한 주인공이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하이큐>와 <명탐정 코난>. <명탐정 코난> 같은 경우에는 꼬꼬마 시절부터 아무 생각 없이 즐겨보다가 고등학생 때 전 회차를 다시 보고, 이제는 900화에 달하는 스토리를 줄줄 꿰고 있을 정도이다. <하이큐>는 비교적 최근 들어 빠지게 된 배구 만화. 스포츠에 관심 없던 나를 그 열정적인 코트 위로 빠지게 한 주인공이다. 두 작품 모두 국내에서 극장판 상영을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나는 얼굴에 당당히 철판을 깔고, 꼬꼬마들 사이에서 홀로 팝콘을 씹으며 열심히 보고, 감동하고, 행복해한다.

이것이 내 안의 첫 번째 덕후다.

[둘] 오빠가 몇 명이냐고? 글쎄, 대략 50명?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던 11살의 어린 소녀는 우연히 한 음악 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유리 너머 열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하며 나에게 손짓하는 저 오빠들은 누굴까. 소녀는 생각한다.

'나, 저 오빠랑 사귈 거야!'

내가 동방신기에 처음 빠지게 됐을 때의 모습이다. 11살. 슬슬 사춘기가 오려고 발동을 걸고, 얼굴과 몸을 가꾸기 시작하며, 또래 남자애들이 더는 '애들'로 보이지 않는 웃기고도 귀여운 시절. 잘생긴 남자들이 다섯이나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는데 그 어떤 여학생이 반하지 않겠는가. 그때가 내 '아이돌 덕후' 탄생 시기였다.

TV 속의 오빠들을 열심히 방 안에서만 응원하던 소녀는, 한두 해가 지나 13인조라는 인원수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슈퍼주니어'의 콘서트에 참석했다. TV 속에서만 보던 오빠들을 실물로 본다는 것, 그리고 음악 방송같이 5~1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아니라, 2시간이 넘도록 나의 오빠들과 함께한다는 건 너무나도 행복한 쇼크였다.

'하이라이트' 신인(?)그룹입니다! 잘봐주세요! 그룹 하이라이트(윤두준, 용준형, 양요섭, 이기광, 손동운)가 20일 오후 서울 광장동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첫번째 미니앨범 <CAN YOU FEEL IT?> 쇼케이스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하이라이트'는 장현승의 탈퇴 및 큐브엔터테인먼트가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는 '비스트'에서 이름을 바꾼 뒤 컴백하는 가요계 9년차 그룹이다.

그때 소녀의 마음속에 있던 오빠들은 '비스트'(현 하이라이트)였다. ⓒ 이정민


그 후로 또 몇 년이 지나 처음으로 방송국을 찾아간다. 이른바 '공방'이라 불리는 음악프로 공개방송 참석을 위해서다. 그때 소녀의 마음속에 있던 오빠들은 '비스트'였다. '남친돌'이라는 콘셉트로 진짜 남자친구를 찾던 여학생의 마음을 제대로 공략한 것이다. 난생처음 방문한 일산 MBC 드림센터는 모든 게 신기했다. TV 속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던 방송국의 모습을 실제로 보러 오다니. 그것도 새벽 5시 20분에 출발하는 첫차를 타고! 그 당시 선착순으로 명단을 적어 순서대로 입장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나는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준비했다. 미친 열정이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용돈을 좀 받기 시작하더니 팬 사인회에 발을 들인다. 160도 안 되는 키로 20장의 앨범을 낑낑거리고 들고 간 보람이 있게, 당당히 당첨됐다. 앨범 한 장당 응모권 한 장. 나는 20장을 샀으니 20번 응모할 수 있었다.

콘서트나 공개 방송처럼 무대 위의 '가수'와 객석의 '팬'의 입장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토록 동경해왔던 '오빠'와 1 대 1 대화라니! 얼굴은 빨개지고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손끝은 덜덜 떨려 파래진 그때의 내가 어떻게 그들과 대화를 했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이 이야기를 돈 아까운 줄도 모르고 아이돌에 빠진 한낮 고등학생의 치기와 패기로 치부해버린다면 큰 오산이다. 나는 아직도 수많은 오빠를 좋아하고 있다. 재작년 데뷔한 13인조의 대형 그룹 '세븐틴'. 심지어 이 그룹엔 나보다 어린 멤버도 있다. 아이돌 덕질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역시 음악 방송을 빠짐없이 챙겨보며, 콘서트에 가고, 공개 방송에도 참석하고, 팬 사인회도 응모한다.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도 아이돌을 좋아하는 게 부끄럽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난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늘 보고 듣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그룹 세븐틴

재작년 데뷔한 13인조의 대형 그룹 '세븐틴'. 심지어 이 그룹엔 나보다 어린 멤버도 있다. ⓒ 플레디스


[셋] 목소리를 사랑하는 '성우 덕후'

성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원래는 더빙보다는 자막판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 한국 성우들이 연기하는 더빙판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 배우들이 실제로 연기하는 것처럼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하기 힘들다. 미세한 표정 변화를 나타내기엔 더더욱 힘들 것이다. 그런 표현들을 시청자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성우'라고 생각했다.

한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차분히 말하다가 점점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캐릭터의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난 주인공이 점점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 성우의 연기 덕분이었다. 화를 참고 있는 듯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부터 흥분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임에도 정확히 들리는 발음. 그 후로부터 '성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섞인 것 같은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성우, 실제 나이는 그리 젊지 않지만, 목소리만큼은 미청년인 성우, 한 사람이 내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여러 개의 목소리를 가진 성우 등 내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성우들이 너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예민했던 귀 덕분인지 이제 새로운 더빙판 애니를 보면서 캐릭터의 성우가 누구인지 맞히는 것은 취미가 되어 버렸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청년 캐릭터의 성우인 강수진 성우, 정재헌 성우, 신용우 성우는 내 학창시절 "목소리 첫사랑"이다. 이렇게 표현한다면 세 분이 좀 서운해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연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10주년 맞은 뮤지컬 <쓰릴 미>의 귀환 지난 9일,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열린 뮤지컬 <쓰릴 미>의 프레스콜 현장. 뮤지컬 <쓰릴 미>는 천재적인 두 소년의 로맨스와 범죄를 그린 작품으로, 오프 브로드웨이를 거쳐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다. 10주년을 맞아 초연 멤버부터 인기 있었던 페어들이 돌아왔다. 지난 2월 14일 개막하여 오는 5월 28일까지 진행된다.

뮤지컬 <쓰릴 미>. 내 안의 네 번째 덕후가 바로 그 답도 없는 '뮤덕', 즉 '뮤지컬 덕후'이다. ⓒ 곽우신


[넷] 답도 없다는 덕질에서 '답'을 찾다

어릴 때부터 공연, 그중에서도 특히 뮤지컬에 관심이 많았다. 가슴을 울릴 정도의 큰 음향,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배우들의 목소리와 연기, 환상적인 무대장치와 조명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뮤지컬은 나를 덕후의 길로 빠져들게 했다.

덕후들의 전언 중 이런 말이 있다. '뮤덕은 답도 없다.'

맞다. 내 안의 네 번째 덕후가 바로 그 답도 없는 '뮤덕', 즉 '뮤지컬 덕후'이다. 뮤지컬 덕후가 왜 답이 없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정리된다. 티켓 비용. 덕후란 자고로 덕질하는 분야에 열중해 미친 듯이 보거나, 듣거나, 무언가 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뮤지컬 티켓 비용은 한 달에 한 번 보기에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덕질을 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덕후의 열정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한 달에 얼마 받지도 않는 용돈을 쪼개고 쪼개서 저축하고, 돈이 다 모였다 싶을 때 10만 원이 넘는 티켓을 바로 구입했다. 학창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좀 벌다 보니까 이젠 한 달에 한 번씩 공연을 보고 있다. 소극장에서 하는 창작 뮤지컬들도 자주 접하게 되다 보니 어느 순간 이쪽에 꿈을 갖게 됐다. '내 작품을 써서 무대에 올리는 것'. 이게 최종적인 나의 꿈이다. 아직은 극작과 연출, 기획의 갈래에서 망설이고 있지만, 어쨌든 내 인생을 공연과 함께하고 싶은 것은 확실하다.

답도 없다는 덕질 속에서 나는 답을 찾았고, 그 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여러 가지 덕질을 하는 나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난 전혀 창피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 많고, 더 행복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덕질은 절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창피한 것도 아니고, 우스운 일도 아니다.

이 세상 모든 덕후들이 더 당당해지고, 덕질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내안의 덕후> 응모작입니다.
내안의덕후 덕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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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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