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는 말이 있다. 하지 말아야 하는데 거부하기 힘든 습관이나 음식 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충동 구매라든지, 야식을 먹는 습관이라든지 하는 것 등 죄책감을 느끼지만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길티 플레저라고 부른다.

로망 포르노는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탄생해서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의 길티 플레저가 된 영화 장르다. 그 레이블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와 영화 포스터들의 키치(kitch, 저급한 취향)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당당하게 팬이라고 밝히는 것은 주저 할 듯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플레저'로 남아있는 장르의 영화임은 확실하다.

니카츠 스튜디오 포스터 니카츠 스튜디오 로망 포르노 리부트 포스터

▲ 니카츠 스튜디오 포스터 니카츠 스튜디오 로망 포르노 리부트 포스터 ⓒ nikkatsu studio inc.


로망 포르노는 길티 플레저

하지만, 로망 포르노는 이름이 풍겨내는 것처럼 포르노그래피의 한 종류로 보기는 힘들다. 일반적인 포르노 영화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머니 샷'(money shot : 포르노그래피의 한 용어로 클라이맥스, 즉 사정 신을 말함) 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망 포르노는 실제 정사가 아닌 '시뮬레이티드 섹스'(simulated sex), 즉 재현된 섹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열의 제재 때문에 성기 부분의 노출도 등장하지 않는다).

로망 포르노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이 영화들이 그냥 그런 에로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70년대 당시 일본 영화의 거장들과 작업했던 신진 감독들이 참여한 프로젝트였다. 소노 시온(자살 클럽)이나 나카타 히데오(링) 등 현재 활동하는 일본영화의 메이저 감독들이 로망 포르노의 감독 혹은 조감독 출신들이다. 따라서 로망 포르노 영화들 중에는 작가주의적 시도와 뛰어난 미장센이 포함된 작품들이 상당하다. 이 레이블을 만들어낸 제조사(?)는 1912년에 설립된, 제작 편수와 그 역사로 견주어 단연 일본의 제1영화사로 지칭하기에 무리가 없을, 니카츠 스튜디오다.

1960년대 후반 들어 일본 영화산업은 불황기에 접어든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보는 즐거움'을 독점하던 영화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1960년도 기준 547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군림했던 니카츠 스튜디오 역시 파산에 가까워질 정도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니카츠는 영화사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포르노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경쟁사였던 토호, 다이에이 등의 영화사들 역시 같은 시기에 그들만의 핑크영화 레이블을 만든다. 다만, 검열에 부딪히지 않는 수준의 '포르노'여야 했기에 성기 노출과 실제 정사를 포함하지 않는, 요새 기준으로 보면 '야한 영화' 수준의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일본의 5대 메이저 영화사가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모두 에로덕션(eroduction)에 뛰어들었지만 니카츠 로망 포르노는 그 완성도와 대중들의 평가, 그리고 평단의 평가에 있어서 월등하다. 한 영화 잡지는 "1972년 일본 영화시장에는 니카츠 로망 포르노만 존재한다"라는 헤드라인을 실기도 했다. 니카츠는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로망 포르노 라인으로 파산을 면한 것 훨씬 이상의 이익을 거두고, 17년간 일본 박스오피스를 누비며 승승장구 했다.

완성도와 평단의 평가 월등한 니카츠의 로망 포르노

어떤 점이 니카츠 로망 포르노를 다른 유사 장르의 핑크 영화들과 차별화하는 걸까.

일단 니카츠는 다른 영화사들이 핑크 영화를 한 편 제작하는데 들였던 제작비의 세 배 가량(약 7.5 백만 엔)을 로망 포르노 제작비로 배당했다. 제작 기간도 다른 영화사들처럼 3~4일이 아닌 10일 안팎을 허용해 주었다. 스태프와 테크니션들도 자사 스튜디오에서 가장 숙련된 인재들을 고용했다. 그만큼 영화의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기회를 주되 간섭을 최소화했다는 것이다. 니카츠가 감독에게 요구한 것은 단순했다. 감독은 장르와 내러티브, 소재에 있어서 자유롭게 연출하되 메이저 원칙만 지켜내면 되었다. '60-75분 정도의 영화를 만들되 러닝타임의 4분의 1의 양이 섹스 신이면 된다'는 것. 니카츠가 '로망 포르노'라는 명칭을 '로망 포르노그라피크'(Roman Pornographique)라는 프랑스어, 즉 이야기(노벨라)가 있는 포르노에서 차용한 것을 고려하면 니카츠가 런칭 단계에서부터 차별화를 염두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주목할 점은 또 있다. 와카마츠 코지,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거장들이 60년대에 들어 섹스와 금기를 정면에 내건 사회비판적 영화들을 만들면서 그들의 시도가 로망 포르노 영화들의 직접적인 영감이 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와타나베 마모루 감독의 <롯폰기 스캔들>(1979)이라는 작품은 중산층 여성들의 마약 중독과 성적인 일탈을 심도 있게 그려낸 로망 포르노 영화다. 영화 학자 제스퍼 샤프는 마모루 감독을 "정교한 플롯과 뛰어난 미장센의 대가"로 극찬한 바 있다.

마모루 감독 작품  노예 과부 포스터

▲ 마모루 감독 작품 노예 과부 포스터 ⓒ 와타나베 마모루


니카츠 로망 포르노 영화 중에서 영화 평론가들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은 <천사의 창자> 시리즈다. 제목이 낯뜨겁긴 하지만, 무려 9개의 후속편이 있는 니카츠의 '효자 상품' 이고 그 중 두 번째 편인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1979)은 요코하마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 받았고, 로망 포르노 장르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영화다.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 가학적인 스토리와는 상반되게, 영화는 미학적인 시도로 가득하다.

▲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 가학적인 스토리와는 상반되게, 영화는 미학적인 시도로 가득하다. ⓒ 오렌지옐로하임 영화사


그저 그런 에로물 아냐... 일본 메이저 감독 상당수도 거쳐가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은 에로 영화 배우인 나미가 영화를 찍는 도중에 상대 남자 배우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고 이로 인해 평생을 고통 받으며 비극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가학적인 스토리와는 상반되게, 영화는 미학적인 시도로 가득하다.

가령, 여주인공이 자신을 비극에서 구출해 줄 것 같았던 남자에게 바람 맞고 빗속에서 우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직선으로 내려지는 비를 주시한다. 이 때 보여지는 비는 신파적 감정의 과잉을 전제로 한 서정적 묘사가 아닌, 칠흑 같은 배경에 가느다랗고 흰 세로줄이 촘촘히 그어져 있는, 흡사 감옥을 상징하는 일러스트적 쇼트로 처리되어 있다. 이런 설정 이외에도 영화 전반에 걸쳐 여주인공 나미가 창틀의 그림자나 조명의 음영으로 굵고 얇은 다양한 '줄'에 얽매여 있음을 상징하는 쇼트들이 등장한다. 불행한 사건을 겪은 여주인공의 심리를 막연한 울부짖음 이상으로 전달한 작가주의적 시선으로 이해해도 무방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천사의 창자 시리즈 포스터 천사의 창자 시리즈 컬렉터스 에디션 포스터

▲ 천사의 창자 시리즈 포스터 천사의 창자 시리즈 컬렉터스 에디션 포스터 ⓒ Nikkatsu Studio INC.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은 몇 차례 등장하는 섹스신을 제외하면 흡사 예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초현실적인 미장센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아마도 예술사를 전공하고 스즈키 세이준(살인의 낙인) 같은 거장의 조감독으로 일했던 소네 추세이 감독의 약력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을 것이다.

소재의 고갈과 미디어 시장의 변화로 로망 포르노는 1980년대에 들어 쇠퇴하지만 당시 활약했던 몇 몇 감독들은 현재 일본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류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로망 포르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이 성을 담보 삼아 표현 될 수밖에 없던 환경에서 영화인들의 고군분투가 그대로 투영된 텍스트이자 유산일 것이다. 섹스신은 지나쳐도 좋지만, 이 들의 심미적이고 재기발랄한 습작들은 눈여겨 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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