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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24>에는 가상조직인 대테러 방지팀이 등장한다. 테러 발생 위험을 감지한 대테러 방지팀 요원이 동료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Have you called Langley?" 누군가 이 문장을 다음처럼 번역했다. "랭글리에게 전화했어?" Langley를 네이버 영어 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아래와 같은 예문이 먼저 눈에 띈다.

"Langley is trying change the situation.(랭글리는 이 상황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예문도 Langley를 사람 이름으로 번역한 것이다. 앞 철자가 대문자로 돼 있어서 인명일 거라고 짐작했으리라. 과연 그럴지 아래 문장을 보자.

"company는 미국의 중앙정보국인 CIA를 일컫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CIA는 본부가 버지니아 주 랭글리에 있기 때문에 Langley라고도 불리지요."

출판번역가인 박산호가 쓴 <단어의 배신>(유유)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CIA에 연락했어?"라고 제대로 번역할 수 있었을 거다.

베테랑 번역가도 몰랐던 원어민의 영단어 사용법
▲ <단어의 배신> 박산호 저, 유유 베테랑 번역가도 몰랐던 원어민의 영단어 사용법
ⓒ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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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배신>은 영상번역을 시작으로 문서번역을 거쳐 출판번역가로 자리 잡은 박산호 저자가 60여 권의 외서를 번역하며 수집했던 영단어 중 100개를 선별해 정리한 책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초보 번역가 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영어 단어에 대한 인상과 선입견 때문에 종종 오역을 했다고 고백한다.

평소에 익숙하게 알고 있던 뜻으로 번역하려다, 전혀 생각지 못한 다른 뜻이 더 있다는 걸 알고 단어에게 배신을 느낀 순간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단어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거란 걸 깨달았단다.

내가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인터넷 영어 사전을 검색하는 것. 영상번역이 직업인 나는 번역과 감수를 하느라 수시로 사전을 검색한다. 마감 시간에 쫓겨 서둘러 일하다 보면, 여러 가지 뜻 중에서 초반에 보이는 것 몇 개만 쓰윽 훑어보고 넘어가게 된다.

그 뜻을 대입해 봐도 의미가 통하지 않으면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 나오는 해설을 끝까지 다 읽는다. 그래도 적당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영문 사이트를 검색하며 사전에 없는 또 다른 의미를 찾아 헤맨다. 그때마다 "이놈의 영단어는 무슨 뜻이 이렇게 많아"라고 씩씩대기 일쑤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수도 없이 영단어에 배신을 느꼈다.

번역을 하다 영단어에 뒤통수를 맞지 않으려면 사전에 수록된 모든 뜻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맥락에 맞는 적절한 뜻을 선택해야 한다.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 영어 사전에도 없는 뜻이 많기 때문에 다각도로 검색을 해 봐야 한다.

슬랭 사전도 뒤져야 하고 역사적, 문화적 배경까지 샅샅이 조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어의 배신>은 번역가로서 매우 반가운 책이다. 저자가 번역하다 빈번하게 만난 영단어 중에서도 다양한 의미와 흥미로운 역사를 지닌 단어를 우선적으로 추렸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각 꼭지마다 한 가지 영단어를 제시하며 우리한테 익숙한 의미를 먼저 알려 준다. 그 후 거기서 파생된 또 다른 의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영단어의 어원이나 인문학적 배경을 얘기해 주는 책은 이미 여럿 있다. 두꺼운 분량에 먼저 기선 제압을 당하고, 책을 펼치면 저자의 무한한 지식 자랑에 기가 눌릴 때가 많다.

반면, <단어의 배신>은 총 200여 페이지 분량에 책 크기도 아담한 편이라 전철에서 한 손으로 들고 읽어도 좋을 만큼 부담이 덜하다. 거기다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인문학 지식에 버무려 단어 뜻을 사근사근 설명하니, 페이지가 쓱쓱 넘어간다. 100개의 단어를 모았으니 전형적인 단어집인가 싶지만, 에세이처럼 구성해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에 어니스트 허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으며 제목을 'Goodbye to weapon'이라고 영작하고 우쭐하다가 원제가 'A farewell to arms'인 걸 알고 부끄러웠다는 고백. farewell이 '작별'이란 뜻이란 것도 몰랐지만 arm에 '무기'란 뜻이 있다는 걸 알고 경악했다고. 덕분에 독자 머릿속에도 arm의 다양한 의미가 제대로 박힌다.

arrest의 활용 단어 house arrest(가택 연금)를 미얀마의 정치가 아웅 산 수 치와 연결해 설명하며 말미에 '역사적인 위인이나 영웅이라는 표현은 쉽게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저자의 생각을 엿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 보면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cat을 설명할 때는 저자 자신이 고양이 주인님을 모시는 집사라고 밝히며 고양이를 숭배하던 이집트 고대 역사까지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이렇듯, 저자는 영단어를 중심으로 번역, 영어 공부, 개인 경험을 비롯해 현재 한국의 현실, 서양사, 인문학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연결해 펼쳐놓는다.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선배의 번역 노하우를 얻어 갈 수 있고, 영어 공부에 목마른 독자는 영어 공부법 단서를 얻어 갈 수 있다. 100개 단어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쉬운 단어로 이뤄져 있어서 영어가 아닌 타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들한테도 부담이 없을 것 같다.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고 가볍다.

아무리 쉬운 단어만 골라 놨다지만, 책의 모든 내용이 모두 머릿속에 남는 건 아니다. 억울하다. 분명 쉽고 재미있게 읽었는데, 책을 덮는 순간 휘발되어 버리다니. 하지만 저자는 애당초 영단어를 정복하는 비법을 알려 주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단서를 얻어 영어 공부 방향을 잡으면 된다.

책 마지막에는 저자가 집필하며 참고했던 단어와 인문학과 관련된 책 목록이 수록돼 있다. 본문을 읽으며 단어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올린 후 그 목록에서 관심이 가는 책을 골라 읽어도 좋겠다. 나는 <단어의 배신>을 덮자마자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참고 문헌 목록을 담았다.

세상의 모든 영단어를 모조리 모아 놓은 벽돌만 한 두께의 영어 단어집들은 영어를 정복해 보자고 독자를 부추긴다. 영어 공부 하는 이들이라면 책장에 그런 책쯤 한 권씩 있으리라. 맨 앞부분만 손때가 타고 뒤쪽은 새하얗게 깨끗한 채로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외국어는 정복할 수도 없고 정복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정복하겠다고 야심차게 달려들었다가는 계속 배신당하고 뒤로 나가떨어질 것이다.

"나에게 배신감을 준 단어를 채집해서 처음 번역을 시작하는 사람은 좀 더 영리하게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를 해 보았다. 이렇게 단어를 정리하다 보니 이 원칙은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 아는 거야, 다 겪어 본 거야, 다 해 본 거야'라는 오만과 편견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세상의 이면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살아온 걸까. 나도 모른다는 냉엄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앎을 위한 첫 단계가 아닐까."

저자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게? 이렇게 쉬운 단어를 또 공부하라고?' 이런 자만을 버리고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심정으로 익숙한 단어를 다시 들여다봤더니 또 다른 얼굴을 불쑥 내민다. 그저 영단어 하나 공부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사를 알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되고, 삶에 대해 생각까지 하게 되다니. 이게 바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즐거움이요, 번역을 하는 원동력이다.

인공지능 번역기가 발달하면서 조만간 외국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번역가로서는 일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공포스러운 얘기다. 단어 공부를 하며 섬세하게 사유하며 고른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을 갖추면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이 될 거라는, 저자의 말이 위로가 된다.

덧붙이는 글 | <단어의 배신> 박산호 저, 유유출판사



단어의 배신 - 베테랑 번역가도 몰랐던 원어민의 영단어 사용법

박산호 지음, 유유(2017)


태그:#단어의배신, #박산호, #출판번역, #유유출판사, #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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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며 글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영상번역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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