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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인물인 홍길동·홍경래와 대한민국 시대 인물인 홍준표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남양 홍씨라는 점이다. 경기도 수원시 서쪽의 해안 도시인 화성시가 과거에는 남양으로 불렸다. 세 사람의 본관은 그곳이다. 

본관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민중의 저항으로 보수세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다들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다. 홍길동과 홍경래는 진보의 입장에 서고 홍준표는 보수의 입장에 섰다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유사한 상황에서 정치적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은 같다.

양반·평민의 양극화와 연산군의 실정으로 서민 대중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 15세기 후반. 이때 군대를 이끌고 조선왕조에 대항한 인물이 MBC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의 홍길동이다.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 따르면, 홍길동은 의적이 아니라 반체제 운동가 혹은 혁명가였다. 홍길동을 소설 <홍길동전> 속의 가상의 인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세종실록>이나 일제 때 발행된 <만성대동보>라는 족보에 따르면 홍길동은 세종 때 고관인 홍상직을 아버지로 둔 실존 인물이었다. <만성대동보>에 따르면 홍상직과 홍길동은 남양 홍씨였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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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이 살았던 15세기 후반, 보수세력은 두 가지 방면에서 위기에 봉착했다. 무반과 문반의 관료 계층을 가리키던 양반이란 법적 개념이 15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경제적 개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392년 왕조가 세워진 이후로 양반 계층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다 보니, 직업을 가리키던 양반이란 개념이 상류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부와 경제력이 양반층에 집중되다 보니 서민층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권과 민중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이것이 보수 세력에게 위기로 느껴졌다. 

또 하나의 위기는 정치권 내부 갈등이었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재위 1469~1494년)은 훈구파라 불리는 보수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지방의 유림세력(이른바 사림파)을 대거 등용했다. 보수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유림을 이용해 보수를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대두된 유림들이 진보적 정치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양극화 심화, 정치권 갈등이 홍길동 불렀다

이렇게 15세기 후반의 보수세력은 정치권 밖으로는 민중의 도전을 의식하고, 정치권 안으로는 유림세력의 도전을 의식해야 하는 이중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재위 1494~1506년) 집권 기간에 홍길동이 군대를 거느리고 왕조에 저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홍길동은 지방 유지들은 물론이고 일부 중앙 관료들의 도움까지 받았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00년에 홍길동이 체포된 뒤로도 13년간이나 충청도에서는 홍길동의 여파로 인해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고 한다. 홍길동으로 인해 현지의 행정체계가 무너진 까닭이었다. 

당장에 조선왕조를 없애거나 크게 바꾸지는 못했지만, 홍길동은 왕조와 보수 세력에게 크나큰 타격을 입히고 떠났다. 그리고 서민 대중에게는 희망을 주고 떠났다. 조선왕조라는 거대한 조직도 여차하면 흔들릴 수 있으며 계속 저항하다 보면 세상이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그는 떠났다. 그만큼 심대한 영향을 주고 갔기에 허균의 <홍길동전>을 통해 되살아나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구르미 그린 달빛> 속의 홍경래(정해균 분).
 <구르미 그린 달빛> 속의 홍경래(정해균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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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과 똑같은 남양 홍씨로서 홍길동과 같은 길을 밟은 인물이 약 300년 뒤의 홍경래다. 배우 박보검으로 인해 인기를 많이 끌었던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 나온 홍라온(김유정 분)의 아버지가 바로 홍경래다. 홍경래한테 홍라온이란 딸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오늘날 발행된 많은 책에는 이른바 '홍경래의 난'이 1811년 발생했다고 쓰여 있지만, <순조실록>에 따르면 이것은 음력으로 순조 11년 12월 18일, 양력으로 1812년 1월 31일 시작된 사건이다. 

1812년이면 개혁군주 정조가 사망한 지 12년 뒤다. 정조의 죽음으로 영조·정조 2대에 걸친 개혁정치는 수포로 돌아갔다. 동시에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같은 몇몇 가문이 돌아가면서 독재정치를 하고 세도(勢道, 세력 과시에 의한 정치)를 부리는 양상이 나타났다. 정조가 나이 어린 순조를 두고 떠난 데에다가 어린 왕의 정권을 지켜줄 왕실 세력이 부재한 탓에 외척들이 권력을 독식한 결과였다.

왕실도 하나의 가문이지만, 왕실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한다. 하지만, 왕실이 아닌 가문이 정권을 차지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아무래도 자기 가문 위주로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 전체의 이익보다는 가문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세도 가문들의 세도정치 하에서 민란이 급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홍경래, 실패하긴 했지만...

이런 시점에서 홍경래는 평안도 부자와 선비들의 지원을 받아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의 평안북도를 점령했다. 만약 이 부대가 작전계획을 놓고 내분을 일으키며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빨리 남하작전을 전개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홍경래는 훨씬 더 큰 성과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홍길동처럼 실패하긴 했지만, 홍경래 역시 후세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한 기억을 새겼다. 특히 평안도 사람들한테 그런 영향을 줬다. 평북 출신 시인 김소월도 그런 영향을 받았다. 어린 시절 그는 숙모로부터 홍경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로 인해 나온 시가 <물마름>이다. 스물네 살 때인 1925년 <조선문단>에 기고한 작품이다.

그 누가 생각하랴 삼백년래에
참아 다 받지 못할 한과 모욕을
못 이겨 칼을 잡고 일어섰다가
인력의 다함에서 스러진 줄을

부러진 대쪽으로 활을 메우고
녹슬은 호미쇠로 칼을 별러서
도독(荼毒) 된 삼천리에 북을 울리며
정의의 기를 들던 그 사람이여

도독은 씀바귀 독이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심한 해독이나 부조리를 뜻한다. 그런 해독이 잔뜩 만연한 삼천리 조선왕조를 뜯어고칠 목적으로 홍경래가 북을 울리고 정의의 기를 들었다고 김소월은 노래했다. 홍경래의 혁명 정신이 100년 뒤 김소월의 여린 가슴에도 스며들었던 것이다.

홍길동·홍경래 두 남양 홍씨는 왕조가 위기의 기로에 섰을 때 서민 대중과 진보의 편에 서서 궐기했다. 그들은 결코 보수의 편에 서서 부귀영화를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보수의 기'가 아니라 '정의의 기'를 들었고, 자기 대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진보시키는 데 기여했다.

홍길동·홍경래와 본관이 같은 홍준표. 나라가 위기의 기로에 섰을 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홍준표는 두 홍씨와 비슷하다. 두 홍씨처럼 창검을 들지 않고 그 대신 마이크를 들기는 했지만, 위기의 시대에 뭔가를 하고자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조선 시대 두 홍씨와 다른 길 걷는 홍준표

하지만 홍준표는 두 홍씨와는 달리 무너져가는 보수의 편에 서 있다. 국민 대다수의 요구로 대한민국 정치체제가 새롭게 탈바꿈하려는 이때, 홍준표는 죽어가는 과거 체제에 어떻게든 호흡을 불어넣을 목적으로 보수의 기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2017년처럼 대한민국이 위기의 기로에 섰던 1960년 4월 혁명 때,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명령하고 개헌 카드를 내세워 혁명 정국을 호도하려 했던 홍진기 내무장관처럼, 홍준표도 무너져가는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3주기인 지난 16일, 추모식에 불참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세월호 가지고 3년을 해 먹었으면 됐지"라고 답변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세상의 변화를 무시하고 보수의 깃발을 마냥 꽉 붙들고 있다. 

홍길동·홍경래는 자기 대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길게 보면 성공한 사람들이다. 역사는 결국 그들이 지향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홍준표는 자기 대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2016년 10월 이후의 상황 전개로 볼 때 그렇다. 대선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자기 대에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그는 앞선 두 홍씨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홍준표는 절대로 홍길동·홍경래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 홍준표는 자기 대에는 물론이고, 길게 볼 때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대한민국 보수는 훗날의 역사에서도 안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들이 역사를 퇴보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의 선두를 자처한 홍준표는 절대로 홍길동·홍경래 같은 인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태그:#홍길동, #홍경래, #홍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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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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