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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에게 자살을 추천함."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극장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온 관객이 SNS에 남긴 글이었다. 일본 영화를 영어 번역가가 번역을 했다는 이유였다. 동료 번역가 A가 당한 일이다. 마치 내 일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절친한 동료라서 감정 이입이 더 잘 된 탓도 있겠지만, 영상 번역가라면 이런 일을 숱하게 겪는다. "번역가 면상 한번 보자", "번역 때려치워라" 지면에 그대로 옮기기 민망한 욕설을 듣기도 한다. 번역가의 자질을 운운하며 번역을 그만두라는 글들을 읽다 보면, 같은 번역가로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번역을 그만두라는 건 번역가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관객들은 극장에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본다. 그들에게 영화는 상품이다. 자막이 엉망이면 작품성이 훼손돼서 불량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교환이나 환불이 불가능하다. 대신, 번역가에 대해 보이콧 운동을 하는 방식으로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한다. 영화 평론가나 문학 평론가는 있어도 '영화 자막 평론가'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들이 자막 비평을 하고 여론이 형성되면서 번역 품질을 평가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그동안 번역가들이 얼마나 번역을 엉망으로 했으면 우리가 이러겠냐. 더 이상 못 참겠다." 한 네티즌이 이런 취지로 온라인에 남긴 글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영상 번역가에 대한 그 깊은 불신과 증오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어떻게 해야 관객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번역 노동자로서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가들 중 가장 저명한 그레고리 라바사가 쓴 <번역을 위한 변명>(이종인 역, 세종서적)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가들 중 가장 저명한 그레고리 라바사가 쓴 <번역을 위한 변명>(이종인 역, 세종서적)
ⓒ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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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민을 하던 중, <번역을 위한 변명>(이종인 역, 세종서적)을 읽게 되었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가들 중 가장 저명한 그레고리 라바사가 쓴 책이다. 첫 장을 열자마자 아래 구절을 만났다.

"번역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낙담시키는 말장난 조의 이탈리아 격언 '번역자는 반역자'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굳건히 버텨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번역자가 불운하게도 오류를 저지른 사람보다 더 죄질이 나쁜 반역적 악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3쪽)

'번역가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라바사도 번역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자기 번역서를 악착같이 씹어대던 비평가를 '번역 경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부 과열된 영화 자막 번역 논란을 보면 영상 번역가들 역시 '반역자'로 처형돼 마땅한 대상으로 취급받는 것 같다.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원문을 훼손한 죄, 다시는 번역을 하지 못하게 두 손을 잘라라!"

라바사는 번역가를 가리켜 '명예로운 일용직 노동자'라고 표현했다. 이에 반해, 지금 한국의 영상 번역가들은 '불명예로운 일용직 노동자'처럼 보인다. 나는 거의 20년간 영상번역 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업계 시스템과 번역가들의 삶을 지켜봤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감히 '영상 번역가들을 위한 변명'을 해 보겠다.

영상 번역가들을 위한 최후의 변론
먼저 고백을 하자면, 출판 번역보다 영상 번역이 태생적으로 더 큰 반역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극장 스크린에 뜨는 자막은 최대 두 줄까지만 허용된다. 대체로 한 줄에 15글자를 넘어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요즘에도, 많은 이들이 비싼 돈을 들여서 극장을 찾는 것은 대형 스크린에서 영상을 감상하는 재미를 만끽하기 위해서다.

자막이 너무 길면 스크린을 많이 가리고 관객의 시선을 빼앗아 감상을 방해한다. 캐릭터 말 속도가 빠를 경우, 원문에 있는 정보를 다 집어넣고 직역을 하면 다 읽기도 전에 자막이 사라진다. 그래서 영상 번역가는 원문에 있는 단어를 생략하거나 압축해 간결하게 번역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한글 자막이 원문보다 짧고 부실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라바사의 말을 살짝 바꾸자면, 영상 번역가는 영화의 감독 및 작가를 배신하는 동시에, 다양한 관객층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라바사는 본인이 번역한 31개의 작품들을 '명세서'처럼 일일이 나열하며 어떻게 저자와 독자 그리고 자신을 배반했는지 서술했다.

라바사는 가장 슬픈 반역은 '번역가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했다. 번역의 당초 목표를 배신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진부한 규범을 더 중시하면서 확신에 찬 직감을 희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개봉 중인 영화들 화면 캡처.
 현재 개봉 중인 영화들 화면 캡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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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는 영상 번역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번역 실력 자체의 문제 말고도, 외적인 압박과 내적인 갈등 때문에 방어적으로 번역을 하면서 더 심각한 반역을 저지른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외화를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로 구분하지만, 어떤 경우든 상업성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

영화사가 지속적으로 좋은 외화를 발굴해 구매하려면, 개봉작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해야 한다. 관객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마케팅의 일환으로 번역가에게 번역 방향을 지시하기도 한다.

심의 등급을 낮추기 위해 수위가 높은 표현을 순화시켜 달라거나, 어려운 표현을 쉽게 풀어 달라거나, 어린이 관객을 많이 끌기 위해 유행어를 적극 써 달라거나 다양한 요구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일용직 노동자'와 마찬가지인 영상 번역가로서는 고용주인 영화사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힘들다.

마니아 팬층을 거느린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맡으면, 번역가는 두려운 마음으로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마니아 팬을 만족시키는 번역을 할지, 원작을 모르는 일반 관객까지 고려한 번역을 할지. 영화사에서 일반 관객까지 만족시키길 원한다면, 번역가는 마니아 팬들을 배반하게 된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번역가는 관객 중 누군가는 배반할 수밖에 없다.

관객들마다 자막에 대한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행어를 쓰면 트렌디하고 재치 있다고 환영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원작을 훼손했다고 강하게 불만을 표하는 이도 있다. 존댓말과 반말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문화권의 영화는 번역가가 캐릭터 성격 및 인물간의 관계를 파악하고 말투를 설정한다. 이때도 관객의 성향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어떤 작품이 1만 명의 독자를 가지고 있다면 그건 1만 개의 다른 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영화 역시, 1만 명의 관객이 있다면, 1만 편의 다른 영화가 된다. 번역가도 관객 중 하나이므로 같은 원문도 번역가에 따라 다양한 자막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일부 관객은 번역에 하나의 정답만 있다고 믿는 듯하다. 직역주의를 고수하는 관객은 사전적 의미와 다르게 번역이 되면 틀렸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가령, "Don't open it until you get to Las Vegas."라는 문장을 보자. Don't~ until~을 '~할 때까지 ~~ 하지 마라'라고 직역하는 대신 '~하면 ~해라'라고 긍정형으로 번역할 수 있다.

직역 :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기 전까진 열어 보지 마.
의역 :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면 열어 봐.

영화 번역의 경우, 글자 수를 줄여야 하니 의역을 선택하는 게 좋다. 이런 경우에, 'until'이 '~까지'란 뜻인 걸 모르고 '~하면'이라고 오역했다고 지적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영어와 한국어는 어순도 다른 데다, 모든 단어의 의미를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 없다. 원문을 그대로 투명하게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영어를 엄격하게 직역하라는 건, "장난 지금 나랑 하냐" 이런 식의 개콘 유행어 같은 문장을 쓰라는 말이다.

이렇듯, 영화사와 관객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영상 번역가는 매 순간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기준이 모호한 자막 비평이 번역가에게 감시 및 억압 수단으로 작용하면 번역가는 안전하고 틀에 박힌 번역을 하게 될 것이다. 최근 급격하게 발전 중인 인공지능 번역기에게 영화 번역을 맡기면 관객들은 더 이상 배반당할 일 없을까. 원문을 100번 입력해도, 매번 똑같은 번역문을 내는 기계를 더 믿을 수 있을까.

영상에 비치는 캐릭터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표정은 기계가 아직 읽어낼 수 없다. 캐릭터의 미세한 감정까지 번역문에 담을 수 있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영상 번역가가 자기 확신을 갖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반역죄에 조금 관대해지면 어떨까. 반역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번역가들 목을 모조리 쳐낸다면, 감히 번역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을 것이다.

라바사는 변론을 마치며 책 말미에 아래처럼 적었다.

"판사 자격으로 나는 소위 스코틀랜드식 판결, 즉 '입증되지 않음'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우리 번역자들은 수탉이 우는 시간에 총살당하지 않을 것이나, 그렇다고 작업하면서 뭔가 반역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나다닐 수도 없다."(273쪽)

라바사는 출판 번역가이지만 영상 번역가 입장에서는 공감 가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제목을 지을 때도 의미를 번역할 것인지 소리가 들리는 대로 번역할지 생각하는 그의 모습에 영상 번역가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매 순간 반역을 저지르며 화가 난 군중에게 처형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 한 명의 관객으로서 작품에 몰입해 울고 웃으며 깊은 새벽까지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영상 번역가들에게 <번역을 위한 변명>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번역을 위한 번역> 그레고리 라바사 저, 이종인 역, 세종서적



번역을 위한 변명

그레고리 라바사 지음, 이종인 옮김, 세종서적(2017)


태그:#번역을위한변명, #그레고리라바사, #출판번역, #영상번역, #영화자막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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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며 글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영상번역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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