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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중도일 마을을 지나가는데 과수나무가 잎을 내고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께 여쭤 보니 대추나무랍니다.
 중도일 마을을 지나가는데 과수나무가 잎을 내고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께 여쭤 보니 대추나무랍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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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초면인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반드시 적용되는 공식 같은 게 있습니다. 기승전'나이'가 그것입니다.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갔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화 도중에 때가 되면 꼭 이렇게 묻게 됩니다.

"그런데…, 몇 살이세요?"

처음 보는 사람과 얘기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궁금증의 싹이 돋아납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을까, 적을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궁금증은 쑥쑥 자라나고 어느 시점이 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고 맙니다. 결국 나이를 물어 보며 궁금증과 불안감을 해소하게 됩니다.

중도일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멀리 잘록한 부분이 불랫재... 사람도 넘고 짐승도 넘고 간혹 산불도 넘던 고개입니다.
 중도일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멀리 잘록한 부분이 불랫재... 사람도 넘고 짐승도 넘고 간혹 산불도 넘던 고개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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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유교적 질서 속에 살아온 우리에게는 '장유유서(長幼有序)' 개념이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듯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우선입니다. 자리도 상석에 앉아야 하고 음식도 먼저 먹어야 합니다. 적당히 말을 낮춰도 되고 상대를 슬쩍 깔봐도 그런 대로 용인이 됩니다. 나이가 곧 계급이고 권력입니다. 늑대가 힘으로 서열을 정하듯 우리는 나이로 서열을 정합니다.

지난 2월,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발부됐을 때 박사모라는 단체가 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향해 극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정석, 고작 서른아홉 살짜리가 나라를 망친다!"

제가 보기에 서른아홉 살은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10년을 훌쩍 뛰어넘는 법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웃라이어>에 소개되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보더라도 베테랑이 두 번 되고도 남을 만큼 오랜 기간입니다.

산에 올라 내려다본 도일리 풍경입니다.
 산에 올라 내려다본 도일리 풍경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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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직함을 가진 이기동씨가 의원들의 질문에 흥분하다가 갑자기 화장실에 가서는 씩씩거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 내가 때려치우고 말지. 새파랗게 젊은 것들한테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이런 분들한테 나이는 지고지존의 가치인가 봅니다. 사리의 옳고 그름보다 나이가 더 중요시돼야 하나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나이 말고는 존경할 만한 가치를 찾아보기 힘든 분들입니다. 나이 하나 가지고 행패를 부리는 모습에 그저 씁쓸한 생각만 들 뿐입니다.

기, 승, 전, 나이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이 나이를 우선시하고 나이 많은 분을 존중해야 하는 관습이 어느 정도 박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러나오는 성찰과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지 단순히 나이만을 앞세워 강요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봅니다.

낙동정맥 마루금을 따라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길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낙동강으로, 왼쪽은 형산강으로 흘러갑니다.
 낙동정맥 마루금을 따라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길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낙동강으로, 왼쪽은 형산강으로 흘러갑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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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올해 예순이 됐습니다. 쉰아홉하고 예순은 다가오는 느낌이 또 달라서 예순이 되면서는 나이가 좀 끔찍하고 우울한 느낌까지 들곤 합니다. 예순…,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옛날 같으면 일도 하지 않고 아랫목에 앉아 손주들 재롱이나 볼 나이입니다. 어떤 친구는 "옛날 같으면 지금 죽어도 호상이야"라면서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이 가지고 으스대고 큰소리치고 거드름 피우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보다 나이가 좀 적다고 해서 상대를 가볍게 여기는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한 게 아예 상대 나이를 묻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내 나이도 얘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나이를 묻지 않겠다는 생각에는 나이로써 상대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상대를 모두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 대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체로서 하나의 삶이고 인생이고 우주입니다. 어찌 가볍게 볼 수 있을까요.

결심 13 / 상대방의 나이를 묻지 말자. 나이에 관계없이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자.

뚜껑을 열고 쑥 나타난 듯한, 조금은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피어나는 천남성 꽃. 꽃치고는 모양도 좀 이상하지만 독성도 품고 있어서 만지기만 해도 가렵고 물집이 생기기도 합니다.
 뚜껑을 열고 쑥 나타난 듯한, 조금은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피어나는 천남성 꽃. 꽃치고는 모양도 좀 이상하지만 독성도 품고 있어서 만지기만 해도 가렵고 물집이 생기기도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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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13구간 종주
날짜 / 2017년 5월 13일 (토)
위치 / 경상북도 영천시, 포항시, 경주시
날씨 / 구름 많고 바람도 제법 불어 주었음
산행 거리 / 20㎞
소요 시간 / 7시간
산행 코스(남진) / 불랫재 → 운주산 → 이리재 → 봉좌산 → 도덕산 → 오룡고개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산골짜기를 굽이굽이 파고들어간 산악회 버스가 길이 좁아지며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자 일행이 우르르 버스에서 내립니다. 영천시 자양면 도일리, 그중에서도 중도일이라는 마을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등산화 끈을 조이고, 모자를 쓰고, 배낭을 둘러메고, 스틱을 움켜쥐면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오늘 갈 산길은 20㎞… 내 페이스를 잃지 말고 차분하게 가자고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적당히 드리운 흰 구름이 햇볕을 막아 주고, 시원한 바람도 건듯 불어 주니 산행하기에는 참 좋은 날입니다. 평탄하게 이어지던 농로가 살짝 각도를 높이면서 고갯길로 변합니다. 포항 쪽 불랫골로 넘어가는 고개입니다. 고개 이름도 불랫재입니다. 얼핏 들으면 영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당당한 우리말입니다.

운주산에 올랐습니다. 제를 지내는 넓은 단이 있는데 근래에 쌓은 것이라 합니다.
 운주산에 올랐습니다. 제를 지내는 넓은 단이 있는데 근래에 쌓은 것이라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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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랫재는 불래+ㅅ+재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재'는 고개이고, '불래'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얘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1. 불래(佛來), 즉 "부처님이 오셨다."

2. 불래(不來), 즉 "돌아오지 못한다."
이 고개를 넘어서 산속으로 들어가면 범 같은 짐승이나 흉포한 도적에게 화를 입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3. 불래(불+來), 즉 "불이 넘어온다."
영천 쪽에서 불이 나면 강한 서풍을 타고 잘록한 이 고개를 넘어 포항 쪽으로 번져 가 마을이 타 버렸다는 겁니다. 불랫재를 한자로는 화령현(火嶺峴)이라고 하는 걸로 보아 이 유래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사람, 부처, 짐승이 함께 넘나드는 고갯길

어쨌든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재를 넘어 사람도 다니고 때로는 부처님도 다니고 그 틈을 타서 도적도 넘나들고 했나 봅니다. 심지어는 불까지 재를 넘었다는데, 요즘 강릉에서 난 산불이 산에서 산으로 옮겨 붙는 모습을 보면 재 하나쯤 넘는 것은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영천시 임고면과 포항시 기계면을 잇는 이리재입니다. 옛날에 기계면 쪽에서 올라온 나무꾼이 앞선 나무꾼을 놓쳐 영천 쪽에서 올라오는 길손에게 물었답니다. "혹시 나무꾼 못 봤나요?" 그러자 길손이 대답했습니다. "이리로 넘어갔어요." 그래서 고개 이름이 이리재가 됐다는데... 허무 개그 한 편 같기도 합니다.
 영천시 임고면과 포항시 기계면을 잇는 이리재입니다. 옛날에 기계면 쪽에서 올라온 나무꾼이 앞선 나무꾼을 놓쳐 영천 쪽에서 올라오는 길손에게 물었답니다. "혹시 나무꾼 못 봤나요?" 그러자 길손이 대답했습니다. "이리로 넘어갔어요." 그래서 고개 이름이 이리재가 됐다는데... 허무 개그 한 편 같기도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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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잎을 내어 숲을 이루면 그 아래 땅은 햇빛이 가려져 작은 나무나 풀이 살아갈 여건이 나빠집니다. 이들에게는 물과 함께 햇빛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봄이 되면 나무들이 잎을 내기 전에 야생화는 부지런히 꽃을 피워 냅니다. 하양, 노랑, 빨강, 분홍, 보라… 온갖 빛깔로 앞 다투어 피어오르는 들꽃에 현기증마저 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야생화가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지금은 숲이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녹음이 짙어진 숲속에서 햇빛 욕심이 그리 크지 않은 놈들이 여유를 부리며 느긋하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둥굴레도 그중 하나입니다.

작지만 우아한 둥굴레

둥굴레는 다소곳한 모습이지만 작은 야생화치고는 자태가 꽤나 우아합니다. 하늘을 유유히 배회하는 새처럼 좌우로 잎을 쫙 펼쳤고, 그 아래로 올망졸망 예쁜 꽃들이 앙증맞게 달려 있습니다. 꽃은 우유 빛깔인데 끝으로 가면서 초록빛이 납니다. 꽃봉오리도 귀엽습니다. 아기가 뽀뽀하면서 입을 내밀 때처럼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가 "뽁" 소리를 내는 듯 살짝 벌리면서 피어납니다.

날렵한 잎사귀 아래 둥굴레꽃이 올망졸망 달렸습니다. 뿌리를 달여 차로 마시는 그 둥굴레입니다.
 날렵한 잎사귀 아래 둥굴레꽃이 올망졸망 달렸습니다. 뿌리를 달여 차로 마시는 그 둥굴레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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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굴레가 우리에게 친숙한 건 둥굴레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땅속으로 뻗어 가는 뿌리(사실은 땅속줄기)를 캐내어 말리고 가루 내서 티백에 담습니다. 구수한 숭늉 맛이 나는 둥굴레차는 우리에게 참 친근합니다. 도톰한 땅속줄기는 전분이 많고 영양가도 제법 있어서 옛날에 흉년이 들 때는 구휼식량으로 캐서 먹기도 했다 합니다. 이래저래 예쁘고 고마운 놈입니다.

취나물에 취하는 계절

아주머니 한 분이 앞서 가면서 뭔가를 부지런히 꺾어서는 비닐봉지에 담습니다.

"어머~ 여기도 있네. 어머머~ 여기 또 있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이 난 상태를 넘어 몹시 흥분하고 있습니다. 걸음은 또 얼마나 빠른지 나물을 꺾으면서 가는데도 제가 따라가기에 버거울 정도입니다.

길가에 취나물이 지천인가 봅니다. 앞서 가는 분이 취를 꺾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길가에 취나물이 지천인가 봅니다. 앞서 가는 분이 취를 꺾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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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꺾으시는 거예요?"
"취요, 취~"

그러면서 비닐봉지에 코를 댑니다.

"어마나~ 냄새 좋아라."

흐뭇하다 못해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궁금해 저도 코를 들이밀어 봅니다. 그런데 그냥 풀 냄새밖에 나지 않습니다. 나물도 아는 만큼 보이고, 맡아 본 만큼 냄새도 느끼나 봅니다.

"오늘 본전 뽑았어요."

이분 집 내일 식탁에는 데쳐서 기름에 볶은 자연산 취나물이 올라올 것입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갈까

오늘 종주하는 구간에는 이름 석 자 내세우는 산이 세 개 있습니다. 구름이 머문다는 운주산, 봉황을 닮은 봉좌산, 회재 이언적 선생이 이름을 지은 도덕산입니다. 그런데 이들 산은 정확히 낙동정맥 마루금상에 있지 않고 짧게는 200m, 길게는 600m 떨어져 있습니다. 굳이 원칙을 내세우며 마루금만 밟으면서 가겠다는 분들도 있겠지만, 너무 원칙에 얽매이면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는 법입니다. 당연히 올라가야 합니다.

전망대에 서서 봉황을 닮았다는 봉좌산 정상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봐도 봉황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이 각도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망대에 서서 봉황을 닮았다는 봉좌산 정상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봐도 봉황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이 각도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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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끝에 달린 감을 따듯이 곁가지로 뻗어나간 산줄기에 있는 세 개 산을 차례차례 올라갑니다. 산이 곁가지에 있으니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 거리가 결코 짧지 않고 장거리 산행으로 지친 다리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산 세 개에 다 오른 뒤에는 힘들어서 한두 개씩 산을 그냥 지나친 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종착지 오룡고개로 내려옵니다. 마음은 한결 뿌듯하고 대견합니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영천에서 서울로 오는 길은 멉니다. 옆자리에 앉은 분과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눕니다. 이분은 이 산악회에 오랫동안 나온 분이라 회원과 산악회, 그리고 대장님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전해줍니다. 저도 나름대로 궁금한 점에 대해, 그리고 느낀 점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렇게 얘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 그분이 슬쩍 묻습니다.

"근데… 몇 살이세요?"
"……."

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합니다.

"나이 얘기 하지 않으려구요."

순간, 얘기가 끊기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나이를 물은 사람도 불안하고, 대답하지 않은 저 역시 불안합니다. 그분은 기분이 살짝 상한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도덕산에 올랐습니다. 조선 중기 무렵의 문신 이언적 선생이 붙여 준 이름이라 합니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도덕산에 올랐습니다. 조선 중기 무렵의 문신 이언적 선생이 붙여 준 이름이라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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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상관없이 최선을

이제 상대의 나이에 관계없이 상대방을 최고의 인격체로 배려하는 연습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나이가 아니라 제가 갖고 있는 인품, 딱 그만큼만 대우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나이만 먹어 가면서 더 많은 존중과 존경과 대우를 받으려고 기대할 게 아니라 제 자신을 더욱 단련시켜 나가야겠지요.

나이 불문하고 당신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나이 가지고 으스대지 않으려 합니다.


태그:#낙동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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