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뚜뚜 땡~ 전두환 대통령께서 오늘은...' 하루하루가 살맛이 나질 않았어요. 저녁 9시가 되면 언제나 같은 멘트로 뉴스를 시작했거든요."

보도지침은 성역이었어요. 기자는 시키는 말만 반복하는 앵무새였고요. 방송국 안엔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어요. 윗 사람들은 알아서 정권에 비위 맞추느라 정신도 없어 보이더라고요. 독재 권력 앞에서 기자들은 어떠한 저항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어요.

▲ 1987년 9월 20일 언론의 왜곡 보도와 노동자 폭력 탄압을 규탄하기 위해 집회장에 모인 인천 시민들 ▲ 1987년 9월 27일 구로동 성당에서 개최된 '여성노동자 전진대회'

"신동아" 10월호 "이후락 증언" 기사와 관련, 동아일보사 출판국원 전원은 연 4일째 계속되는 정부 당국의 부당한 제작 탄압에 항의하여 9월 22일 오후 9시 4차 기자총회를 열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정부 당국은 외교상의 문제점을 들어 기사의 대폭적인 삭제를 요구하는 등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의 인쇄소 강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987년 9월 23일 "신동아 제작 탄압에 대한 3차 결의문", 신동아 출판국 기자 일동

하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어요. 우리를 어용 기자라고 부르고, 회사를 관제 언론사라고 손가락질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어요. 사람들이 분노를 쌓아 갈 때 우리는 자괴감과 절망감만 쌓고 있었어요. 그래서 '언론민주화'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두 가지 감정이 함께 찾아왔어요. 무섭지만 기쁘고, 기쁘지만 무서운 감정 말이에요.

머리띠를 처음 묶을땐 많이 낯설고 어색했어요.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사람들이 우리 편이 되어줄까". 하지만 더 이상 비굴하게 살고 싶지가 않았어요. 용기를 내어 하늘을 향해 주먹을 힘껏 찔러봤어요. 이제 저는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언론 노동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다시는 비겁해지지 않을 거에요.

▲ 1987년 9월 23일 "신동아 제작 탄압에 대한 3차 결의문", 신동아 출판국 기자 일동

요즘 방송의 뉴스 프로는 6.29선언 이전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새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방송심의지 최근호에 따르면 KBS 제1, 제2 TV와 MBC TV 세 채널에서 6.29선언 이후 2개월 간 방영한 시국토론 프로가 자그마치 33개나 되는데 토론 주제도 '개헌', '노사문제'와 기타 시국 일반 등 정치적 쟁점을 주로 다룬 것으로 되어있다. 연사의 선정이나 사회자의 자세도 공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1987년 9월 30일 "자율적 방송의 당면 과제",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