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은 대한민국의 아우슈비츠였어요. 여기에 잡혀 온 다음부터 내가 본 것은 딱 하나예요. 아수라가 지배하는 아비규환의 생지옥."

여기가 처음 생긴 건 1975년이래요. 그러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부가 대대적으로 부랑아 단속을 하면서 수용인원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자비하게 잡혀 왔대요. 밤늦게 귀가하던 회사원에서부터 바람 쐬러 나왔던 여성까지.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잡아 왔다고 하더라고요.

▲ 1987년 조회를 끝내고 청소를 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 1987년 3월 14일 명동 입구에서 총을 들고 시민을 검문 중인 경찰들

면담한 대부분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 입소되었으며, 이는 도시 미관을 위한다는 행정적 독단과 범죄예방이라는 미명 하에 감옥의 대용으로 편의적으로 악용되었음이 조사 결과 나타났다. 특히 경찰의 경우 단속 기간 내지 특별 단속 기간 시 연고자가 있는 만취자, 껌팔이, 구두닦이 등 생활 능력자를 수용하는 등 강제 수용절차를 임의로 자행,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신체 자유를 구속했다.
- 경찰 내부 근무 평점 : 구류자 2-3점, 형제원 입소 5점
- '86년 전체 수용자 3,975명, 수용 의뢰 기관 - 경찰 : 3,117명, 구청 : 258명
1987년 "전국 복지원 실태 특별조사 중간보고"

우리는 짐승 취급을 받았어요. 가격이 매겨진 동물처럼,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가축처럼 말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꽁보리밥에 소금 뿌린 깍두기와 썩은 전어 젓이 전부였어요. 우리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새벽부터 군가를 부르며 구보까지 해야 했어요. 그리고 나선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 했죠. 차라리 죄수들이 수용된 교도소가 여기보단 나을 거예요.

왜 우리가 매일 맞아야 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많은 원생들이 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살해당했지요. 12년 동안 5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죽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암매장당하거나 해부용으로 팔려 나갔대요. 내가 살아남은 건 정말 천운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아직도 매일 밤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다시는 그런 데로 끌려가고 싶지 않아요. 전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 1987년 3월 3일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가두시위에 참가한 학생을 강제로 연행하는 경찰

일명 근신소대라고 불리우는 특수 내무반(제7, 13소대)이 있는데, 여기에 수용되면 40kg 이상의 모래 주머니를 지고 다 떨어진 군복(일명 똥복)을 입은 채 구보를 돌고, 돌깨기, 축조작업, 철근작업 등 중노동을 시키는 것이 확인됨. 재소자들은 제7, 13소대를 일명 '아오지 탄광'으로 불렀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부상 또는 사망했다고 증언함.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사건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제1차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