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경찰 해 먹기 힘든 때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시위 진압에 동원되진 않았지만 다른 경찰들의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어요."

교통정리하러 나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눈초리가 예전 같지가 않았어요. 오늘 퇴근 길에서 본 시민들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네요. 4.19 때 이곳이 시민들의 본거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저 앞에는 국회가 있었고, 시청 앞 광장 같이 넓은 곳엔 사람들이 모여들기 편했기 때문일 거예요.

▲ 1987년 6월 9일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 군이 7월 5일 끝내 사망했다. 7월 6일 대학생들이 태극기와 이한열 군 영정 사진을 앞세우고 추모 행진을 하는 모습. ▲ 1987년 7월 9일 '고 이한열 열사 노제'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광장의 모습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그의 젊은 넋이 앞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이한열 군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나라 지도층을 비롯한 우리 모두의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태를 야기시킨 데 대하여 그 책임의 소재가 철저히 규명되어야 하겠습니다.

1987년 7월 5일 "이한열 군의 죽음에 즈음하여", 연세대학교 총장

지난 6월 중순쯤이었던 것 같아요. 갑자기 몇몇 학생들이 교차로 안으로 뛰어들더라고요. 그들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시청 앞 광장을 순식간에 점령했고요. 어디에 있다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신기하더라고요. 최루탄이 그렇게 쏟아지는데도 말이에요. 그 사람들이 세상을 정말로 바꿔 버리더라고요.

어제는 이한열 학생의 노제가 이곳에서 있었어요. 아현동 방향에서 걸어 오는 사람들이 끝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많았더라고요. 이 넓은 광장에 사람들이 꽉 들어 찼는데도 남대문이랑 광화문 쪽까지 발 디딜 틈 하나 없었어요. 시청에 걸려 있던 태극기는 어느새 조기로 바뀌었고요. 이한열 학생을 그린 큰 그림과 운구차를 앞세운 시민들이 광장을 가로질러 을지로 방향으로 나아갔어요.

▲ 1987년 7월 9일 '고 이한열 열사 노제'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광장 주변으로 모여 든 시민 학생들이 도로 위에서 집회를 하는 모습

지난 6월 9일 노골화되는 현 군부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의도를 분쇄하고 4천만 민중의 민주화 의지를 외면한 채 나온 4.13 호헌 망발의 실질적 분쇄를 위하여 쏟아지는 최루탄 직격 발사 속에서 온 청춘을 다 바쳐 투쟁하다 쓰러진 이한열의 죽음을 맞으며, 더 말할 수 없는 통한과 분노의 감정으로 군부독재의 즉각적 퇴진과 완전한 종식을 주장한다.
1987년 7월 5일 "애국 학생 고 이한열 열사 추모기간을 선포하며",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 협의회, 부산지역 총학생회협의회, 호남지역 학생연합 건설준비위원회, 장기집권 저지 및 호헌책동 수원지구 학생공동 대책위원회, 경기지역 인하대총학생회, 강원지역 한림대, 원주 (연세대)총학생회, 중부지역 충북대총학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