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대한 배를 만드는 조선소 노동자예요. 배를 만드는 노동은 보람찬 일이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죠."

작은 철판 하나가 머리 위로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우리 공장은 유난히 엄해요. 모든 게 군대식이죠. 출근길 정문에선 복장과 두발 검사를 받아야만 해요. 모든 게 명령식이고, 말보다는 쪼인트가 앞서곤 하죠. 회사가 주는 점심밥에는 쥐똥이 까만 콩처럼 섞여있을 때도 있었어요. 우리는 인간이 아닌가 봐요. 기계보다 못한 공돌이니까요.

▲ 1987년 8월 24일 영정과 만장을 앞세우고 장승포 대우조선소의 영결식장으로 향하는 '고 이석규 노동자 장례' 행렬 ▲ 1987년 8월 24일 '고 이석규 열사 민주국민장 영결식'에 모인 동료 노동자들

8/22 14:00 경 옥포호텔 앞에서 농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우조선 근로자 5-6백 명이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하겠으니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하자 일단 길을 터주어 100미터 전진. 다시 대치하자 경찰 측 대표가 주위의 돌을 모두 치우고 오리걸음으로 전진하면 길을 터주겠다고 하여 600여 명의 대우노동자들이 오리걸음으로 전진하는 순간 3면에서 포위 공격 무차별 최루탄 난사(직격탄 발사). 이때 이석규 열사가 직격탄을 맞아(가슴에) 17:00 경 대우병원에서 절명.
1987년 8월 "대우 옥포조선소 소요사건 경과"

우리가 노조를 만들기로 한 첫 번째 이유는 인간 대접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노조 설립신고서 접수조차 쉽지 않더라고요. 회사와 협상은 더 어려웠어요. 경찰은 언제나 회사 편만 들어줬고요. 툭하면 노동자만 구속됐어요. 큰죄를 진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6월항쟁으로 민주주의가 다 된 줄 알았는데,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왕회장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최루탄이 날아들었어요. 그 와중에 이제 겨우 스물두 살 된 동생 한 명이 최루탄을 가슴에 정통으로 맞았고요. 억척스레 일만 하던 착하고 여린 녀석이 내 눈 앞에서 쓰러졌어요. 두 달 전엔 대학생을 그렇게 죽이더니 이젠 우리 동생을 죽였네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부산에서 다녀 간 변호사가 구속됐데요. '제3자 개입 금지' 조항 위반이래요. 노동자를 도와주면 불법인 게 우리나라 법이라네요.

▲ 1987년 8월 24일 "민주노동자를 살해한 현 정권은 스스토 퇴진하여야 한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도대체 이 정권은 앞으로 얼마나 더 무고한 백성을 죽일 작정인가? 최루탄을 쏘아 한 젊은이를 죽인지가 며칠이나 지났다고 조금의 돌이킴도 없이 또다시 노동자의 가슴에 마구 직격탄을 쏘았단 말인가? 이 정권에 대해 한 가닥의 양심을 기대했던 우리는, 아니, 되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어 악을 선으로 대하려 했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절감하게 되며 인간적 비애마저 느낀다.
1987년 8월 24일 "민주노동자를 살해한 현정권은 스스로 퇴진하여야 한다", 민주헌법쟁위 국민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