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 주인공들은 여성이자 흑인이었기 때문에 이중적인 차별을 받았다.

여성인 주인공들은 여성이자 흑인이었기 때문에 이중적인 차별을 받았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지워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났다.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지만 기록되지 못하고 없는 것처럼 간주하는 여성의 서사를 발굴해 내는 작업은 영화에서도 활발하다. 백인-이성애자-남성으로 대표되는 존재들이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작품들은 나의 편견 역시 한 꺼풀 벗기게 해준다.

<히든 피겨스> 역시 그런 영화다. 우리는 달에 성조기를 꼽은 사람도 남자, NASA에서 일하면서 이 과정을 도운 연구원들도 남자, 죄다 남자들이 해놓은 업적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거의 세뇌 당하다시피 배워왔다. 하지만 우주에 사람을 보내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정교한 수학적 계산이 필요하고, 여기에 중요한 건 성별이 아니라 얼마나 수학을 잘하느냐 뿐이다. 영화는 역사 속에서 지워진 '수학 천재' 여성들의 활약에 주목한다.

교차하는 정체성 그리고 착시효과

 차별과 싸워 승리한것 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이면의 그들의 천재성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차별과 싸워 승리한것 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이면의 그들의 천재성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에서 주인공 여성들이 차별받는 이유는 두 가지다. 흑인이고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장면들을 상기해보자. 캐서린 (타라지 헨슨 분)은 콜로넬 대령 (마허샬라 알리 분)으로부터 만남 초기에 천부적인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NASA에서 일한다는 점을 조롱당했다. 여성이 무슨 수학을 하며 무슨 NASA에서 일하냐는 맥락에서였다. 콜로넬 대령도 캐서린처럼 차별받는 흑인이건만, 캐서린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중적으로 차별받아야 했다.

정체성에 또 다른 정체성의 교차. 특히 페미니즘에서 강조되곤 하는데 한 개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이 다양해진다는 관점이다. <히든 피겨스>는 '정체성의 교차됨'이 구조적 차별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투쟁의 강도는 높아지고 전략은 복잡해질 것이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주인공들은 젠더와 인종에 대한 복잡한 차별과 싸워 '승리'했다. 인종 별 화장실 구분을 없앨 수 있었고, 남성만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물음을 할 수밖에 없다. 원래 이렇게 싸우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걸까? 그들이 차별을 극복할 수 있었던 다른 변수는 없었나? 우리는 알다시피 주인공들이 천재적인 수학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천재적 능력과 끊임없는 투쟁 중에 어떤 것이 좀 더 유효한 변수로 작용했는가?

"너무 매끄럽고 기분 좋은 나머지, 차별과의 싸움이 쉬워 보이는 착시현상도."- 김혜리 <씨네21> 기자

사실 어떤 것이 더 유효한 변수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히든 피겨스>에서 나타난 주인공들의 성취는 '유능한 소수자 개인'이 이루어낸 것인지 '구조적 차별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시작된 문제 해결'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김혜리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천재적 개인의 성취가 큰 비중을 차지한 탓에 (현실의) '차별과의 싸움도 이것처럼 쉬워 보이게 하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영화 속 차별받는 개인이 천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오는 딜레마에 가깝다. 이는 잘못하면 이 영화의 내용을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로 오독할 수 있게 한다. 그런 결론에는 교차하는 정체성에 대한 성찰도 빠져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가지고 섣불리 '유리천장이 깨졌다'라고 해석하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받는 차별이 해소된다는 것은 여성이 '노오력'을 해서 어떻게든 높은 자리, 더 좋은 평가를 받는 데에 있지 않고 제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불가피하게 강조되는 것은 '천재적 개인'과 '그 개인이 받는 차별을 조금 덜어준 상사'이다. 과연 이것은 고무적인 현상으로만 볼 수 있는가.

'유리천장이 깨졌다'라는 너무 쉽고 무책임한 말

취임사하는 피우진 신임 보훈처장 18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피우진 신임 처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 취임사하는 피우진 신임 보훈처장 18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피우진 신임 처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현실로 돌아오면 이런 시도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지닌 위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나아졌고,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여성들의 수도 늘어났다. 하지만 이것을 모두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을까?

새 정부의 파격적인 인사를 보도하는 언론에서도 <히든 피겨스>가 오독되는 방식과 유사한 형태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피우진 예비역 중령이 보훈처장에 임명되고, 강경화 유엔 특별 보좌관이 외교부 장관에 내정되자 언론들이 일제히 '여성 최초', '유리천장' 등의 표현을 앞세워 보도하고 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임명된 것은 대통령의 의지가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고, 그 자리까지 오기까지 평범한 여성이라면 갈 수 없는 길을 그들의 능력을 통해 성취해 왔다. 피우진 처장만 보아도, 성차별 극심한 여군 생활을 기어이 버틴 것을 보편적인 차별 해소의 경험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

이런 전후 맥락이 논의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 자리에 여성 최초로 오를 수 있었던 것 자체는 기쁜 일이지만, 그것이 차별이 극복된 사례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지, 유리천장이 깨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차별 해소를 위한 제도적, 구조적 해법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교차하는 정체성과 개인의 성취라는 측면을 무시하지 않고서 <히든 피겨스>라는 텍스트에 접근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히든피겨스 유리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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