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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선감 선착장에서 열린 혼 맞이 굿
 선감 선착장에서 열린 혼 맞이 굿
ⓒ 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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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묘역, 어린 넋을 위로하는 춤꾼
 선감묘역, 어린 넋을 위로하는 춤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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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이 강제 수용소 선감학원에 끌려온 이유는 저마다 조금씩 달랐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보육원(고아원)에서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끌려온 이도 있고, 고아가 아닌데도 부랑아 취급을 받아 끌려온 이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옷차림이 남루했다는 것 정도다.

소년들은 고립무원인 섬에 갇혀 강제노동과 폭력, 굶주림에 시달렸다. 죽을 만치 힘들었지만 벗어날 길은 없었다. 그곳을 벗어나는 길은 도망치는 것뿐인데, 그러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서다.

소년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이를 악물고 헤엄치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높은 파도를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숱하게 죽었다. 파도에 휩쓸려 죽었고, 헤엄치다 기운이 빠져 죽었다. 시신이라도 섬으로 떠내려 왔으면 다행이다. 정말 운이 좋은 영혼이다. 땅에 묻힐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먼 바다로 떠내려간 시신들, 그 안에 깃든 영혼은 지금도 바다를 헤매고 있다.

이렇듯, 선감학원에서 죽은 이들은 대체로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병에 걸려 죽은 이도 많다. 간혹 맞아 죽은 이도 있다고 하니 선감학원 환경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선감학원이 설립된 1942년에서 묻을 닫은 1982년까지 4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소년이 죽었는지,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곳은 무덤뿐이다. 기억하는 이는 그들과 함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던 생존자들뿐이다.

바다에서 건진 어린 넋, 넋전에 얹혀 묘역으로

죽은 자의 넋을 받은 넋전이 무덤에 꽂혀 있다.
 죽은 자의 넋을 받은 넋전이 무덤에 꽂혀 있다.
ⓒ 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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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묘역, 제사
 선감묘역,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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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선감학원의 비극을 기억하는 생존자와 선감학원의 비극을 역사로 남기려는 이들이 지난 27일 옛 선감학원 터인 '경기 창작센터' 인근에서 어린 넋을 달래는 행사를 열었다. '2017 선감학원 추모 문화제'다.

선감학원 생존자 30여 명과 20여 년간 선감학원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한 정진각 안산지역사회연구소 소장, <아! 선감도>라는 소설로 일제 강점기 선감도의 비극을 알린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츠씨, 안산 지역 정치인(시·도의원) 등이 위령제에 참여해 어린 넋들을 위로했다.

추모 문화제는 배를 타고 온 소년들이 첫발을 내딛던 '선감 나루터'에서 시작됐다. 소복 차림을 한 이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장구를 치고 춤을 추었다. 넋을 불러오는 '혼 맞이 굿'이다. 바다에서 넋을 건져 올린 굿 행렬은 소년들이 선감학원까지 걸어서 간 길인 '선감 이야기 길'을 걸었다.

선감 이야기 길의 끝은 어린 넋들이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 '선감묘역'이다. 그 곳에서 위령제가 열렸다. 묘소마다 죽은 자의 넋을 받은 종이 인형인 넋전이 꽂혔다. 이어 비참한 생을 처참하게 마감한 어린 넋을 위로하는 '위령 무'가 펼쳐졌다.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생존자들이 한때 동료였던, 어쩌면 같은 방 안에서 동고동락했을 어린 넋들에 술을 올리며 위령제가 막을 내렸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서 그런 것일까? 무덤은 초라했다. 봉분이라 하기에는 낯 부끄러운 얕은 무덤들이 그곳이 선감묘역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묻힌 자가 누구인지, 얼마나 묻혔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묘비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소년들이 묻힐 때, 장례식 같은 것은 없었다. 거적에 둘둘 말아 파묻은 게 장례식의 전부였다고 한다. 

선감학원에서 죽은 아이 300명 넘어

김춘근씨, 1961년~1982년까지 선감학원에 있었던 선감도의 비극 산 증인
 김춘근씨, 1961년~1982년까지 선감학원에 있었던 선감도의 비극 산 증인
ⓒ 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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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은 대부분 고통스러운 기억만을 머리에 담고 있었다. 스님이 된 곽은수(혜법스님)씨는 부모가 있는데도 공무원들한테 납치되다시피 끌려와 선감학원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혜법 스님은 지금도 어린 시절 헤어진 가족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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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사는 한일영씨 또한 부모가 멀쩡하게 있는데 강제로 끌려왔다. 가까스로 탈출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났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이미 어긋나 있었다. 나이가 많아 다시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고, 배움이 짧아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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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한테 버림받아 보육원(고아원)을 전전하다 끌려온 이들의 삶은 더 비참했다.

일흔 살 김춘근씨는 전쟁고아다. 1961년에 선감학원에 끌려와 선감학원이 문을 닫은 1982년까지 있었으니 살아 있는 증인이라 할만하다. 어쩌면 그에게는 선감학원이 고향 같은 곳일 수도 있다. 선감학원에서 자라 성인이 되어서는 관리자로 일했고, 결혼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에도 행복한 기억은 거의 없다. 끌려오면서 무서웠던 기억, 곡괭이 자루로 맞은 기억, 배고팠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도망치다 죽은 후배들을 묻어준 기억이 얹혀 있어 더 괴롭다. 그가 직접 묻어준 아이만 해도 7~8명이나 된다. 그는 일제 강점기부터 죽은 아이를 모두 헤아리면 300명이 넘을 것이라 증언한다.

선감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그는 세상에 내쳐졌다. 다른 원생과 마찬가지로 그도 직업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수원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동안 아이 둘을 남기고 아내가 그의 곁을 떠났다. 그 뒤 선감학원 출신들이 많이 사는 인천으로 건너와 페인트칠, 건물 방수 같은 육체노동을 해서 아이 둘을 키우는 고달픈 삶을 살았다. 지금은 월세방에서 혼자 살고 있다.

선감학원 거쳐 삼청교육대, 청송 감호소까지

선감학원 출신으로 삼청교육대를 거쳐 청송 감호소까지 가는 비극적인 삶을 이어온 김성곤씨
 선감학원 출신으로 삼청교육대를 거쳐 청송 감호소까지 가는 비극적인 삶을 이어온 김성곤씨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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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61세)씨는 7살 즈음 인천에 있는 보육원을 탈출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가 서울에 있는 보육원을 거쳐 10살 즈음에 선감학원에 끌려 왔다. 그를 기다린 것은 강제노역과 감당하기 힘든 폭력, 그리고 배고픔뿐이었다.

"정말 힘든 게 노동이었어요. 그 어린아이들한테 성인도 하기 힘든 하역 작업을 시켰어요. 배에서 연탄이나 40킬로나 되는 시멘트 부대 같은 것을 내리는 일이었는데, 그때 시멘트 부대를 진 채로 배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습니다. 그게 지금도 저를 괴롭힙니다."

수차례 도망을 쳤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실패해서 잡혀 올 때마다 죽도록 맞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한다며 발바닥도 사정없이 때렸다. 발바닥 부기가 빠지는데만도 몇 달이 걸렸다. 맞는 것도, 바다에 빠져 죽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탈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자유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는 도망치기 위해 수영을 미친 듯이 연습했다. 결국 중학교 3학년 정도 나이인 16살 즈음에 바다를 헤엄쳐 건너 선감학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노점상, 막노동 같은 험한 일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갖은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성격까지 강퍅해 수틀리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럴수록 인생은 더 꼬이기만 했다.

"삼청 교육대도 갔다 왔고, 교도소에서도 정말 오래 있었어요. 장기수만 수용하는 청송 보호소까지... 60년 인생 중 절반가량인 30여 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거죠. 지금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고 있어요."

건빵 한 봉지 훔쳐 먹었다고 퇴학, 고아라고 너무 막 해

선감학원 생존자 이대준씨, 당시 기거하던 숙소 위치 등을 설명하고 있다.
 선감학원 생존자 이대준씨, 당시 기거하던 숙소 위치 등을 설명하고 있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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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준(60세)씨도 고아였다. 수원 보육원에 있다가 열 살 즈음인 1966년경에 선감학원으로 끌려왔다. 그는 선감학원에 도착하자마자 열일곱여덟 살 정도 된 사장(숙소의 장)한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일을 당하면서도 그는 그게 성폭행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생살이 찢기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소리치면 죽여 버린다'는 말이 무서워 신음도 내지 못했다.

그게 성폭행이란 사실을 알려준 이는 선감학원 교사다.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소년 김대근을 발견한 교사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사실대로 말하자 '그게 성폭행'이라고 알려줘 그때야 자신이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행히 그 교사가 다른 숙소로 옮겨주어서 그 뒤로는 폭행을 당하지 않았다.

참으로 억울한 것은 당시 학교(선감도 내 선감국민학교. 수용자 일부를 국민학교에 보냈다)에서 급식으로 나오던 건빵 한 봉지 훔쳐 먹고 퇴학을 당한 일이다. 5학년 때였다. 지금 생각해도 고아라고 너무 막 한 것이다. 부모가 있었다면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뒤로는 막노동이 그의 일과였다. 그래도 학교에 다닐 때는 일을 덜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건빵은,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훔쳐 먹은 것이다. 반찬이랍시고 나오는 게 호박, 젓갈 같은 것이었는데, 호박은 익지 않은 채로 나와 못 먹었고 젓갈에서는 구더기가 나와서 먹을 수 없었다. 국에서 쥐머리하고 꼬리가 나온 적도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호박과 젓갈을 먹지 않는다.

하루라도 매를 맞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 자유가 그리워 수도 없이 도망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수도 없이 많은 매를 맞았다.

이대준씨는 19살이 돼서야 탈출해 선감학원 출신이 많은 인천에 왔지만 먹고 살 길은 막막했다. 깡통 들고 밥 얻으러 다니기도 했고 구두닦이도 했지만, 한 번 달라붙은 가난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운 좋게 결혼을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지금은 버스 운전을 하면서 월세방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태그:#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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