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진앙지였던 경주시 내남면에는 기왓장이 흘러내린 가옥 등 피해현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진앙지였던 경주시 내남면에는 기왓장이 흘러내린 가옥 등 피해현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 임형준

관련사진보기


2016년 9월 12일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 일대를 뒤흔든 지진은 한반도가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을 경고했다. 그 후에도 작은 지진이 600여 차례나 계속돼 경주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흔들리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반년이 훌쩍 지난 올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지역농업문제세미나' 수강생들이 경주를 찾아갔다.

피해가 컸던 경주시 내남면은 인적이 드물고 간혹 눈에 띄는 주민들은 묻는 말에 잘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복구하지 못한 지진의 흔적들이 이곳이 진앙지었음을 말해주었다. 기왓장이 흘러내리거나 벽이 갈라진 채 방치된 집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경주 시내는 피해현장이 거의 복구됐지만 약한 여진이 계속돼 시민들의 속마음은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KTX가 들어오는 소리와 울림에도 불안을 느끼거나 자동차가 과속방지턱을 지나갈 때 덜컹거리는 소리에도 놀라는 등 일상에서 트라우마를 계속 경험한다고 한다.

불안감이 안개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지만, 경주가 비교적 일찍 생동감을 되찾은 데는 '천년 고도 서라벌(경주의 옛 이름)'에 살고 있다는 시민들의 자부심이 크게 작용했다. 천년을 버틴 첨성대 등 수많은 유적이 곳곳에 우뚝 서서 시민들의 마음을 다잡아주고 있는 듯했다.

임희숙(59) 문화재해설사는 "경주 시민들은 그 정도 크기의 지진이 닥쳤는데도 문화재부터 일반 집까지 이렇게 피해가 크지 않은 걸 보면서 오히려 경주가 지진에 튼튼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주 사람들은 '서라벌'을 정말 사랑한다. 오릉을 안내한 김진대(50) 신라문화원 실장은 "항상 출퇴근하면서 느끼지만 바로 옆에 이렇게 탁 트인 공원이 있는 게 영국 왕궁보다 더 전망이 좋다"라고 평했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이처럼 넓은 정원을, 그것도 문화유산으로 가득 찬 도심지역을 찾기는 어렵다. 여전히 '흔들리는 땅' 위에 사는 게 약간 불안하긴 하나 이런 문화유산들을 일상 속에서 즐기는 것은 불안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 같다.

규모 5.8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첨성대의 '비밀'

첨성대는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몸체에서 옆으로 툭 튀어나온 비녀돌과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맨 위 정자석이 첨성대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첨성대는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몸체에서 옆으로 툭 튀어나온 비녀돌과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맨 위 정자석이 첨성대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 윤연정

관련사진보기


경주 첨성대가 규모 5.8이나 되는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선조들의 지혜로운 건축방식에 있다. 첨성대의 중심을 잡아주는 비녀돌과 '우물 정'(井) 자처럼 보이는 정자석 등에 그 비밀이 있다.

툭 튀어나온 비녀돌은 탑이 무너지지 않게 꽉 잡아주는 구실을 한다. 맨 위에 있는 정자석은 아래에서 보면 그냥 위에 걸쳐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올라가서 보면 4개의 돌이 양쪽으로 물리도록 어긋나게 걸쳐놓아서 태풍이 와도 날아가지 않게 설계됐다.

사람들은 대개 첨성대 안이 비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안은 돌·모래·자갈 등으로 다져져 있다. 이러한 설계를 '판축'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내진설계에 해당한다.

임희숙 문화재해설사는 규모 5.8 지진에도 피해가 심하지 않았던 것은 첨성대처럼 견고하게 지어진 건축물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임희숙 문화재해설사는 규모 5.8 지진에도 피해가 심하지 않았던 것은 첨성대처럼 견고하게 지어진 건축물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윤연정

관련사진보기


임희숙 해설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첨성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이가 많았다"며 "김영삼 전 대통령도 중학생 시절 수학여행 때 첨성대에 올라가 찍은 사진이 있다"고 말했다.

신라시대 지진 피해 기록은 <삼국사기>에 혜공왕(765-780) 때부터 나타난다. 법흥왕(514-540) 때 만들어진 불국사, 선덕여왕(632-647) 때 세워진 첨성대, 경덕왕(742-765) 때 만들어진 석굴암 모두 일찍이 지진 피해를 경험한 고구려에서 전수한 그렝이 공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진을 잘 견뎠다.

그렝이 공법은 자연석의 굴곡 부분을 그대로 살려 가공하고 그 위에 얹는 돌을 자연석에 맞는 형태로 깎아 완벽하게 접합시킨다. 석축이나 기둥이 흔들리거나 밀리지 않게 되는 게 장점이다.

천 년 전에도 규모 6.7 지진이 닥쳤는데, 이번 피해 상황으로 유추해보면 첨성대는 과거에도 잘 견뎌낸 것으로 추정된다. 첨성대를 비롯한 경주에 있는 많은 문화재 등은 앞으로 지속할지 모르는 경주의 지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려주는 선조들의 '예지'가 아닐까?

삼국이 협업해 만든 동궁과 월지

경주 월지에는 동궁이 두 개로 보인다. 월지에 비친 동궁이 데칼코마니처럼 빛난다. 원래 단청 대신 금동으로 만든 마구리로 지붕을 씌워 더 화려했다고 한다.
 경주 월지에는 동궁이 두 개로 보인다. 월지에 비친 동궁이 데칼코마니처럼 빛난다. 원래 단청 대신 금동으로 만든 마구리로 지붕을 씌워 더 화려했다고 한다.
ⓒ 윤연정

관련사진보기


"아침에 나올 때면, 파란 하늘도 무료, 삼릉숲도 무료, 상쾌한 공기도 무료구나 하면서 나오거든요. 목련꽃도 다 무료잖아요. 양광모 시인의 '무료'라는 시를 알고 나서 경주가 더 좋아졌어요."

임 해설사는 동궁과 월지에서 오전뿐 아니라 야간근무를 하면서 매일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과학적이고 지혜로운 건축 설계와 환경 조성을 한 선조들의 양식에 매번 놀란다고 말했다.

동궁과 월지는 2011년까지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다. 안압지는 조선시대에 붙여진 이름인데, 1486년 성종실록에 처음 나온다. 신라가 멸망하고 나서 기러기하고 오리만 월지에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기러기 안'(雁) '오리 압'(鴨) '못 지'(池) 자를 따서 명명했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신라·백제·고구려인들은 다 함께 연못과 궁궐을 만들었다. 임금이 사는 궁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궁이라 하고, 달의 연못이라고 해서 월지(月池)라 불렀다. 동궁은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영빈관 구실을 했고, 태자가 사는 곳이기도 했다.

연못 전체를 보면 동북쪽은 굴곡지고, 서남쪽은 직선과 직각인 것을 볼 수 있다. 직선과 직각은 고구려 장인의 솜씨이고 동북쪽의 구불구불한 건 백제 장인의 솜씨다. 통일 이후 삼국이 다 같이 협력해 만든 정원인 만큼 그 의미도 뜻깊다.

월지에는 섬이 셋 있다. 중국에는 신선들이 사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 있는데, 거기서 이름을 따 봉래도 방장도 영주도란 이름을 붙였다.
 월지에는 섬이 셋 있다. 중국에는 신선들이 사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 있는데, 거기서 이름을 따 봉래도 방장도 영주도란 이름을 붙였다.
ⓒ 윤연정

관련사진보기


월지는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을 초대한 곳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경순왕이 '임해전지'(臨海殿址)에서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임해전'은 바다에 임한 건물이다. 월지를 왜 바다라고 했을까? 이 연못은 건물 어디서 보든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바다를 연상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신라가 멸망하고 오랫동안 폐허였는데, 지금까지 신라시대 수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아주 과학적으로 잘 만들어 놓았다. 당시 신라인들이 물을 얼마나 깨끗하게 관리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비가 오면 낙숫물 등이 수로에 고이게 되는데, 흙이나 낙엽 같은 건 걸러내고 물이 침전되어 맑은 물만 흐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수로를 직각으로 세 번 꺾어 만든 것도 정화를 돕는다. 연못 바닥에는 50cm 두께로 진흙을 발라 물이 새지 않고 잡풀이 나지 않게 해놓았다.

작은 땅에서 많지 않은 자원으로도 최상의 것을 만들고자 했던 신라인들. 다양성을 존중하며 '대연정'을 이뤘던 신라인들. 그들은 문화유산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던진다.

'신라의 달밤'에 향을 불어넣는 전통주

"단양주는 아주 독한데 우리 거는 약간 달콤해서 술을 못 잡숫는 양반도 드실 수 있어요."

경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기 위해 35년간 집안에서 술을 빚으며 살아온 김진희(63)·이영욱(59)씨 집을 방문했다. 아래채 방안에 들어서자 술 익는 냄새가 알싸하게 코를 자극했다. 방바닥에는 열댓 명도 넉넉히 먹을 밥을 담은 큰 양푼이 놓여있었다. 쌀을 네 시간 이상 불린 다음 찐 밥으로, 술을 빚기 위해 1차 발효된 고두밥이다.

"이건 효몬데, 보통 가정집에선 이스트를 넣거든요. 저는 술맛을 더 좋게 하려고 빵집에서 쓰는 효모를 써요."

아내 이영욱씨가 공개한 '비법'이다. 큰 양푼에 효모와 술 발효제인 누룩을 2.4kg 정도 부었다. 이스트를 쓰면 맛이 강하지만, 효모를 넣으면 맛도 좋고 술 만들 때 실패할 확률이 낮다. 쌀 한 되 당 물 1.8ℓ를 부은 다음 27~28℃의 따뜻한 방에 열이틀 정도 놓아두면 작품이 탄생한다. 빚은 술은 보통 제례용 술로 쓰고 손님상에도 올린다. 이영욱씨가 만든 전통주는 '신라 전래음식 경연대회'에서 금상을 받았을 만큼 맛이 좋다.

경주에는 전통주 전문업체 '교동법주'가 있는데 비법을 아무에게도 안 가르쳐준다. 이씨는 자신이 빚은 전통주를 판매하지 않지만 마셔본 이들이 '교동법주보다 더 감칠맛이 난다'는 얘기를 한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날 저녁상에도 술이 올라왔는데 한 독에서 나온 두 가지 술이었다. 위쪽에서 떠낸 맑은 술이 청주, 아래쪽에서 떠낸 탁한 술이 탁주, 곧 막걸리다. 옅은 노란빛을 띠는 청주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달콤했다. 막걸리는 막 짜낸 양젖처럼 흰데 탁주(濁酒)라는 이름과 달리 넘기기가 부드러웠다.

전통을 지키며 현재를 살아가는 경주 시민

술잔이 몇 순배 오가자 남편 김진희(63)씨는 김씨 집안의 제사 '춘향대제'(春享大祭) 이야기를 꺼냈다. 춘향대제는 이른 봄 종묘와 사직에 지내는 큰 제사를 뜻한다. 숭혜전(崇惠殿)은 미추왕부터 경순왕까지 경주김씨 왕을 모신 사당이다. 숭혜전에서 제를 지낼 때는 3천 명가량이 운집한다.

경주에서는 공자 제사도 지낸다. 경주 향교 대성전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 제수에 익힌 음식을 쓰지 않고 날 것을 쓰는 것이다. 소고기와 미나리는 물론 염소와 돼지도 털을 벗긴 채 통째로 올리는 것이다. 김진희씨는 "오랫동안 전통으로 내려온 관습이기 때문에 끊지 못한다"며 제사상에 가죽이 벗겨진 벌건 염소와 돼지가 올라간 사진을 보여줬다.

전통 관습과 가치, 문화를 지켜가며 달라진 현대를 사는 건 쉽지 않다. 김진희씨는 "변화한 현실에 맞춰 적응해야 한다"며 "옛날 거 따라 하면 밥 못 먹는다"고 농을 던졌다.

다양한 시대의 층위를 켜켜이 간직한 경주에서 한 시대를 살아온 이의 고뇌일까? 천년 고도 경주가 현대인에게, 그리고 현대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잘살고 있는 걸까?'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청년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 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태그:#경주, #지진, #동궁과 월지, #신라인, #첨성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