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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의 의병장이 살았던 봉화 계서당. 계서는 그의 아들 성이성의 호이다. 성이성은 소설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성안의 의병장이 살았던 봉화 계서당. 계서는 그의 아들 성이성의 호이다. 성이성은 소설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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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월 11일자 『선조실록』에 당시 조선의 군대 규모와 주둔지가 수록되어 있다. 명나라 경략찬획(대략 작전참모) 원황이 물어온 데 대한 조선의 답변 내용이다. 기사에 따르면, 그 무렵 조선 팔도에는 장수와 병사 17만 2400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실록은  '적의 향방과 상황에 따라 움직이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며, 군사의 수효도 늘어나거나 나뉘기 때문에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면서 지명, 장수, 병사의 숫자를 아래와 같이 나열하고 있다.

경기도 강화부 / 전라도 절도사 최원 4,000, 경기도 순찰사 권징 400,  창의사 김천일 3,000, 의병장 우성전, 2,000
경기도 수원부 / 전라도 순찰사 권율 4,000
경기도 양주 / 방어사 고언백 2,000
경기도 양근군 / 순변사 이일 600
경기도 여주 / 경기도 순찰사 성영 3,000
경기도 안성군 / 조방장 홍계남 300
충청도 직산현 / 충청도 절도사 이옥 2,800
충청도 평택현 등  / 각 장수들이 각각 수백 명씩 도합 3,000, 각처에 의병장들이 각각 수백 명씩 도합 5,000
경상좌도 안동부 / 순찰사 한효순 10,000
경상좌도 울산군 / 절도사 박진 25,000
경상좌도 창녕현 / 의병장 성안의(成安義) 1,000
경상좌도 영산현 / 의병장 신갑 1,000
경상우도 진주 / 순찰사 김성일 15,000
경상우도 창원부 / 절도사 김시민 15,000
경상우도 합천군 / 의병장 정인홍 3,000
경상우도 의령현 / 의병장 곽재우 2,000
경상우도 거창현 / 의병장 김면 5,000
전라도 순천부 앞바다 / 좌수사 이순신 수군 5,000, 우수사 이억기 수군 10,000, 각처 분산 조비군(措備軍, 예비군) 10,000
함경도 함흥부 / 절도사 성윤문 5,000
함경도 경성부 / 평사 정문부 5,000
함경도 안변부 / 별장 김우고 100, 조방장 김신원 100
강원도 인제현 / 순찰사 강신 2,000
평안도 순안현 / 절도사 이일 4,400
평안도 법흥사 / 좌방어사 정희운 2,000, 의병장 이주 300, 소모관 조호익 300
평안도 용강현 / 우방어사 김응서 7,000, 조방장 이사명 1,000
평안도 대동강 하류 / 수군장 김억추 300
황해도 황주 / 좌방어사 이시언 1,800
황해도 재령군 / 우방어사 김경로 3,000
황해도 연안부 / 순찰사 이정암 4,000

실록에 등장하는 조선 관군과 수군 장수는 모두 36명이다. 36명의 명단에 경남 창녕의 의병장 성안의(1561∼1628)가 들어 있다. 성안의가 침략군과 전쟁 중인 상황에 나라 전체에서 거명된 36명 장수 중 한 사람이라는 실록의 기사는 그가 그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부용정 전경(왼쪽 붉은 건물은 사당)
 부용정 전경(왼쪽 붉은 건물은 사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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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의는 15세 때부터 정구(鄭逑, 1543∼1620)에게 배웠다.  정구는 창녕 현감으로 있던 1580년(선조 13) 지역 유생 교육을 위해 부용정(芙蓉亭)을 창건했다. 성의안이 26세가 되었을 때 스승은 그에게 부용정을 물려주면서 호도 부용당(芙蓉堂)으로 지어주었다. 정자를 특정 제자에게 물려주고, 또 그 제자에게 자신의 정자와 같은 이름의 호를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승이 성안의를 특별한 제자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성안의는 임란 발발 직전인 1591년(선조 24)에 급제했다. 벼슬길에는 1592년 3월에 처음 나아갔다. 전란이 4월 13일 일어났으므로 출세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고향 일원이 왜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는 즉시 고향으로 내려와 부용정 출신 선비들을 중심으로 창의, 이내 1,000여 명의 향병을 조직했다.    

전쟁 터지자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와 의병을 일으킨 성안의

성안의 의병군은 창녕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사흘 동안 포위, 공격 끝에 물리치는 등 경상 감사 김성일이 '성안의가 의병을 매복하여 연이어 적군을 공격하여 많은 수급을 획득했다.'라고 조정에 보고할 만큼 곳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김성일은 성안의에게 소모관(召募官, 의병 모집관) 역할을 맡겼다. 성안의의 이름이 조정에 크게 알려진 것은 그같은 창의와 전투가 낳은 결실이었다.

의병장 부용당 성안의 선생 임란 창의비(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붉은 건물은 사당이고, 그 오른쪽에 부용정의 지붕 일부가 보인다.)
 의병장 부용당 성안의 선생 임란 창의비(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붉은 건물은 사당이고, 그 오른쪽에 부용정의 지붕 일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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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조정에서 형조 좌랑, 사간원 정언, 예조 좌랑 등을 역임하던 성안의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를 도와 종사관(대략 참모장)으로 화왕산성에 들어갔다. 산성 아래로 몰려왔던 가등청정의 군대는 화왕산성을 지키는 아군의 질서 정연한 태세를 보고는 그대로 물러갔다.

1598년에는 병조 정랑으로 재직하면서 경주, 안동, 의성 의흥, 영천, 울산 등지를 오가며 백성들을 구휼하는 한편 군량미를 조달하여 각 군대에 배분했다. 이때 명나라 군대에 양식을 제공하는 책임도 지고 있었다. 명군은 보리쌀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쌀만 받으려 하면서 창고 관리를 맡고 있는 조선 관리를 구타하는 등 행패가 심했다. 그런 때마다 성안의는 문제를 무난히 해결했지만 10월들어 마침내 군량이 떨어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명군은 군사를 보내어 성안의를 체포하려 했다.

국방부 국장으로서 군량미 조달을 하러 다녔던 성안의

그 순간 경주 부윤 박의장(朴毅長)과 함께 있던 성안의는 명군들에게 박의장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조도사(調度使, 군량 조달 책임자)"라고 말했다. 명군은 박의장을 끌고 갔다. 소식을 들은 경주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개인 곡식을 내놓아 하루만에 1만2천 석이 쌓였다. 그것을 명군에게 전달하자 박의장은 바로 풀려났다.

경북 영덕 박의장 종택
 경북 영덕 박의장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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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째서 나를 그렇게 곤혹스럽게 만들었단 말이오?"

박의장이 돌아와 물었다. 성안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것은 나의 계책이었소. 내가 명군에게 끌려가 죽기로서니 경주 백성들이 눈이나 깜짝하리까? (경주성을 탈환하는 등) 경주 백성들이 은인으로 여기는 부윤께서 잡혀가야 군량미를 모아 사또를 구해내자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겠소이까?"

박의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못 당하겠소!"

부용정 사당
 부용정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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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이후 성안의는 영해 부사, 남원 부사, 광주 목사 등을 역임했지만, 1612년(광해군 4) 조정 고관이 개인적 감정 때문에 어느 선비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였을 때 거부했다가 파직된 이후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이상을 줄곧 시골에 묻혀 살았다.

성안의는 은둔 생활 중 주로 경북 봉화의 계서당(溪西堂, 중요민속자료 171호)에서 기거했고, 그곳에서 타계했다. 계서당의 계서는 아들 성이성(以成)의 호이다. 성안의는 아들 이성에게 과거 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한 것은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危邦不入)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亂邦不居)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가 벼슬을 하고(天下有道則見)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無道則隱)'는 『논어』의 가르침에 따른 언행일치의 행동이었다.

교사비(부용정 경내)
 교사비(부용정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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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의가 다시 세상에 나온 때는 인조반정 이후였다. 그는 이괄의 난(1624년)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란할 때 호종했다. 아들 이성도 1627년(인조 5) 과거에 급제했다. 성이성은 네 차례에 걸쳐 암행어사를 역임하였는데,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의 실존 모델로 여겨지고 있다. 성안의와 성이성은 또 조정이 선정한 부자 청백리(淸白吏)로도 이름이 높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248호인 부용정은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 222번지에 있다. 다만 지금 보는 집은 창건 당시의 건물은 아니고 1955년에 복원한 것이다. 1580년 창건 이후 1727년과 1950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지만 재해로 무너져 1780년과 1955년에 재차 중건했다.

부용정 경내에는 문화재자료 247호인 '성안의 초상'을 모신 영정각과, 그가 이곳에서 가르친 일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세운 교사비(敎思碑)도 있다. 담장 밖에는 '성안의 선생 임란 창의비'도 있다.

볼 것은 또 있다. 선생의 스승인 한강 정구가 왜 이곳에 부용정을 세웠는지 그 까닭을 말해주는 자연 유산이다. 부용정 마루 위 또는 창의비 앞에서 바라보는 달창 호수가 너무나 아름답다.

마침 어부 한 사람이 노란 배를 타고 물길을 천천히 가로지르고 있다. 배는 꼬리를 부용정 쪽에 두고 머리를 예안서원 방향에 두었다. 성안의 선생이 홍의장군 곽재우를 만나러 가는 길인가……? 이 상징적 풍경을 사진에 아니 담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안의와 곽재우를 잇는 어부의 물길을 보여 주어야지. 사진을 찍으며 나 또한 어부가 된 듯한 감흥을 느낀다.

부용정 앞 호수
 부용정 앞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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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성안의, #부용정, #계서당, #성이성, #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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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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