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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묘역
 경남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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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만큼 성숙한다'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아픔을 되새기는 과정이 없다면 절대로 성숙하지 못한다. 감춘다고 사라질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아픈 시간을 되새기며 기억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오히려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6월 18일 길을 나섰다.

경남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거창양민학살사건판결문비’
 경남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거창양민학살사건판결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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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서북부에 있는 거창군은 지리산과 가야산 자락이 어우러진 내륙 도시다. 더구나 신원면은 사방이 감악산, 갈전산, 보록산, 월여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신원면으로 가는 길은 돼지 곱창처럼 구불구불하다. 뜨거운 햇볕처럼 이글거리듯 산청에서 거창 신원면으로 가는 길에는 다행히 홍단풍들이 심겨 있다. 면 소재지에 이르기 전에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나온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영령들을 하늘로 인도한다는 천유문(天?門)을 지나면  오른편에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각이 나온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영령들을 하늘로 인도한다는 천유문(天?門)을 지나면 오른편에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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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찾은 날은 정문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에둘러 안으로 들어가자 국회의원 공적비가 먼저 눈에 띈다. 공적비의 주인공은 신중목(愼重穆) 거창군 제2대 국회의원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 때 무고한 거창군 신원면민 719명이 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국회에서 진실을 알렸다며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공적을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에서 기리는 비를 세웠다.

옆에는 거창사건 신문보도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오래된 신문 하나하나 찬찬히 읽다가 옆으로 지나면 '거창양민학살사건판결문비'가 나온다.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共匪)토벌작전 중이던 국군 제11사단은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을 수행 중이었다. 견벽청야는 군이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을 점령한 후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 벽촌의 물자를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전시 중인 양민학살 재현물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전시 중인 양민학살 재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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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세 ~ 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이 60명(남자 327명, 여자 392명), 무고한 양민 719여명이 당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의 총검에 무지막지하게 학살되어, 처참한 시신위에 마른 나무와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워 버리기까지한 천인공노할 사건을 저질러 놓고 후한에 두려움을 느낀 한동석은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이방인 출입을 막고,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 현장에서 약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하여 은폐를 하고, 공비와 전투를 하여 희생자가 발생된 것으로 왜곡을 했다.'
(거창추모공원 홈페이지(http://www.geochang.go.kr/case/Index.do) 중에서)

거창사건추모공원 근처에 있는 박산학살현장
 거창사건추모공원 근처에 있는 박산학살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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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3월 29일 이 사건이 국회에서 거창군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의 보고로 폭로되었다. 국회는 조사단을 파견,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려 하자 당시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었던 대령 김종원(金宗元)은 국군 1개 소대를 공비로 가장시켜 위협적인 총격을 가함으로써 조사를 방해했다.

결국 진상이 밝혀지자 내무·법무·국방부 장관이 물러나고 9연대장이었던 오익균(吳益均)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는 무기징역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에게는 3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어 김종원은 경찰 간부로 특채되기도 했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11일 유가족 70명은 사건 당시 신원면장 이었던 박영보(朴榮輔)를 생화장할 정도로 분노와 한은 깊었다. 이를 계기로 국회는 진상조사를 다시 시작, 거창을 비롯한 인근 함양·산청·문경·함평 등의 양민학살사건을 밝혀냈다.

거창사건추모 공원 내 위령탑
 거창사건추모 공원 내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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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5·16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유족들이 박산골에 세운 위령비를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징으로 쪼여져 땅속에 묻혔고 유해는 흩어졌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유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 추모 사업이 이루어졌다.

맞은편에는 '님을 위한 진혼곡'이란 시가 외로운 혼들을 달래고 있다. 영령들을 하늘로 인도한다는 천유문(天羑門)을 지나자 오른편에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각이 나온다. 봉안각을 지나 곧장 위령탑으로 나아갔다. 위령탑 앞에는 넋을 모시고 푸른 하늘로 올라갈 듯이 마차 형상의 틀에 국화가 심어져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위렵탑 왼편에는 무릎 꿇은 군인들이 영령들과 유족들에게 참회하는 상징물이 나온다. 진정으로 그러했기를 묻는다.
 거창사건추모공원 위렵탑 왼편에는 무릎 꿇은 군인들이 영령들과 유족들에게 참회하는 상징물이 나온다. 진정으로 그러했기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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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올라갈 마차를 지나자 높이 18m 위령탑이 나온다. 위령탑은 '거창사건으로 희생된 남자, 여자, 어린이의 무덤을 상징하는 3단의 돔 사이로 영혼이 부활하여 어둠을 뚫고 하늘로 오름을 상징한다'라고 한다. 탑 오른편에는 후손들의 정성 어린 위로속에 한을 풀고 승천의 기쁨을 만끽하는 영령들과 유족들을 표현한 상징물이 나온다. 왼편에는 무릎 꿇은 군인들이 영령들과 유족들에게 참회하는 상징물이 나온다. 진정으로 그러했기를 묻는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위령탑 뒤편에는 “기억하라, 여기 이곳은, 칼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 거창사건의 현장이다.”라고 시작하는 거창사건 위령탑 건립에 부쳐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위령탑 뒤편에는 “기억하라, 여기 이곳은, 칼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 거창사건의 현장이다.”라고 시작하는 거창사건 위령탑 건립에 부쳐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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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에는 "기억하라, 여기 이곳은, 칼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 거창사건의 현장이다."라고 시작하는 거창사건 위령탑 건립에 부쳐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글은 "~하늘이시여 용서와 화해를 내리소서. 길손들은 여기 이곳을 그냥 무심코 지나지 마시라. 무언가 생각들을 좀 해 보시라."고 적혀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묘역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이 쓴 글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묘역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이 쓴 글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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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에는 제1 묘역이 나온다. 태어난 날은 각기 다르지만 죽은 날은 한날이다. 더구나 1950년 6월 3일 태어나 1951년 2월 11일 죽은 신일순 묘 앞에서는 걸음을 차마 옮길 수 없었다. 내 머리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을 안고 까마귀 한 마리 날아간다.

거창사건추모공원을 찾은 내 머리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을 안고 까마귀 한 마리 날아간다.
 거창사건추모공원을 찾은 내 머리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을 안고 까마귀 한 마리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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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묘역을 지나 제2 묘역으로 향했다. 어느 작은 묘비 뒤에는 아버지와 이 세상에서 육십오일을 함께 살았다고 적은 아들의 애통한 마음을 담은 글이 새겨져 있다. 통곡으로 쓴 글에는 '아버지! 정말 불러 보고 싶었던 말입니다.~어머니 살아 생전 말씀하시더군요. 너거 아버지 얼굴 볼라카면 명경놓코 네얼굴 보라고요.~' 글을 읽는 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눈물과 함께 흘려 그냥 흘러내린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묘역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 때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무고한 거창군 신원면민 719명의 넋이 묻혀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내 묘역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 때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무고한 거창군 신원면민 719명의 넋이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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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아픈 이야기까지 묵묵히 품고 말없이 추모공원 묘역은 지나간 시간을 기억한다. 추모교육관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아픈 기억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두 눈 크게 뜨고 보고 가슴으로 울림을 느꼈다. 아픈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진정한 미래로 나갈 수 없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맞은편에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위령비가 파괴되어 쓰러진 박산합동묘역이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맞은편에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위령비가 파괴되어 쓰러진 박산합동묘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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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공원 맞은편 위령비가 파괴되어 쓰러진 박산합동묘역과 박산골 학살장소를 둘러보았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이런 일을/후세 길손들은 기억할 손가!/ 박산아 말해다오/감악산아 대답해 다오/ 여기 비명에 간 신원 양민이/ 지금도 외치고 있다오'(차석규의 '박산아 말해다오' 중에서)

총탄 흔적이 선명한 바위처럼 우리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감춘다고 사라질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아픈 시간을 되새기며 기억해야 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 때 국군에 의해  무고한 거창군 신원면민 719명의 학살당한 거창사건을 다룬 영화 <청연> 스틸컷.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 때 국군에 의해 무고한 거창군 신원면민 719명의 학살당한 거창사건을 다룬 영화 <청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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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경남이야기>
<해찬솔일기>



태그:#거창사건, #거창사건추모공원, #양민학살, #한국전쟁, #아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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