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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에서 찍은 흔히 보기 어려운 쌍무지개. 날씨가 굳은 날에는 무지개가 자주 떠오른다.
 베란다에서 찍은 흔히 보기 어려운 쌍무지개. 날씨가 굳은 날에는 무지개가 자주 떠오른다.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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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파란 하늘 보기가 어렵다. 우중충한 날씨의 연속이다. 소나기가 장대같이 퍼붓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흔히 이야기하는 궂은 날씨의 연속이다. 그러나 좋지 않은 날씨 덕분에 흔치 않은 풍경을 볼 수 있는 좋은 점도 있다.

아침에 베란다에 나가면 수많은 산봉우리 사이로 산불이 난 것처럼 구름이 피어오른다. 골짜기에 잠겨있는 구름은 마치 호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위에 있는 나무와 식물도 물기를 잔뜩 머금고 싱싱한 삶의 향기를 토해낸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밀 때는 무지개가 하늘을 수놓아 눈을 즐겁게 하기도 한다.

비가 오면 가장 아쉬운 것은 산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동네 산책길 혹은 해변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는 재미를 가질 수 없다. 물론 우산 쓰고 걸을 수는 있지만 집을 나서기가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집구석에서 텔레비전이나 책을 보며 '방콕'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하늘에서 비 내리기를 잠시 멈춘 모양이다. 며칠 산책을 못 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포스터(Forster) 산책길을 찾아 나선다. 지난번 이웃이 포스터에서 3시간 정도 걸었는데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포스터에 가면 자주 들리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우중충한 날씨이긴 하지만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인다. 골프장을 낀 도로를 따라 해변 쪽으로 걷는다. 골프장의 물 머금은 잔디밭이 초록색을 마음껏 발산한다. 서너 명이 한가하게 골프를 치고 있다. 비가 그친 틈을 이용해 골프장에 나온 사람들이다. 골프광임이 틀림없다.

조금 걸어 언덕에 오르니 바다가 보인다. 해변 앞에는 넓은 공원이 있다. 바비큐를 하며 즐길 수 있는 큼지막한 나무 식탁도 서너 개 있다. 그러나 궂은 날씨 때문인지 공원을 찾은 사람은 없다.

바다 쪽으로 계속 걷는다. 백사장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변 가까이 도착하니 예전에 못 보았던 산책길이 새로 생겼다. 자연을 해치지 않으려고 두툼한 널빤지를 지면 위에 깐 산책로다. 난간도 멋있게 만들었다. 최근에 조성하였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새로 만든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해변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작고 온몸이 뒤틀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목재로는 전혀 쓸 수 없는 나무다. 목수가 보았다면 쓸모없는 나무라고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에만 '쓸모 있음'을 부여하는 사람들도 하찮은 나무로 치부할 것이다. 하지만 산책하는 사람에게는 그늘과 좋은 공기를 제공하는 쓸모 있는 나무들이다.
    
친구로 보이는 할머니 둘이서 강아지를 데리고 걷는다. 쉴 새 없이 떠드는 어린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엄마, 아이가 목말을 타고 아빠와 함께 즐거워하는 부녀를 만나기도 한다. 산책로에 품위 있게 만들어 놓은 의자에도 한 번 앉아 본다. 해변으로 나가는 난간에 기대어 너른 백사장에 하얀 거품을 내뿜는 파도를 보기도 한다. 이름 모를 들꽃에 시선을 빼앗기고 새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의 산책을 즐긴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새로운 맛을 느낀다

포스터의 새로 만든 산책로에서 바라본 해변
 포스터의 새로 만든 산책로에서 바라본 해변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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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를 계속 가다 보니 눈에 익은 길이 나온다. 평소에 자주 가던 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전망대를 향해 걷는다. 오른쪽으로 깊은 낭떠러지 아래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계속 걷는다. 전망대를 지나 포스터 중심가를 향해 내려간다. 눈에 익은 길이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걷기는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보이는 풍경도 색다르다.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끝없는 태평양을 오른쪽으로 보며 산책길을 다 내려왔다. 바닷길을 따라 포스터 시내 중심 해변까지 갈 생각으로 걷는데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가던 길을 되돌아 차를 세운 곳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굵은 빗줄기는 아니다. 가랑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는 길에 공동묘지가 보인다. 호주를 여행하다 보면 동네 한복판에 공동묘지가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평소 자동차로 가끔 지나치던 자그마한 공동묘지다. 가랑비 맞으며 우중충한 날씨 때문일까, 묘지에 눈길이 간다. 삶과 죽음, 상반된 단어로 쓰이고 있으나 달리 생각하면 같은 뜻이라는 생각도 든다. 산다고 하는 것은 죽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읽었을 것이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기간을 잠시 헤아려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호주 동포 신문 '한호일보'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태그:#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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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300km 정도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서 은퇴 생활하고 있습니다. 호주 여행과 시골 삶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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