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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괴정은 임진왜란 의병장 이방린 삼형제를 기리는 유적이다. 유형문화재 286호로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 533에 있다.
 삼괴정은 임진왜란 의병장 이방린 삼형제를 기리는 유적이다. 유형문화재 286호로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 533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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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괴정(三塊亭)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했던 이방린(李芳隣)과 두 동생 유린(有隣) · 광린(光隣) 삼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7대손 이화택이 1815년(순조 15) 건립한 정자이다. 삼괴정이라는 이름은 삼형제가 왜적과 싸우러 가기 전에 각각 괴나무(회화나무)를 한 그루씩 경내에 심은 데서 유래했다.

<경주 읍지>에 따르면 이방린은 이미 1592년 6월 9일의 문천 회맹에도 참가했고, 그 이후 6월 17일 문천 전투, 영천성 수복 전투, 계연 전투 등은 물론 경주성 수복 전투에도 참전했다. 특히 2차 경주성 수복 전투 때는 직접 선봉장을 맡은 박의장이 이방린의 의병군과 경상좌병사 및 경주부 관군 중에서 정예병을 뽑아 출전하기도 했다. 이방린은 뒷날 안동부사를 역임했다. 삼괴정은 마루가 T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김몽구 의병장을 기리는 화서정은 영천시 화산면 연계리 38-1에 있다.
 김몽구 의병장을 기리는 화서정은 영천시 화산면 연계리 38-1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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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정(華棲亭)는 '한천 승첩지'의 백의사(百義祠)에 제향된 김몽구(金夢龜, 1545∼1615)를 모시는 재실이다. 백의사에 모셔지고 있다는 것은 영천 지역 의병이 처음으로 왜적을 대파한 한천 전투에 참전했다는 뜻이다.

1592년 4월 27일 권응수, 권응수의 동생 권응전, 종매부(사촌누이의 남편) 김몽구, 이온수(李蘊秀) 등은 마을 사람들과 종 등으로 구성된 의병 부대를 창의했다. 이들은 5월 6일 한천(화남면 삼창3리)에서 왜적 10여 명의 목을 베고, 그 동안 군민들을 약탈해오던 관노 희손 일당 200명 중 30여 명을 척살했다. 이 승리는 상대적으로 창의가 늦어져온 경상좌도 일원에서 활발하게 의병이 일어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몽구 유허비 오른쪽 뒤로 화서정이 보이는 풍경. 김몽구의 부인이 권응수의 사촌누이이므로 김몽구는 권응수의 종매부가 된다.
 김몽구 유허비 오른쪽 뒤로 화서정이 보이는 풍경. 김몽구의 부인이 권응수의 사촌누이이므로 김몽구는 권응수의 종매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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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몽구는 영천성 수복 이후 지역에 전쟁 기운이 사라지자 고향 마을 대수촌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지들을 이끌고 10리가량 떨어진 '연못안 마을'로 집단 이주를 하였다. 그는 본래 풍수지리에도 일가견이 있었지만 여러 차례 왜적과 전투를 겪은 결과 사람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주거지를 조성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먼저 연못 안쪽에 왕버들 숲을 조성했다. 지금 '모산숲'이라 부르는 이 인공숲은 외부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 모산숲에서 마을 가까이로 다가선 곳에는 새로 인공못을 파고, 바깥 둑을 '돈대(墩臺)거리'로 만들었다. 못은 평상시에는 농사지을 물을 대고 전시에는 해자(垓子) 역할을 하도록 구상했고, 못둑은 유사시에 망루(望樓)와 포대(砲臺)로 쓰려는 계획이었다.

지역 지도자로서 선비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김몽구는 뒷날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 및 세종과 소헌왕후릉인 영릉 참봉(英陵參奉)을 역임했고, 유고로 「참봉공 일고(參奉公逸稿)」를 남겼다.         

김득추를 기리는 천산정은 영천시 임고면 금대리 353에 있다. 종2품까지 오른 김득추는 99세로 천수를 누렸다.
 김득추를 기리는 천산정은 영천시 임고면 금대리 353에 있다. 종2품까지 오른 김득추는 99세로 천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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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정(天山亭)은 문천 회맹, 문천 전투, 영천 수복 전투, 경주 수복 전투, 달성 전투, 영지 전투, 금장대 전투, 화왕산 회맹 등 많은 전투에 참전했고, 1596년에는 사촌동생 김자평(金自平)과 함께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이몽학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선무원종 2등공신 김득추(金得秋, 1562∼1660)를 기려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영천시 임고면에서 포항시 기계면으로 넘어가는 921번 지방도로의 임고천 물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전란 초기에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김자평, 조카 김응택(金應澤) 등과 함께 창의했다. 1595년(선조 28) 이래 훈련원 판관 등 관직 생활을 했으며,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했다. 1651년(효종 2)에 품계가 가선대부(종2품)까지 올랐고, 1660년 무려 9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문집으로 《구재실기》를 남겼다.

이온수를 기려 세워진 학천서당은 화남면 대천리 956에 있다.
 이온수를 기려 세워진 학천서당은 화남면 대천리 956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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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천서당(鶴川書堂)은 임진왜란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된 이온수(李蘊秀, 1558∼1619)를 기려 세워졌다. 이온수는 임진왜란 초 어머니가 왜적에게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산에 피란을 와 있던 중 마을에 방아를 찧으러 갔던 어머니는 왜적 세 명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중상을 입은 까닭을 묻는 아들에게 말은 하지 못하는 채 손가락 셋만 들어보이고 절명했다. 이온수는 왜적 셋을 찾아 활로 쏘아 죽인 후 어머니의 원수도 갚고 나라의 원수도 갚겠다는 일념으로 권응수 의병군의 일원이 되었다.

이온수는 한천 전투, 영천성 수복 전투, 1차 경주성 탈환 전투, 상주 당교 전투, 형산강 전투 등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이온수는 '한천 승첩지'의 백의사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조종악을 기리는 귀암정은 영천시 금호읍 성천리 401-1 도로변에 건립되어 있다.
 조종악을 기리는 귀암정은 영천시 금호읍 성천리 401-1 도로변에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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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암정(龜巖亭)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조종악(趙宗岳, 1566∼1633)을 기려 후손들이 세운 집이다. 조종악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노모를 동생 조종대(趙宗岱)에게 부탁한 뒤 영천 의병에 뛰어들어 한천 전투, 영천성 수복 전투를 치렀다. 특히 영천성 수복 전투에서는 군대의 관향(管餉)을 맡아 군수 참모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승리의 기반이 되었다.

조종악은 영천 수복 후 권응수의 명에 따라 청송 지역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이경천(李擎天)과 함께 청송으로 간 조종악은 군량을 모으고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에 전력을 쏟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권응수는 조종악의 지략과 용맹을 장하게 여겨 청송진(靑松陣)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고 이로 인해 청송 지방이 병난(兵難, 전쟁의 피해)을 입지 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 105-2 자암정은 조종대를 기려 세워진 건물이다.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 105-2 자암정은 조종대를 기려 세워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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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정(紫巖亭)은 영천성 수복 전투에 직접 참가하여 왜적과 싸웠고, 청송에서 군량과 의병을 모집 중인 형 조종악을 돕기 위해 곡식 200곡과 병사 30명을 보내는 등 임진왜란 당시 구국 활동에 열성을 보였던 교수(敎授) 조종대(趙宗岱, 1569∼1635)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이다. 형 조종악의 귀암정에서 3km가량 북쪽에 있다.

특히 조종대는 임고서원의 정몽주 영정과 영천향교의 오성(五聖,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위패를 종전 때까지 안전하게 모신 것으로 이름이 높다. 1593년(선조 26) 자양의 계정에 이들을 숨겨 4년 동안 안전하게 모셨던 조종대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시 피란시켜 무사히 지켰다. 조종도는 전투 참전, 모병과 모곡, 성현 수호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후 선무랑(종6품)의 벼슬을 받았다.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707의 일성정은 의병장 권응심을 기리는 재실이다. 사진 오른쪽 끝에 보이는 비석은 '구의헌 권선생 유허비'로,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권열을 기려 세워진 기념 빗돌이다.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707의 일성정은 의병장 권응심을 기리는 재실이다. 사진 오른쪽 끝에 보이는 비석은 '구의헌 권선생 유허비'로,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권열을 기려 세워진 기념 빗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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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정(日省亭)의 일성은 의병장 권응심(權應心, 1554∼1597)의 호이다. 연도 1597년은 의병장이 정유재란 중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권응심은 영천 한천 전투, 박연 전투, 영천성 수복전, 형산강 전투, 팔공산 회맹 등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는데, 1597년 12월 21일 울산에서 왜적과 싸우던 중 총탄에 맞아 향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성정 뜰에는「구의헌 권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광주목사를 지낸 구의헌 권열은 권응심의 고조부이다. 권응심의 증조부는 권처정이다. 권처정은 권응수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이 말은 권응심과 권응수가 2세인 할아버지 대에서 갈라졌다는 뜻이다. 권응심의 할아버지는 권붕이고, 권응수의 할아버지는 권란이다. 권란의 아들 권덕신은 자신의 네 아들 권응수 ‧ 권응전 ‧ 권응평 ‧ 권응생이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덕분에 능라군에 봉해졌다.

의병장 이덕수를 기리는 재실 쾌우정은 일성정 바로 앞에 있다.
 의병장 이덕수를 기리는 재실 쾌우정은 일성정 바로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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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정이 있는 가래실(가상리의 고유 이름)은 임진왜란 때 권응수를 비롯해 권응평, 권덕시, 권응심, 권응전, 권응화, 권응렴 등 23명이나 되는 공신을 배출한 충의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마을 입구 '가래실 행복 나눔 쉼터' 주차장에「임진왜란 신녕 의병 창의지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의병장으로 활동한 이덕수(李德秀)를 기려 세워진 쾌우정(快憂亭)도 있다.

가래실에서 약 12km가량 북쪽의 신녕면 화남리 659에는 사당과 유물관 등을 갖춘 '권응수 장군 유적'도 있다. 주소를 몰라도 '권응수 장군 유적'으로 검색하면 길 안내를 받을 수 만큼 잘 정비가 되어 있는 임진왜란 유적이다.

영천 일원의 임진왜란 유적을 거의 다 둘러보는 오늘

<영천 수복 위해 의병들은 이렇게 준비했다>, <아버지보다 20년 일찍 죽은 아들, 왜 칭찬받았나>, <의병장들 빠진 이상한 조선의 논공행상>,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 교과서에 수록되어야"> 기사를 쓰느라 서세루, 창대서원, 시총, 강호루, 한천 승첩지 등을 답사한 바 있다.

오늘은 영천성 수복 전투 등에 참전하여 왜적 격퇴에 힘을 쏟았지만 앞의 기사에 거명되지 않았던 의병장들의 유적을 둘러보았다. 이제 '권응수 장군 유적'과 경북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 1294의 귀천서원까지 눈과 마음에 담는다면 "영천의 임란 유적을 성심껏 답사하였다."라고 칭찬받아 마땅할 듯하다. 자, 출발이다, '권응수 장군 유적'과 귀천서원으로!

영천시 신녕면 화남리 659 일원에는 권응수를 기리는 사당, 유물관, 비석 등을 거느린 '권응수 장군 유적'이 조성되어 있다.
 영천시 신녕면 화남리 659 일원에는 권응수를 기리는 사당, 유물관, 비석 등을 거느린 '권응수 장군 유적'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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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영천성, #김몽구, #권응수, #화서정, #권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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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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