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온라인에서 출발한 일련의 논의들은 말 그대로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고, 최근에는 A대위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이전에는 일상에서 흔히 보기 어려웠던 '젠더', '섹슈얼리티' 같은 단어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교육방송에서 젠더 토크쇼가 방영되고 있고, 공중파의 시사프로그램에서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방송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여성 가출 청소년이 주인공이고 트랜스젠더가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화 <꿈의 제인>이나, 흔히 '박카스 할머니'로 호명되는 노년 여성 성노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트랜스젠더, 이주 여성과 자녀 등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는 <죽여주는 여자> 등 영화관에서도 전에 비해 다양한 성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성소수자면서 동시에 성노동자 활동가인 나도 최근에 다양한 공간에서 강의나 인터뷰 요청을 받고 있다.

그런 나에게 많은 이들이 "진짜 성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을 한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진짜 성노동자'는 무엇일까? 사람들 앞에서 한 사람의 성노동자로 나의 이야기를 꺼낼 때, 성노동자로서 다수의 사람들을 마주해야하는 부담스러움과 함께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이들이든 내 이야기를 한 사람의 성노동자가 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때로는 나의 이야기가 한국의 성산업 전체를 대변하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이야기가 아주 예외적인 사례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지금까지 들은 이런) 진짜 성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혹은 "(지금까지 들은 거 말고) 진짜 성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라고.

그런 자리에서 종종 성노동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지면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인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을 번역한 박이은실씨가 저자로 참여했던 <성.노.동> 같은 책들을 추천하기도 했다. 허나 국내에는 '성노동'의 관점에서 쓰인 책들이 많지 않아 추천 이전에 내가 공부하기 위해 읽을 책도 부족해서 답답함을 느껴왔다.

<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 여문책

관련사진보기

그 와중에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원제 Playing the whore)이 번역 출판된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책을 구입했다. 2014년에 나온 책이고, 저자 멜리사 지라 그랜트가 전직 성노동자인 저널리스트이자 페미니스트라는 이야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첫 장을 펼쳤다. 우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저자가 단순히 '성노동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다.

"성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진 직업에 애정을 보여야 한다고 기대받는 것에 익숙할지 모른다. 성노동자들이 그 일을 즐거워해야지만, 그 일을 사랑해야지만, 그 일에서 힘을 얻어야지만 일터에서 권리를 가질 자격을 획득한다는 주장은 명백히 퇴행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그 일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려는 요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08쪽

구체적인 역사와 사건들로부터 출발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저자는, 자신의 관점에 대해 수세적으로 방어하거나 논쟁적인 지점들을 피하기보다 맥락 위에서 명확하게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드러낸다.

이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의 제목은 경찰, 매춘인, 일, 논쟁, 산업, 구경 구멍, 낙인, 다른 여성들, 구원자들, 운동이다. 얼핏 보기에 서로 다른 지점에서 조금씩 성노동을 맥락화하듯 전개되는 이 책을 읽어나가다 6장을 다 읽어갈 때쯤 각각의 장들이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Playing the whore'라는 원제를 가진 이 책이 어째서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성노동을 특수하고 병리적인 사회현상으로 서술하는 대신 저자는 성노동을 중심에 두고, 성노동이 이루어지는 공간, 맥락, 성노동자의 삶이 어째서 그 자체로 이미 정치인지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온라인으로 성산업의 공간적 기반이 옮겨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성노동자와 성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욱 특정한 방식을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아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성노동자', '매춘부'의 이미지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지 함께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녀가 고객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통해서만 그녀를 알 수 있다. 소설가, 기자, 연구자의 눈은 물리적으로든 가상으로든 그녀가 기대고 있는 창문 너머에 있다. 이것은 '이전'의 그녀 삶의 원래 이야기에서 벗어나 붉은 불빛, 침대, 남자, 돈과만 관련되어 있다. 다른 모든 것은 프레임 밖에 있다.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그녀의 모든 것이다. 그녀가 그것들에 등을 돌릴 때까지." -111, 112쪽

저자는 성노동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노동자가 이미 주체라는 사실을 드러낼 따름이다. 또한 성노동자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상상되는 특정한 이미지에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성노동 운동이 단지 성노동자들만의 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오랫동안 성산업 안에 비규범적 젠더가 있어왔고, 성산업은 다른 직종에서 차별에 직면한 이들에게 가장 의지할 만한 소득원이 되어왔다. 그렇지만 성거래 안에서 규범적 젠더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성노동 현장 밖에 있는 이들에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 52쪽.

"우리는 돌봄과 성행위는 무료로, 진심과 사랑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주부는 자신의 정당성을 임금을 좇지 않는 것으로 유지하고 갈보는 임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 관습을 깬다. 그들 둘 다 여성이 남성에게 생계를 의존하도록 만든 바로 그 동일한 체제 때문에 폄하되고 제약받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체제로부터 함께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 190쪽.

"2003년에 나는 매춘인 권리운동이 태동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정말이지 그곳에는 모든 운동이 존재했다. 학생해방운동이 없었다면, 흑인해방운동이 없었다면, 여성해방운동이 없었다면, 게이해방운동이 없었다면, 당시 마고가 살았던 샌프란시스코 소살리토 부둣가의 보트집에서 매춘인 권리운동이 탄생할 수 있었을지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195쪽.

성노동자로 현장에서 일했고 그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는 저자는 일을 하는, 바로 그 순간의 장면으로 납작하게 상상되는 성노동자들이 제각기 얼마나 다르고 입체적인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비단 사람들의 통념과 다른 모습을 한 성노동자인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많은 이들에게 저자의 이야기가 의미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죽여주는 여자> 한 장면.
 <죽여주는 여자> 한 장면.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FILMS)

관련사진보기


2004년 9월 23일 성매매특별법이 발효되고, 성노동자들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2005년 6월 29일에는 성노동자들이 '성노동자의 날'을 스스로 선포했고 성노동 운동에서는 지금도 6월 29일을 성노동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성노동-성매매 이슈는 페미니즘 담론에서도 굉장히 논쟁적으로 여겨진다.

작년 3월 31일에는 성매매특별법 위헌제청이 있었고, 헌법재판소는 성매매특별법이 헌법의 취지에 부합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3년 전 11월에는 통영에서 한 성노동자가 함정수사 과정에서 사망했고, 이후로도 많은 성노동자들은 단속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성노동자를 범죄자로 만드는가?

나의 문제는 그저 나라는 예외적인 개인이 겪는 문제일 뿐일까?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고민들에 답을 주는 동시에 그 고민들을 확장시킨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옮긴이 서문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옮긴이 서문을 일부 인용하는 것으로 서평을 마치겠다.

"그랜트가 바라듯, '성노동자 페미니즘'이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흑인 페미니즘이 가능하고 제3 세계 페미니즘이 가능하고 퀴어 페미니즘이 가능하다면 '성노동자 페미니즘'이 불가능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심지어 '창녀 페미니즘'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랜트가 말하듯, 성노동자 페미니즘의 핵심 활동 중 하나는 '창녀 낙인'을 해체하기 위해 '창녀연대행동'을 조직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런 그랜트를 응원한다. 그리고 한국에도 그랜트와 입장을 같이할 성노동자들이 있다면(있을 줄로 안다) 그들을 응원한다. 깊은 연대의 마음으로." - 20쪽.

깊은 연대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2017년 6월 29일에 어느 성노동자 페미니스트가.


Sex Work -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멜리사 지라 그랜트 지음, 박이은실 옮김, 여문책(2017)


태그:#성노동자의 날,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