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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인트 던스틴에 계속 갔던 이유는 에릭 때문이었지만 다른 남학생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들이 술에 취해 작업을 걸 때조차도. 다들 전형적인 프래피 속물이었다 (우리 엄마가 종종 인용하는 대로). 3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는 인간들. 그래도 대체로 예의바르고, 전날 밤에 얼마나 취했느냐 혹은 오늘 밤 얼마나 취할 것이냐가 요점이 아닌 대화를 나눌 줄 알았다. 그들은 어른인 척하는 소년들이었고, 따라서 정치와 문학에 관한 소신을 피력하며 내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모두 계획된 술수였다 할지라도 나는 그런 수고가 기특했다.' -124, 125p

책 표지
▲ 죽여 마땅한 사람들 책 표지
ⓒ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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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휴가지에 가져갈 책으로 그만이다.

시종일관 성적 긴장감이 흐르고 다섯 건의 살인이 일어난다. 범인은 좀처럼 의심받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한 것도 아니다. 반전에 반전이 꼬리를 물고 잘 다듬어진 문장이 깊이를 더한다. 무엇보다 딴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재미도 있다. 배낭이 거의 다 찼다고 해도 이런 소설이라면 챙기고픈 욕심이 들 법하다. 이 책이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포켓판으로 자주 목격되는 데엔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식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피터 스완슨은 최근 빠르게 인지도를 얻은 인기 작가다. 전 세계 최소 18개국에 번역 출간된 두 번째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그에게 오늘의 성공을 가져다줬다. 출간 1년 만에 10쇄를 찍었으니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공항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살인을 공모한다는 매력적인 도입부터 살인자와 살인을 공모하는 자에게 몰입하게끔 하는 구성이 잘 만들어진 스릴러의 교본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그건 내가 일주일 내내 자문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아내를 죽이고 싶어요. 그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거죠." 나는 술 때문에 무감각해진 입으로 미소 지으며 진담이 아니라는 걸 암시하기 위해 살짝 윙크했다. 하지만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녀는 머리 색깔과 같은 빨간 눈썹을 들어 올렸다."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에요." -27, 28p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거쳐 가는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남녀는 처음 만난다.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며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 바에 자리 잡은 그에게 그녀가 말을 건네고 그는 처음 만난, 그리고 다시는 만날 일 없을 여자에게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얼마 전 아내의 바람을 목격한 남자는 농담처럼 아내를 죽이고 싶다고 고백하는데 여자는 그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답한다.

"솔직히 난 살인이 사람들 말처럼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게다가 당신 부인은 죽여 마땅한 사람 같은데요." -48p

이 지점에서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그 유명한 걸작 <죄와 벌>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가난 탓에 은시계를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리러 고리대금업자 알료나를 찾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녀의 저열한 성품을 마주하고 그녀를 세상에서 제거하기로 결심하는 그 유명한 도입부를 떠올려 보라.

라스꼴리니꼬프가 병적인 사색을 통해 '나폴레옹과 같이 선택된 강자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사회의 도덕률을 짓밟을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그 도입과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도입은 얼마만큼 유사한가. 사색 대신 우연히 만난 타인과의 대화로 살해를 결심한다는 정도가 거의 유일한 차이가 아닌가.

"당신은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너무 나직해서 눈을 들고 그녀 쪽으로 몸을 약간 숙여야만 했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에요.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당신이 아내를 죽인다 해도 어차피 죽을 사람 조금 일찍 죽이는 것뿐이에요. 게다가 그녀에게 상처받을 많은 사람을 구해주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이 사회의 암적인 존재예요.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든다고요. 그리고 당신에게 한 짓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빠요. 죽음은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은 아니니까요. 그녀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고요." -54p

남자의 결심 이후 소설은 전형적인 스릴러의 호흡으로 내달린다. 소설에 주어진 비슷비슷한 찬사, 그러니까 '늑골에 단도가 박히듯 당신의 삶에 미끄러져 들어간다',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는 소설이 있고 미친 듯이 넘어가는 소설이 있는데 이 작품은 후자다', '흡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소설', '읽는 순간 빠져드는 작품'과 같은 평가는 이 소설이 어느 부분에 집중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스완슨은 매 순간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게끔 이야기를 이끈다. 이는 소설 속 캐릭터를 선역과 악역으로 쉽게 구분 짓는 것을 경계하고 시종일관 인물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도록 사전에 설계한 덕분이다.

책이 선악을 쉽게 재단하지 않고 이를 깊이 들여다보는 듯한 위치에서 쓰였기에 책을 읽은 독자 역시 특정 인물에 감화되거나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채 책을 완독할 수 있다. 이는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수백수천의 작품 가운데 이 소설의 특장점으로 꼽힐 만하다.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매력포인트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아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극중 인물 릴리를 응원하는 마음과 마주하게 된다. 책에 대한 평가나 작가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이와 같은 감정을 느낀 독자가 결코 적지만은 않은 듯한데 상당히 놀라운 성취다.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는, 세상의 도덕률을 파괴하는 인물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는 소설이라니. 보통의 집중력과 상상력으론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이 아닌가 말이다.

비슷한 장르로 한국에서 읽지 않은 스릴러팬을 찾기 어려운 <7년의 밤>을 떠올려 보자. 이 소설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인 건 분명하지만 가장 관대한 독자에게조차 딸을 잃고 복수에 나선 악한 오영제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한 기대가 될 것이다. 독자에게 오영제는 철저히 사이코패스이며 타개해야 할 위험으로만 존재한다. 같은 사이코패스로 치밀하게 살인을 기획하며 소설 상당 부분에서 과거의 사건이 드러나는 릴리와 오영제, 두 인물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7년의 밤>과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비교해보는 건 유의미한 작업이다. 두 소설은 최근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스릴러란 점 외에도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 우선 두 작가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방식이 상당 부분 유사하다. 특히 사건에 얽힌 여러 인물과 두 개 이상의 시공간을 능란하게 오가며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차근히 풀어내는 솜씨가 그렇다.

반전에 반전이 꼬리를 무는 구성도 스릴러의 전형이라 불릴 만한데 두 작품 모두가 검증된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는 건(<7년의 밤>은 추창민 감독이,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아그네츠카 홀란드가 연출을 확정한 상태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엇보다 스릴러 장르에서 한국 최정상급 작가로 분류되는 정유정의 작품이 갖지 못한 장점을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내보이고 있다는 건 주목할 만하다.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일정 수준 이상의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점부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결말로 여운을 남긴다는 점, 핵심적인 인물들의 모든 주요한 행위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 등이 그렇다. 이 모두가 이제 막 달리기를 시작한 한국 스릴러가 나아갈 길이 멀고 길다는 걸 일깨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푸른숲(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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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죽여 마땅한 사람들, #푸른숲, #피터 스완슨,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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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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