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철거되기 전의 신림동 달동네 모습.
 철거되기 전의 신림동 달동네 모습.
ⓒ 관악사회복지

관련사진보기


※활빈(活貧) :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줌

봉천동과 신림동은 1960~1970년대 서울 도심 개발과정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철거민들과 농촌을 떠난 이농민들이 정착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바람 불면 흔들리고, 겨울이면 몹시 추웠던 무허가 판자촌. 하꼬방 지붕 위 루핑이 가난보다 더 서럽게 떠는 겨울이면 연탄은 곧잘 떨어졌고 배급받은 밀가루마저 떨어지면 냉방에 모로 누워야 했습니다.

달동네 주민들은 배급 밀가루를 타기 위해 한겨울에도 새마을 취로사업에 동원됐습니다.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엄동(嚴冬), '깡깡'거리는 언 땅에 삽질하면 삽날이 퉁퉁 튀었습니다. 판자촌의 유일한 식수원인 공동펌프가 얼면 판자촌의 여인들은 발을 동동 굴러야 했고 판자촌 처마에 매단 시래기는 꽁꽁 얼었습니다. 판자촌 산비탈 어딘가에는 얼어 죽은 쥐들이 나뒹굴었고 동사한 걸인을 덮은 가마니 옆 누군가 황천길 노잣돈 하라고 던진 동전도 얼었습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이 오고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고 노래하지만 그건 노래일 뿐입니다. 산 아랫동네보다 산동네에 해가 먼저 뜨긴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는 해가 뜨지 않았습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노점을 했지만 단속반에 쫓겨 다니기 일쑤였고, 공장을 다녔지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식모를 살다가 도둑년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움과 수치가 아니라 죄였습니다. 없던 죄도 뒤집어써야 했습니다.

달동네 빈민들의 죽음과 삶 "제발, 우리 집을 부수지 마세요!"

달동네 주민들의 투쟁 모습.
 달동네 주민들의 투쟁 모습.
ⓒ 관악사회복지

관련사진보기


가난한 사람들은 병보다 병원이 더 무서웠습니다. 병이 깊어져서야 병원 문턱을 넘었지만 병원비를 내지 못해 시신을 저당 잡혀야 했고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쫓겨나 시름시름 앓다 죽었습니다. 죽음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탈출구였습니다. 한을 이승에 두고 떠난 망자들은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음의 나라로 떠났지만 지옥 같은 이승에 남겨진 사람들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가난한 가족끼리 지겹도록 싸웠고, 지겨운 가난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습니다.

육성회비 독촉에 시달리다 학교를 그만둔 소년들은 신문을 배달하거나 구두를 닦거나 공장에 갔습니다. 핏발 선 눈빛의 소년들은 가난에 깨지지 않겠다며 소주 병나발을 불고 손목을 긋고 패싸움을 벌이다 깡패가 되거나 물건을 훔치다 소년원에 가기도 했습니다. 누이들은 일찌감치 공순이가 되거나 차장이 되어 집안 빚을 갚거나 쌀을 사다 날랐습니다. 그러다 가족이 쌓아 둔 빚에 팔려 작부가 되기도 했던 아, 가난한 누이들의 눈물로 얼룩진 전성시대였습니다.

달동네 사람들의 소원은 죽기 전에 달동네를 떠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봉천동과 신림동 달동네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달동네를 떠나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철거반이 쳐들어와 해머로 집을 부수고 때 묻은 양은 냄비를 걷어차면, 동네 아저씨들은 투석전을 벌이다 똥물을 던지며 저항했고 아줌마들은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울부짖었습니다.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한 달동네, 집이 부서지고 화염이 솟으면서 시커먼 연기가 동네를 휘감았습니다.

"제발, 우리 집을 부수지 마세요!"

검은 연기에 그을린 아이들이 울며불며 사정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짱돌과 똥물로는 판잣집을 지킬 수 없었으므로 부서진 집 더미에 움막을 짓고 솥단지를 걸어 수제비를 끓였습니다. 빈민들은 난민들보다 못했습니다. 난민들의 천막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빈민들의 움막은 철거 깡패들에 의해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달동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은 부서지지 않는 집이 되는 거였습니다.

빈민 현장에 왔다가 떠난 사람들

재개발 중인 달동네 모습
 재개발 중인 달동네 모습
ⓒ 관악사회복지

관련사진보기


운동권 학생들이 봉천동과 낙골(落骨)에 찾아왔습니다. '낙골(落骨)'은 뼈들이 흩어진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국가권력과 자본의 무자비한 횡포에 분노한 운동권들은 철거민들과 함께 철거반대 투쟁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고, 가난한 아이들의 공부방과 탁아방 선생이 됐고, 야학을 만들었고, 민중교회 전도사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귀먹은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잘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늙으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 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늙으신 아버지 민중의 아버지"
(민중교회 전도사 김흥겸 작시․작곡 '민중의 아버지' 노래 가사)

민중의 아버지를 부르짖던 전도사는 암 투병을 하다 하늘나라로 떠났고 짓밟힌 달동네에는 근사한 아파트가 지어졌습니다. 국가 권력과 자본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운동권 학생들과 종교인 그리고, 빈민운동가들은 하나둘 폐허가 된 달동네를 떠났습니다. 불가항력의 싸움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아, 다들 떠나고 가난한 우리만 남았구나!"

지원군이던 학생들과 운동가들이 철수하자 빈민들은 "배운 놈들은 믿을 수 없다!"며 마음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다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빈민 현장에 남은 일부의 운동가들이 운동의 새판을 짜려고 했지만 세상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정부가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복지사업을 시행하면서 중산층이 등장했습니다. 운동의 중심축이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주민복지운동 선언한 '관악사회복지', 낮은 곳에서 숲 일구는 빈민운동가들

달동네 주민들.
 달동네 주민들.
ⓒ 관악사회복지

관련사진보기


관악사회복지 준비위 개소식 모습.
 관악사회복지 준비위 개소식 모습.
ⓒ 관악사회복지

관련사진보기


"가난의 수렁에서 꺼내주지 않는 사회복지!
가난의 수치를 강요하는 후원이란 이름의 폭력!
살만한 세상이니 가난의 눈물을 감추라는 복지정책!"

빈민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수혜의 대상으로 삼는 개량적이고 온정적인 사회복지사업에 맛 들여 등을 돌리면서 빈민운동은 설 자리가 좁아졌습니다. 달동네 탁아방과 공부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재개발로 해체된 주민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고민하던 운동가들은 1995년 12월 '관악사회복지'를 사단법인으로 만들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관악사회복지는 재개발로 인한 지역의 해체와 주민들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사회 이슈를 발굴하고, 다양한 복지자원의 효과적 배분과 네트워크 형성,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구조 마련과 복지권리의식 성장을 위해 탄생됐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국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부와 복지기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수혜와 시혜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관악사회복지 빈민운동가들은 가난을 고착화시키는 복지정책과 싸우면서 정책에서 배제되고 박탈당한 노인, 여성,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조직했습니다. 빈민들과 함께 울고 웃기 위해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습니다.

봉천동 공부방 선생이던 서울대 출신 활동가 부부는 20년째 빈민과 함께하고 있고, 30대 초반에 성공한 사업가는 3천만 원(현재 3억 원가량)을 내놓으면서 관악사회복지 출범을 부추기다 끝내 상임활동가로 변신했습니다. 철거민 투쟁에 참여했던 빈민 출신 운동권 여학생은 신림동에 아예 방을 얻었고, 야학교사 출신 서울대교수협의회장 이사장은 무거운 짐을 자청했습니다.

빈민운동가들의 사무실 마련-재정난 해소를 위한 '활빈 프로젝트'

재개발 지역인 쑥고개에 위치한 관악사회복지 사무실.
 재개발 지역인 쑥고개에 위치한 관악사회복지 사무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관악사회복지는 자산보다 부채가 많습니다. 재개발지역인 관악구 쑥고개에 위치한 허름한 사무실은 보증금 1천만 원에 월세 35만 원짜리입니다. 최저임금을 받는 6명의 빈민운동가들은 7월 활동비의 60%밖에 받지 못했지만 누구도 임금체불을 노동부에 진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주5일제에 하루 8시간 근무제를 약속했지만 주말을 찾아 먹거나 정시에 퇴근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근로기준법 위반을 문제 삼거나 초과근로 수당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관악사회복지는 심히 시대착오적입니다. 비영리 민간단체들은 정부와 지자체의 위탁사업과 각종 프로그램을 유치하고 기업 후원금을 받으면서 조직의 몸을 불리는 동시에 사회복지사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추세인데 이들은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과 기업 후원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정부와 지자체의 일방적 복지사업과 대가를 원하는 후원금을 받는 순간 사회복지서비스 단체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빈민을 수혜 대상으로 삼는 사회복지를 거부하는 '사단법인 관악사회복지'는 자신들의 운동 원칙에 반하는 후원금은 받지 않겠다고 고집합니다. 이들의 운동 원칙은 빈민들이 스스로 행복의 권리를 찾고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 끝에 100명의 주민활동가들을 탄생시키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조호진 시인의 활빈 프로젝트'는 재정난에 허덕이는 이들의 빈민운동에 기름을 부어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름 없는 별'이 된 빈민운동가들, 가난한 이웃 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팔순의 독거노인이 사준 국밥.
 팔순의 독거노인이 사준 국밥.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였던 봉천동과 신림동 역시 아파트 숲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면 달동네에 살던 철거민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요. 새가 됐을까요. 아닙니다. 날개 없는 빈민들은 더 낮은 곳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화장실 없는 5~6평짜리 혹은 10평 안팎의 무허가 주택과 옥탑방에 살면서 낡은 선풍기와 부채에 의지한 채 이글거리는 폭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손자를 돌보던 할머니는 빈곤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투신했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하고 때밀이 어머니는 목욕탕 보증금을 남편 치료비로 사용하면서 실직자가 됐습니다. 지하 월세방에서 장애인 할머니와 사는 소년의 부모는 이혼했고, 엄마는 소식을 끊었고, 일용노동자로 일하는 아빠는 간혹 나타나 용돈 몇 푼을 주고 다시 떠났습니다.

가난한 아빠는 떠났지만 '관악사회복지' 빈민운동가들은 가난한 소년과 그 어머니와 독거노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고착화시키는 복지정책과 알량한 도움에 그치는 사회복지서비스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수치를 강요하는 후원일랑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실직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스스로 일어서게 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 가려진 신림동 달동네에서 22년째 활동하면서 이름 없는 별이 되었습니다.

신정동 철거민이었던 제가 '관악사회복지' 빈민운동가들의 손을 잡고 '활빈(活貧)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는 것은 그들의 헌신이 눈물겹기 때문입니다. 순정의 시대가 종막을 고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자발적 가난과 순정으로 버티고 있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운동이 답답하면서도 숭고합니다. 아,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린 가난하게 태어났으므로 가난한 이웃들 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활빈(活貧) 프로젝트'를 앞두고 빈민운동가들이 소주를 사주었습니다. 접대비도, 법인카드도 없는 그들은 만 원씩 걷어서 술값을 냈습니다. 소주보다 그들의 지독한 순정에 취했습니다. 무허가 주택에 사는 독거노인은 국밥을 사주었습니다. 가난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니 고맙다면서 사주신 순댓국에 밥을 말아 먹는데 목이 멨습니다. 국밥에 깍두기를 얹어 먹는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울컥 목젖을 울렸습니다. '눈물 밥'을 먹었으니 이제 눈물의 이야기를 시작하렵니다.

▶'관악사회복지' 사무실 마련과 재정난 해소를 위한 '조호진 시인의 활빈(活貧) 프로젝트'에 참여하실 분들은 '관악사회복지' 홈페이지(www.kasw21.or.kr)를 방문하시거나 전화(02-872-8531/070-7568-8531)로 문의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소중한 참여와 후원을 기다립니다.


태그:#관악사회복지, #빈민운동, #신림동달동네, #주민복지운동, #조호진시인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