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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그룹 전자부문 계열사 시그네틱스 해고 노동자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영풍문구 앞에서 정리해고 철회와 불법파견 및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 시그네틱스 해고 노동자 “3번이나 해고한 영풍재벌 규탄한다” 영풍그룹 전자부문 계열사 시그네틱스 해고 노동자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영풍문구 앞에서 정리해고 철회와 불법파견 및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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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8일 오후 서울남부지방법원 310호 법정.

재판장이 물었다. "원고들 다 오셨습니까?" 방청석에 앉은 40~50대 여성 9명이 "네!"라고 답했다. '무노조', '생산 정규직 없는 공장'을 내세우는 반도체 제조회사 시그네틱스에서 20~30년 동안 일한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이희수(49)씨가 원고석에 앉았다. 재판장이 물었다.

"왜 파주공장으로 가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이 비정규직화된 파주공장에 가면 회사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청회사에서 일할 생각은 없습니까?"

이희수씨가 답했다.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기 싫고, 우리가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파주공장에 안 보내려고 하잖아요. 우린 2001년부터 파주공장에 가겠다고 외쳤고, 그래서 3번 해고됐어요. 정규직인데, 이제 와서 비정규직으로 파주공장에 가라고 하면 판사님은 가실 거예요?"

재판장은 "원고들이 원하는 것은 파주공장에 들어가 일하는 것 빼고, 다른 건 없는 거죠?"라고 물었고, 이씨는 "네"라고 답했다. 재판장은 9월 1일 오전에 선고를 내리겠다고 예고한 뒤 변론을 마무리했다.

9명은 시그네틱스 노조(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조합원들이다. 이들은 지난 2001년 해고당한 뒤, 이후 햇수로 17년 동안 모두 3번 해고됐다. 첫 번째, 두 번째 해고는 모두 법원에서 부당해고로 인정됐다. 세 번째 해고는 어떨까. 그 결과는 곧 나온다.

9명의 조합원을 이끌고 있는 이는 분회장 윤민례(48)씨다. 17년 동안 쭉 해고자로 지내고 있다. 3번 해고당한 김양순(51)씨가 수석부분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달 29일 농성장이 있는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두 사람을 만나, 모진 세월 이야기를 들었다.

3시간을 넘긴 긴 인터뷰의 끝은 아이들 얘기였다. 엄마이기도 한 조합원들이 오랜 기간 싸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 점이다. 그렇지만 싸움을 시작할 때 유치원생이었던 아이들은 어느새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스스로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제 아이들은 두 엄마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다.

윤민례 : "언니, 그 얘기 좀 해줘요. 영진이. 기특해요. '엄마는 분회장님과...', 뭐 어쩌라고요."
김양순 : "분회장님과 끝까지 가래요. 그럼,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요. 첫째 아들이요. 둘째도 그렇고. 둘째는 똥분회장이라고 불러요. 하하."
윤민례 : "나를 그렇게 불러? 짜식."

어느 샌가 두 사람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첫 번째 해고



시그네틱스는 같은 이름의 미국회사가 1966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 제조업체다.

윤민례씨는 1988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달 시그네틱스 사원이 됐다. 김양순씨는 1987년 21살에 입사했다.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김씨는 "삼성, 대우, 금성, 아남 같은 회사가 우리 회사에 배우러 왔었어요"라고 말했다.

1995년 거평그룹이 시그네틱스를 인수한 후 1996년 파주에 새 공장을 세웠다. 직원들은 파주공장이 회사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김양순씨 역시 파주에 가기만을 고대했다.

"파주공장이 지어지면, 저희를 다 데려간다고 했어요. 저도 즐거운 마음으로 첫 삽 뜨기 행사를 했죠. 거기 가서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공장이 커지니까, 우리의 미래도 보장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2000년 4월 영풍그룹이 시그네틱스를 인수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영풍그룹은 '무노조 경영', '생산 정규직 없는 공장'을 추구했다. 파주공장은 생산직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로만 꾸려졌다.

회사는 안산공장을 새로 지어 이곳에 서울공장의 정규직 직원들을 보내기로 했다. 2000년 11월 회사는 직원들에게 이를 통보했다. 반발이 컸다. 안산공장은 파주공장과 비교해 투자규모가 작고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만을 생산할 계획이었다. 미래를 예상할 수 없었다.

2001년 7월 회사는 공장문을 걸어 잠그고, 직원들에게 안산공장으로 출근하라는 인사발령을 냈다. 이 과정에서 희망퇴직자와 안산공장에 출근한 사람을 제외한 조합원 160여 명이 파업에 나섰다. 조합원들은 공장 이전을 막고 공장을 점거하기도 했다. 결국 회사는 2001년 10월부터 2002년 3월까지 이들을 모두 해고했다.

해고자 95명은 해고 직후 차례로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를 신청했다. 이후 2006년 12월과 2007년 6월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까지 5년여에 걸친 법정 싸움을 이어나갔다.

1~3심 법원은 일관되게 공장이전은 경영상의 조치로 이를 막기 위한 노조의 파업은 불법파업이라고 규정했다. 결국 노조 간부와 파업에 열심히 참여한 조합원 등 29명의 해고는 부당하지 않다는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엇갈린 운명이었지만, 함께했다

2001년 공장 이전 반대 파업을 했다가 해고된 시그네틱스 윤민례 수석분회장
 2001년 공장 이전 반대 파업을 했다가 해고된 시그네틱스 윤민례 수석분회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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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례씨와 김양순씨의 운명은 갈렸다. 윤민례씨는 끝내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고, 김씨는 복직했다. 해고 당시 노조 사무국장이었던 윤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다.

"죽는 것 빼고 다했어요. 10일 동안의 집단 단식, 2차례의 한강대교 고공농성, 산업은행 로비와 노사정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 사무실 점거. 바로 끌려나왔죠. 하하. 그리고 천막 농성은 징글징글하게 많이 했죠."

윤씨는 불법파업 지도부로 지목돼 2001~2002년 8개월 동안 수배당하고, 그 뒤 3개월은 영등포구치소에서 지냈다. 조합원들이 윤씨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했다. 그는 이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싸움이 길어지자, 조합원들은 생계를 위해 투쟁 현장을 떠났다. 윤민례씨를 포함해 8명만 알바와 집회를 병행하며 싸움을 계속했다.

"나는 투쟁을 열심히 안 했어요. 그래서 복직했나봐요."

김양순씨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복직 판결을 받을 때까지 힘든 시간을 겪었다.

"매일 투쟁하고 늦게 들어오니까, 시아버지가 '바람 피우는 것 아니냐'고 해서 크게 싸웠어요. 그 뒤로는 같이 투쟁하지 못했죠."

대법원 판결 이후, 복직자 30여 명은 부당해고 기간 동안 못 받은 임금을 돌려받았다. 모두 38억 원이었다. 김양순씨는 돌려받은 임금 1억2000만 원 가운데 4000만 원을 노조에 내놓았다. 다른 복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복직하지 못한 이들과 돈을 나누기로 했다. 

윤민례 : "너무 좋았어요. 사실 복직자의 임금인데, 해고자들과 함께 나누기로 한 당사자들의 마음이 고마웠어요."

김양순 : "돈을 많이 못 준 게 미안하죠. '(열심히 싸운) 해고자들이 복직돼야 했는데'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마음이 짠하죠. 동지에 대한 빚이 남았죠. 끝까지 함께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죠."

두 번째, 세 번째 해고

세 번째 정리해고 무효소송 선고 앞둔 시그네틱스 노조 김양순 조합원
 세 번째 정리해고 무효소송 선고 앞둔 시그네틱스 노조 김양순 조합원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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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입장에서 정규직으로 복직한 노조 조합원들은 눈엣가시였다. 회사는 이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안산공장에서는 COG라는 제품을 생산했다. 대부분 삼성전자에 납품했다. 상황이 좋았다. 하지만 회사는 안상공장의 9/10을 다른 회사에 팔았고, 생산물량이 줄었다는 이유로 인원 감축 계획을 세웠다. 이후 회사는 안산공장 노동자들에게 유엔씨라는 회사로 옮겨가라고 했다. 사실상 조합원들을 회사에서 쫓아내려는 속셈이었다. 조합원들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회사는 2011년 7월 28명을 정리해고했다. 김양순씨는 첫 번째 해고 10년 만에 두 번째 해고를 당한 것이다. 해고자들은 그 다음달에 부당해고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2012년 10월 서울남부지방법원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회사는 파주공장과 안산공장은 분리돼 운영되고 있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안산공장에서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의해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물리쳤다.

재판부는 두 공장은 분리돼있지 않을 뿐더러 당시 회사 매년 수십~수백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해고자들을 파주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음에도 이 같은 방식을 외면해 해고회피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회사는 1심 선고를 받아들였고, 모두 복직했다. 회사는 통근 버스를 없앴다. 노조원들은 직접 운전을 배우고 중고 스타렉스 2대를 사서 출퇴근과 투쟁을 이어나갔다. 회사의 속내는 여전했다. 안산공장 문을 닫고 광명사업부를 만들었고, 광명사업부가 어렵다며 노조원 22명을 또 정리해고했다. 2016년 9월의 일이다.

회사는 1억 원이 넘는 위로금·퇴직금을 제안했다. 하지만 김양순씨를 포함해 9명은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 이들은 다시 법원으로 향했다.

김양순 : "처음에 법원에 갈 때 무서웠어요. 죄인인 것 같았어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방청석에 앉아 소리도 질러요. 세상 무서울 게 없더라고요. 그동안 1~2차 해고 때 법무법인 김앤장, 광장이 (회사 변론을) 맡았는데, 우리가 이겼잖아요. 하하."

- 9월 1일 선고인데, 어떻게 전망하세요?
윤민례 : "상황이 비슷한 2011년 2차 해고 판결문을 봤는데, 여지가 없어요.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어요."
김양순 : "판사도 지겹다고 할 거예요. 맨날 똑같은 얘기니까요."

왜 17년 동안 싸우고 있나요?

윤민례씨가 해고자 신분으로 회사와 싸운 시간은 햇수로 17년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긴 세월이다. 노동계에서도 '그만하면 됐다'라는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그는 싸움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비겁하게 도망가면 우리 아들들은 어쩔 건데요. 2001년 큰 애가 (세는 나이로) 7살이었는데, 벌써 23살이 됐어요. 비정규직을 당장 못 없애지만, 우리 아들들이 그렇게 살지 않게 해야 하잖아요. 파주공장의 젊은 친구들이 우리 아들딸 같아요. 그래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양순씨도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올해로 입사 30년인데, 일한 건 13년밖에 안되고, 투쟁한 것은 17년이에요. 영풍그룹의 실체를 알려야 해요. 우아하게 책 팔면 뭐해요, 직원들 괴롭히고 나쁜 일자리를 만드는데. 3번 해고돼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열심히 투쟁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심어지지 않을까요."

기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17년의 세월이 이제는 지긋지긋하지 않을까. 기자의 말에 윤민례씨는 조합원들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3차 해고 이후인 지난해 11월이었다.

"제가 왜 지금껏 (투쟁하는 데에) 남아있냐고 했더니, 다들 내 손으로 사표를 내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정년퇴임하고 싶다고 했어요. 오로지 일하고 싶고, 파주공장으로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고 얘기하더라고요."

 “파주 공장에서 오로지 일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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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시그네틱스, #3번 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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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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