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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통해 전남도청을 다시 장악하면서 5.18은 막을 내렸다. 사진은 '충정작전'으로 체포된 시민군.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통해 전남도청을 다시 장악하면서 5.18은 막을 내렸다. 사진은 '충정작전'으로 체포된 시민군.
ⓒ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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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2년이었다. 2년 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이 '전두환의 군인'들에 의해 곤봉에 맞아 죽고, 대검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은 후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시로 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거기 120명의 전경대원을 이끌고 그가 도착한 곳은 광주광역시에서 전라남도 나주로 빠져나가는 길목 '송정리역'이었다. 기동대장인 그에게 길목을 지나가는 모든 움직이는 것들을 검문검색을 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는 임무가 하달되었다.

1980년 광주에 흥건하게 뿌려졌던 무고한 시민들의 피 냄새가 채 가시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주검들을 밟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 전국을 공포정치로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충청남도 서천,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젊은 파출소장으로 있던 남기방씨가 기동대장으로 차출되어 전라남도 광주로 파견을 명(命)받은 때도 그즈음이었다. 승진시험에 합격하고 경사에서 경위로 계급장을 바꿔 달기 무섭게 벌어진 일이었다. 건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초임발령을 받은 지 2년 만이었다. 당시 그는 스물일곱의 젊은 경찰 간부였다. 

광주 파견 한 달 만에 벗어야 했던 경찰 제복

'송정리역' 앞 도로를 가로막은 그는 전경대원들과 함께 하달된 명령대로 광주로 들어오고 나가는 차와 사람들을 모두 검문검색 했다. 그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80년 광주에서 살아남은 '폭도'들을 잡아들여야 했다. 잡아들여야 할 폭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명단이나 잡아들일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라도 폭도라고 추정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자는 폭도였다.

문신이 있는 자는 문신이 증거였다. 주먹 쥔 손에 굳은살 박인 하층 노동자는 그 굳은살이 증거였다. 머리가 길면 머리가, 복장이 알록달록하면 복장이 증거였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부인하는 자는 대가를 치렀다. 저항이 있으면 폭력이 뒤따랐다. 저항이 심하면 폭력은 강해졌다. 얼굴이 터지고 머리가 깨진 채 트럭에 실려 광주로 보내졌다. 그렇게 실려 간, 폭도로 추정된 무고한 시민들은 영장도 없이 가족들에게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권력이 원하는 폭도를 만들어내는 일을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하지 않으면 신분을 장담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할당된 교통스티커를 발부하듯 매일 광주로 보내야 할 폭도들의 인원도 할당되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어촌 마을의 파출소장이었던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이었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 직분을 떠나서도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파견 한 달 만에 그는 앞길 창창한 경위 계급장이 달린 경찰복을 스스로 벗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였고 그 해 첫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철근공이 된 건 그 후로도 십 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뒤였다. 태어나 줄곧 구김 하나 없는 삶을 살다 엘리트 코스로 경찰 간부까지 되었던 그에게 이 사건은 남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

1956년 대전에서 육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남기방씨의 할아버지는 천석꾼이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그의 아버지는 토목회사와 건축자재 대리점을 차려 사업을 단단하게 성장시켰다. 유치원을 졸업한 그해 형과 누나들의 전철을 따라 그도 서울로 올라갔다. 부모님은 자식들 교육을 위해 오래전 서울에 따로 집을 얻었다.

당시 3대째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탈 한번 없이 우등생으로 살았다. 집과 학교와 교회가 그의 유일한 동선이었다.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내내 우등생이었다가 경찰 간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였다. 어려서부터 줄곧 그는 가난이나 어려움이란 단어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

첫 발령지였던 서천의 어촌마을에서 지금의 아내도 만났다. 스물다섯의 앳된 파출소장이었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아내의 첫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주며 싹튼 사랑이었다. 경찰이 되고 일 년 만에 대학생이 된 아내와 결혼했다. 이듬해 큰아들을 낳았다. 경찰을 그만둔 다음 해에 작은아들을 낳았다. 아내는 몇 년 뒤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60억 빚더미에 앉다

그의 첫인상은 거친 육체노동자가 아닌 은퇴를 앞 둔 교장선생님이었다.
 그의 첫인상은 거친 육체노동자가 아닌 은퇴를 앞 둔 교장선생님이었다.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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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경찰복을 벗었을 때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그깟 경찰월급보다 훨씬 수입이 좋은 사업을 물려주기를 원했다. 미련 없이 그가 경찰을 그만둘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형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동생은 한의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흔쾌하게 사업의 한쪽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아버지가 키워 온 토목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매일 최루탄과 화염병이 공방을 벌이던 시절이었지만 건설 경기는 큰 물결을 타고 거침없이 치닫던 호시절이었다.

그의 회사도 그 물결에 올라탔다. 신탄진에서 추풍령 구간 도로 재포장, 32개 탄약고 벙커 시공, 강원도 정선 도로 확장 등 굵직한 공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당시 돈으로 매달 일억 원이 넘는 돈이 순수익으로 쌓여갔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내가 아이들을 위해 집안에 들어앉은 때도 그즈음이었다. 돈 걱정이 없었고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했다.

사업이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한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부터였다. 전국적으로 건설업이 하향하는 추세였다. 그가 올라탔던 큰 물결이 큰 굽이를 만났다. 삼십 대 후반, 아직 중년에도 끼지 못할 만큼 젊고 푸르던 나이였다. 주로 해왔던 토목공사가 일감이 줄어들면서 대전 시내 재개발 단지나 수영장 등으로 공사영역을 좁혀가던 중이었다.

지역에서 높은 도급순위를 자랑하던 건설 회사들이 줄도산하면서 공사비로 받았던 어음이 종이쪼가리가 되었다. 부도를 맞았다. 자그마치 60억 원이었다. 종이쪼가리가 된 어음을 다시 돈으로 되돌려야 할 몫이 그에게 떠넘겨졌다. 지불받아야 할 돈은 지불되지 않았고 지불해야 할 돈은 지불되어야 했다. 하지만 60억 원이라는 돈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깊은 좌절과 상실에 빠졌다.

그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가진 재산을 빼돌리고 종이쪼가리가 될 어음을 발행해서 고의부도를 내는 것과 가진 것을 모두 털어 빚잔치를 하는 것이었다. 처음 선택은 그가 살고 채권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선택은 채권자를 살리고 그가 죽는 것이었다. 양심을 팔고 재산을 지키느냐 양심을 지키되 파산을 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그와 가족들의 명운이 달린 결정이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전자가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세상은 피도 눈물도 없이 '가진 자'로 살아남은 자에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성공'이라는 화관을 얹어주던 시절이었다.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성공이라는 화관보다 그의 마음은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족들을 향해 있었다.

남기방씨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평생을 개신교인으로 살았고 그때까지 인생에 일탈 한번 없이 자신의 인생을 가꾸어왔다. 아내와 행복했고 두 아들을 반듯하게 키워내고 있었다. 그는 영악한 사업가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고민의 정점은 양심을 지켜내는데 필요한 용기였다. 이후 자신과 가족들에게 닥칠 암담한 운명은 불을 보듯 확실한 미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를 움직인 건 두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고 싶은 강한 부정(父情)이었다.

결심을 굳힌 그는 가지고 있던 재산에 팔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정리했다. 30억 원이었다. 변호사인 사촌 형을 동석시킨 자리에 채권자 스물다섯 명을 한날한시에 불러들였다. 그 돈 30억 원을 내놓고 모든 사정을 다 이야기했다. 재산을 빼돌리고 부도어음을 발행해서 자기 살길만 찾는 세상의 관행에 익숙해 있던 채권자들은 처음에는 의아했고 곧 감동했다. 빚잔치는 순조롭게 끝났다. 모든 채무는 채권자들의 동의하에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는 파산했다.

2년의 허송세월 덕에 만난 기회

이십 대 후반 경찰복을 벗고 다른 길로 꺾어 들었던 인생의 변곡점을 사십을 목전에 두고 다시 맞았다. 공통점이 있었다. 광주에서 경찰복을 벗었던 이유도, 대전에서 빚잔치를 벌였던 이유도 모두 양심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참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는 아름답게 파산했지만 이어진 몇 년의 삶은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는 일 년을 스스로 집에 가두고 두문불출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사업을 망쳐버렸다는 자괴감과 사업실패에 따른 상실감은 예상보다 크고 깊었다.

그가 바로 돈벌이를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힐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보내주는 넉넉한 생활비가 있어 가능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여전히 사업체를 건사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활비는 아내와 아이들이 먹고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일 년을 낚시만 다니면서 그는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어쩌면 부자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는 내상이 깊은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돈벌이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2년 동안이나 모든 관계를 끊은 채 칩거를 하고, 낚시만 다녔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60억 원이란 돈이 그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내팽개칠 만큼 큰 금액이었을 수도 있다. 그 상실감을 이겨내려면 2년이란 시간이 꼭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가 그렇게 상실의 시간을 무력하게 보내고 있던 그때도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집 밖으로 등도 떠밀지 않았고, 불만스러운 어투로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내는 기다렸고 또 기다려주었다.

빚잔치 후 파산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 다시 낚시로 세월을 보내기를 2년이었다. 삼십 대를 지나 사십 대 초반이었다. 점점 그렇게 피폐한 일상이 이어지고 그가 폐인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철근 오야지(책임자를 뜻하는 일본어)' 집사님이 그에게 "그러지 마시고 저 일하는 데 와서 심부름이라도 하시죠"라고 제안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시 고쳐 잡고 무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생활비를 보내주었던 아버지에게 더 의탁할 염치는 없었다. 혼자 힘으로 무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토목회사 사장, '철근 오야지' 되다

철근노동은 건설현장에서 강도가 센 업종의 대표격이다.
 철근노동은 건설현장에서 강도가 센 업종의 대표격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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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만 해주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공사현장에 나가 철근을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벼운 심부름이라는 그 일은 들면 휘청거리는 8m짜리 철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르는 일이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철근을 들면서도 했고 집에 와서도, 아침에 일을 나가면서도 했다.

매일 현장을 나가면서 매일 그만둘 생각을 했지만, 매일 그만둘 생각을 하면서 매일 현장에 나가고 매일 철근을 들었다.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다른 일은 물론이고 피폐한 그의 인생도 회복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극한의 노동은 자기와의 싸움이 되었다. 3개월이었다. 오로지 철근 나르는 일만 했던 시간이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 철근을 가공하는 일이 주어졌다.

4만 5천 원으로 시작된 일당이 한 달이 지나면 몇천 원씩 불어났다. 신기하게 조금씩 올라가는 일당이 심부름만 하자 했던 그의 마음을 철근 일에 잡아당겼다. 이게 되는 일이구나, 이렇게만 기공이 되면 10만 원 일당도 곧 받겠구나, 그 일당이면 아버지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가족들을 살게 하겠구나, 하는 희망이 일어났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파산을 선택할 만큼 영악하지는 못했지만 우등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던 영민한 사람이었다. 희망을 보았던 철근 일에 미래를 걸고 독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그는 일의 전체적인 원리를 터득했다. 그는 업계의 일반적인 흐름보다 훨씬 빨리 기공이 되었고, 일을 시작한 지 불과 5년 뒤 철근 오야지가 되었다. 그의 성실함과 영민함이 회사 관리자의 눈에 띈 결과였다.

오야지가 되자 그의 영민함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현장에서 건물구조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시간과 물량을 단축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시도했고, 성공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건 돈이 되어 돌아왔다. 일은 꾸준하게 넘치게 밀려들었다. 2년 절치부심한 끝에 단순한 심부름으로 시작된 철근 일이 사업이 되었다. 오직 몸과 기술로 하는 단순 담백한 사업이었다. 현장에서는 책임자라 해서 거들먹거리지 않고 동료들과 같이 땀 흘리며 철근공으로 일했다.

한때 운영했던 토목회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가족들 생활을 어려움 없게 유지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내는 변함없이 옆을 지켜 주었고 아이들은 큰 문제 없이 잘 자라주었다. 집을 늘렸고 노후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 재산도 넉넉해졌다.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의 변곡점을 힘겹게 넘고 새로 맞이해서 이어져 나가던 철근 오야지 일이 새로운 전기를 맞은 건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일을 해주었던 업체가 이번에도 부도가 났다. 받아야 할 돈이 팔천만 원이었다. 대부분 인건비였다.

받을 수 없는 돈이 되었다. 그동안 큰 어려움 없이 현장을 누볐지만 그는 이제 오야지 생활을 정리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받을 수 없는 돈을 포기하고 가진 돈으로 인건비를 내주었다.

십 년 세월 동안 꾸준하게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경제적 타격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오야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노동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소문을 듣고 그가 찾아간 곳은 건설노조 철근 분회였다. 함께 일하던 동료 다섯 명과 함께였다. 5년 전이었다.

60대 육체 노동자, 철근학교 교장을 꿈꾸다

몸을 써서 하는 노동은 이제 그의 삶이었고 인생이었다. 기질적으로 타고 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노조에 들어가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불법하청이 무분별하게 벌어지고 건물 완성도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당장의 이익만이 중요한 건설현장이었다. 그 안에서 육체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노동과 현실을 무시한 일당에 늘 쫓겼다. 게다가 그 현장마저 값싼 외국노동자들이 밀려들면서 한국인 노동자들은 들어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암담한 현실을 바꾸어야 하는 건 그 현장에서 살아나가야 할 노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노조에 들어가니 박봉의 월급으로 희생하는 집행부가 눈에 보였다. 초창기 노조원도 별로 없어 활기 없이 침체된 분위기도 그에게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아이들도 다 키워냈고 먹고 살 만큼 여유 있는 가정경제가 오히려 그의 적극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5년 전 10명도 안 된 인원으로 출발했던 분회원이 가지를 뻗어 나가 이제 몇백 명이 되었다. 회원이 적게는 8명부터 크게는 40명까지 있는 분회가 열다섯 개가 되었다. 처음에는 현장을 쫓아다니면서 외국노동자만이 아닌 한국노동자들에게도 일거리를 달라고 시위하고 노숙 투쟁을 했지만 이제는 매년 '임단협(임금·단체협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조원들이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걸어 나온다.

남기방씨는 지금 전국건설노조 대전세종지부 수석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현장에 나가 철근 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삼십 대 후반 사업이 망해 빚잔치를 하고 겪은 2년의 칩거 기간을 그는 꼽았다. 그의 말이 맞지만 그는 그 시절 동안 2년 뒤 육체노동자로 나설 미래를 담금질한 셈이 되었다.

그에게 이십 년 철근 노동자로서의 삶은 천석꾼 집안의 아들이 아닌 순전히 자신의 노동으로 자식들을 먹이고 성장시킬 수 있었던, 그가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당당하게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마중물이었다.

정확하게 칠십이 될 때까지 현장에서 철근을 놓지 않겠다는 그가 꿈꾸는 내일은 지부 내에 철근학교를 세워 젊은 미래의 젊은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날이다. 그는 그 꿈을 위해 '오야지' 때 사두었던 철근 가공 기계를 팔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계획한 대로라면 그 기계는 곧 지부건물 내 훈련학교 교실에 설치된다.

그 날은 아마도 그가 지나온 인생 중 그의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꾸게 될 몇 개의 변곡점 중 하나로 먼 훗날 그의 인생에 기록될 것이다.

철근학교를 만들고 싶은 마지막 꿈이 있다. 그의 인상대로 그는 철근학교 선생님이 될 예정이다.
 철근학교를 만들고 싶은 마지막 꿈이 있다. 그의 인상대로 그는 철근학교 선생님이 될 예정이다.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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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의 꿈은 철근학교 선생님이다. 올해 예순두 살인 남기방씨는 요즘도 노조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매일 현장에 나가 철근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바란 대로라면 그가 철근노동자로 살아갈 시간은 아직 8년이 남아 있다. 그 시간 동안 철근학교는 세워지고 어떤 젊은 노동자는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노동으로 풍요롭게 가꾸는 법을 그에게서 배운 후 현장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갈 것이다.


태그:#철근공 , #노동자, #노가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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