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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18. 부산. 9,000여 명이 수용돼 있었던 Camp1 포로수용소. ⓒ NARA
"전쟁에는 2등이 없다"

나는 학훈단(현 학군단) 7기로 대학 3, 4학년 때는 후보생으로, 육군 소위로 임관 뒤에는 보병학교에서 기초 군사교육을 아주 '오지게' 받았다. 그 즈음은 1.21 사태 직후였기 때문에 군사교육도 무척 강화됐고, 병사들의 복무기간도 연장됐던 시기였다. 그때 교육 중 교관이나 단장 또는 부대장으로부터 가장 귀에 익도록 들은 말이 바로 "전쟁에는 2등이 없다"였다.

사실 그 말은 맞다. 전쟁에서 2등은 패배를 뜻하는 말로, 전쟁에서 지면 병사들은 죽거나 적군의 포로가 되기 마련이다. 당시 가장 힘들었던 군사교육은 보병학교에서 받은 2주간의 특공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훈련이었던 '도피 및 탈출'이라는 교과는 적지에서 탈출하는 훈련이었는데, 탈출 도중 길목을 지키는 대항군에게 포로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한밤중이었는데 전남 장성군 소재 불태산을 넘어야 귀대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분대원들이 집단적으로 탈출했지만, 곧 대항군을 만나자 순식간 뿔뿔이 흩어져 각개동작으로 귀대할 수밖에 없었다.
1950. 9. 20. 유엔군이 포로들을 벌거벗긴 뒤 검색하고 있다. ⓒ NARA
컴컴한 밤중 600미터 넘는 불태산을 넘어 귀대하는 코스였는데 나는 그날이 제삿날이 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나는 용케 포로로 잡히지 않고 이튿날 새벽 귀대할 수 있었지만 전우 가운데는 포로로 붙잡혀 무척 곤욕을 치른 이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강도 높은 특공 훈련으로 그때 두 동기생이 훈련 도중 사망했다. 나와 출신 대학은 달랐지만 홍익대 출신인 방송인 이상벽씨, 고 이두식 화백 등이 그때 그들의 희생비를 교장 옆에다가 세운 바 있었다.

포로는 적군에게 잡히는 그 순간부터 인권이란 게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포로 가운데는 골짜기로 끌려가서 처형당한 이가 무척 많았다. 피차 전투 중에 포로는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이요, 부상자는 더욱 그랬다.
1950. 8. 18. 유엔군 병사들이 총상을 입은 포로에게 부대배치에 대한 정보를 묻고 있다. ⓒ NARA
아군이 아군을 죽이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의용군으로 징집된 후 탈영해 귀가 중 유엔군 포로가 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된 송관호씨의 증언이다.

"우리 대열은 (함경남도) 영흥읍을 빠져나와 북으로 향했다. 길을 걷는 동안 점차 철길에서 멀어져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고개로 올라가는데 인민군 트럭 한 대가 전복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는 도와 달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 수십 명이 달려들어 차를 바로 세웠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인민군 전사들이 차에 치어 신음하는 부상병을 치료하기는커녕 바로 그 자리에서 총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군을 재촉하여 원산 방향으로 전투를 하러 간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아군이 아군을 죽이는 모습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이유를 들어본즉, 사랑하는 전우이지만 중상을 당한 그들을 후송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놔두면 적군에게 포로가 될 것이므로 불가피하게 죽인다는 것이라고 했다." - 송관호, 6.25전쟁 수기 <전쟁포로>, 56~57쪽
1950. 9. 22. 안양. 투항한 인민군 포로들이 유엔군 앞에서 이마를 땅에 박고 있다. ⓒ NARA
포로수용소
 
인민군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 현역 시절 대대장 안아무개 중령은 소대장들에게 걸핏하면 군화 발길질을 하거나 권총을 휘두르며 협박했다.

"난 6.25 때 비실비실한 부하들을 이 권총으로 즉결 처분했단 말이야."

그는 그 말을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며 대대 내 초급 장교들을 압박했다.

제네바 협정에는 포로에 대한 대우가 명문화돼 있다. 전쟁포로는 인도적으로 대우를 받으며, 인간적 존엄이 손상돼서는 안 되며, 음식과 구호품을 제공받으며,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압박을 가해서는 안 되며, 모욕과 공중의 호기심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보복조치도 금지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포로에 대한 규정은 어디까지나 문서상에 기록된 협정일 뿐이다.
1950. 12. 1. 부산. 포로수용소 기간요원들이 포로들의 신상명세서 작성용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NARA
한국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포로가 발생했다(전쟁포로는 유엔군 측이나 공산군 측 쌍방 모두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여기서는 주로 유엔군 측 포로 얘기만 한다. 그 주된 이유는 공산군 측은 자료부족 때문이다). 유엔군 측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 8일 대전형무소에 설치된 대전 포로수용소였다.

하지만 곧 전선이 밀리자 7월 14일 대전포로수용소는 폐쇄되고, 포로들은 대구로 이동됐다. 효성초등학교에 '100 포로수용소'라는 곳이 설치됐다. 하지만 전선에서 다시 유엔군이 밀리자 8월 1일 부산 영도 해동중학교에 포로수용소 본소가 설치되고, 기존 대구 포로수용소는 임시 포로수집소(또는 포로집결소)로 운영됐다.

부산 포로수용소에는 날마다 입소하는 포로가 부쩍부쩍 늘어났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의 사기가 극도로 떨어졌던 다부동 전선에서 집단으로 투항했다. 유엔군 측에서는 늘어나는 포로를 기존의 시설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수용소를 동래에 건설했다(거제리 임시 포로수용소). 그런 뒤 8월 12일 영도 포로수용소를 폐쇄하고 거제리의 부산포로수용소로 통합했다.
1950. 8. 18. 부산 근교의 임시 포로수용소. ⓒ NARA
1951. 9.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식사시간 포로(P. W) 취사병이 동료들에게 배식을 하고 있다. ⓒ NARA
죽음의 행진

195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중순 사이, 어떤 날에는 하루 2만여 명의 인민군 포로가 입소하기도 했다. 그러자 스물네 명을 수용하던 부산 포로수용소 천막 막사에 마흔 명 이상으로 늘어나 포로들이 누울 자리조차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포로들 사이에는 한때 전우였다는 연민의 정은커녕 서로를 증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산 포로수용소의 경우,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인원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매끼 일명 '훌라라'라는 질 나쁜 안남미 밥이 나왔는데 '후' 불면 날아갈 정도로 찰기가 없었다.

그런 밥조차 끼니마다 식판에 서너 숟갈을 담아 배식됐는데, 한 사람이 3~4인 분은 먹어야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포로들은 늘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안에는 포로들 간 밥그릇 싸움이 점차 치열하게 벌어졌다.
1950. 8. 18. 유엔군 측 조사관들이 인민군 포로들의 신상 조사를 하고 있다. ⓒ NARA
1950. 10. 미 해병대들이 생포한 포로들을 논길로 인솔하고 있다. ⓒ NARA
초기 부산 포로수용소 포로들은 오직 먹는 것밖에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밥을 조금 더 얻어먹고자 동료의 전과를 고자질하거나 군사기밀을 유출하는 밀고자도 속출했다. 포로수용소에는 밥뿐 아니라, 물조차도 귀해 포로들은 밥그릇을 씻은 물로 세수까지 했다.

포로들은 영양실조 상태에 놓였고,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상처를 제때 치료받지 못한 탓으로 하루에도 10~20명씩 죽었다.

처음에는 포로수용소 내 동료가 죽어나가자 같은 포로로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하지만 겨울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추워지자 포로들은 죽은 동료의 옷을 몰래 벗겨 껴입을 정도로 인간의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포로수용소 내 포로들은 하루하루 '죽느냐, 살아남느냐'는 처절한 싸움을 이어갔다.
1950. 9. 17. 유엔군들이 인민군 포로를 연행하고 있다. ⓒ NARA
포로수용소 초기에는 그 어느 누구도 수용소 측에 '동료들이 왜 죽어나가는가'라고 항의할 줄 몰랐다. 그때 포로들에게 수용소 생활은 곧 죽음의 행진과 같았다.

사람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 '자비', '긍휼', '사랑'과 같은 거룩한 말은 포로수용소 안에서는 배부른 이야기였다. 수용 한계를 넘긴 포로수용소는 차츰 포로들 간 서로 반목과 증오심이 이글거리는 원시 야만 사회로 변해 갔다.
1950. 8. 12. 유엔군에게 투항하는 인민군들. ⓒ NARA
완장의 위력

지옥과 같은 포로수용소에서 그래도 포로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곧 자기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대부분 포로들은 자신이 1~2주일 뒤면, 늦어도 한두 달 후면, 그리던 가족의 품에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정전협상은 포로들의 기대와는 달리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훗날을 기약할 수 없었고, 전선에서는 지루한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포로수용소에는 포로들이 나날이 꾸역꾸역 입소했다.
1951. 1. 22. 부산 포로수용소 기간병요원이 포로들에게 이를 박멸하고자 사타구니에 DDT를 살포하고 있다. ⓒ NARA
유엔군 측은 포로들이 계속 늘어나자 하는 수 없이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옆에 새로 철조망을 치고는 제2수용소로부터 제6수용소까지 증설했다.

그런데도 계속 입소하는 포로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유엔군 측은 부산 근교 수영에 '제1, 제2, 제3 수용소'와 부산 가야리에도 '제1, 제2, 제3 수용소'를 증설했다. 1950년 12월 말 부산 거제리, 수영, 가야리 일대의 포로수용소에는 모두 13만 5000여 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유엔군 측은 포로 수용이 장기화되자 마침내 제네바 협정에 따라 수용소 내 포로들의 자치조직을 허용했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내에는 새로운 지배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친공, 반공으로 가르는 구별도 없었다. 주로 남쪽 의용군 출신들 가운데 영어를 잘하는 포로들이 포로 자치조직을 장악했다. 말이 자치조직이지 사실은 포로수용소 측이 포로 가운데 일방으로 간부들을 임명했다.
1951. 1. 12. 부산. 포로수용소의 한 인민군 여성 포로. ⓒ NARA
그러다 보니 포로수용소 측에 고분고분하거나 협조적인 포로가 자치조직 간부로 임명되기 마련이었다. 그때 포로 자치조직의 최고위 간부는 여단장으로, 그 아래에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분대장, 경찰대, 감찰대 등이 있었다.

포로 자치조직 간부들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온갖 특권을 누렸다. 일반 포로는 간부의 옷을 다려주는가 하면, 간부는 작업에서도 열외였다. 또 자치조직 간부는 배식도 일반 포로보다 절반을 더 받는 데다가 줄을 서서 타먹지도 않았다. 심지어 취사병들이 내무반으로 가져다주는 밥을 먹었다.

이들은 일반 포로들에게 돌아갈 보급품도 중간에서 가로챈 뒤 철조망 밖으로 빼돌렸다. 대신 술과 담배, 미제 시계, 금반지와 같은 사치품까지 수용소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치조직 간부들이 찬 완장의 위력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그래서 간부들의 완장은 일반 포로의 선망 대상이요, 또한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1950. 8. 9. 나이 어린 인민군 포로들. ⓒ NARA
* 다음 회는 '거제포로수용소 및 휴전회담' 편입니다. 이 연재는 30회로 끝날 예정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포로수용소 편과 여러 문헌에 나오는 기록, 그리고 포로수용소 출신 인사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 등을 종합해 작성됐습니다.

필자가 2004, 2005, 2007년 세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입수한 한국전쟁 사진 자료 및 포스터는 눈빛출판사에서 『한국전쟁 Ⅱ』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태그:#한국전쟁, #전쟁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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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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