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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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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¹ 올해 1월 1일을 기점으로 나는 드디어 서른 살이 되었고, 여전히 무직이었다. 서른 살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나를 보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신상에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하다고도 느꼈다.²

그때도 나는 평생 노동으로 인정받지 않는 노동을 해온 부모님 덕택에 복지 혜택을 받고 있었다. 물론 내게는 지원금 같은 게 한 푼도 직접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가끔 아파서 병원을 갈 때면 진료비로는 1000원, 약값으로 500원을 내밀면서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물론 나는 성년이 되고부터 내내 노동을 하고 있었다. 여가 시간은 적었다. 해외를 가 본 일은 없었다. 돈 안 주는 글도 열심히 썼다.

나는 10대 시절부터 직업으로서의 작가를 선망했고, 학부 때 문학을 전공했다. 내가 일찌감치 들여다본 작가로서의 삶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것이었다. 동유럽의 호텔방에서 몇 년씩 글을 쓰는 삶. 혹은 김영하이거나, 황석영이었다.

이 나라 저 나라를 초대받아 대륙과 해양을 횡단하고, 좋은 음악과 음식 취향을 정립할 수 있는 삶. 그들의 삶은 멋져 보였다. 화려한 삶에 대한 선망이 작가가 되고 싶다는 목표의 본질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만 가난하고 싶은 게 가장 큰 꿈이었던 10대가 선망하기에는 썩 괜찮은 삶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수업을 통해 작가들의 삶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한 작가는 수업하는 교실 안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마음에 드는 (명목상은 '소설이'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을 교수실에 불러서 술 한 잔씩 따라 주고 노래를 듣기도 했다. 그는 은퇴하고 공기 좋은 곳에 지은 전원주택에 살러 갔다.

또 다른 작가는 나이가 젊은데 두 권쯤은 '요즘 출판 시장 기준으로' 잘 된 소설집이 있었다. 맡은 수업에 1시간씩 지각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복층 원룸에 좋아하는 물건을 쌓아 두고 산다고 자랑했다. 떠올려 보면, 그가 생계형 원룸 거주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20대 내내, 나는 그들의 세계에 편입되는 법을 궁리했으나 실패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³ 대기업 공채도, 언론고시도 더 이상은 응시할 수 없는 나이. 절친했던 친구는 자신도 계약직인 처지면서, 신입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싫다고 했다. 자기도 여자지만 여자를 뽑는 게 회사에게 불리할 것 같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얘기를 왜 내 면전에 했었는지,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태연한 척했지만 오래 막막했다.

나는 어쩌다 보니 공저인 책이 한 권 있는 작가가 됐다. 이 책이 끝은 아닐 것이고, 앞으로도 글을 쓰면서 살 생각이다. 저술 노동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이 앞서 엿보았던 작가들의 삶처럼 화려한 것이리라 꿈꾸지는 않는다. 나는 월세방에 산다. 나는 이번 달 초에 일본 여행을 갔다 왔지만, 그러고 나니 생활비가 모자란다. 이제, 물론 나는 알고 있다.⁴그들이 모두 남성 작가였다는 걸.

지난해 5월의 일이다. 최영미 시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이 연간소득 1300만 원 미만 무주택자가 받는 근로장려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때 시인은 시간 강의 두 개만 해도 한 달 생활비가 된다며 대학의 시(詩) 강의 자리를 달라고 아는 교수들에게 "떼를 썼"지만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국문학 석사학위가 없기 때문이란다.

어디에도 없는 자리, 그녀는 운이 나빴던 걸까

최영미 시인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인 것일까
 최영미 시인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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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무수한 석사 친구들이 엿 바꿔 먹으려도 바꿔 먹을 데가 없는 게 학위인데 그게 뭐라고, 싶었다. 그 글을 쓴 후 세간의 입방아에 오른 걸 '부작용'이라고 표현했지만, 애써 궁핍한 상황을 털어놓은 덕분에 그 이후에는 이곳저곳에서 종종 강연 요청이 들어온 모양이다. 대학 강의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나는 문예창작학과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그녀가 시를 가르치는 자리를 달라고 했다면 필시 창작 강의일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나는 창작 강의가 주를 이루는 문창과에 다니면서 많은 강사와 교수를 만났다. 그중에서는 국문학이나 문예창작학 석박사 학위가 없는 경우도 분명 있었고,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학위를 가지고 교수 자리에 있기도 했다. 당시 학위를 제한하지 않는 예외 조항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성'이 인정되는 경우였는데, 첫 시집만 54쇄가 팔려 한 시대를 풍미한 최영미 시인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인 것일까?

네 해 전을 기준으로 한 모교 정교수의 평균 연봉은 1억463만 원이었다. 재작년 기준 문인 중 예술활동 관련 수입이 없는 사람이 절반에 가까우며(49.2%), 연간 500만 원 미만을 버는 사람이 34.6%다. 반면 예술활동으로 연 5000만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은 전체의 0.1%다. 예술활동 밖에서조차 수입이 없는 사람 역시 37.9%에 달한다. 예술 이외의 활동으로 5000만 원 이상을 버는 사람은 5.6%이다.

예술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500만 원 미만인 경우, 여남 비율은 각각 59.8%, 50.8%로 남성에 비해 여성이 10%포인트 더 많다. 고수익(연 4000만 원 이상) 집단을 성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두 배가 넘게 차이 난다. 물론 적은 쪽이 여성(4.3%)이다(문화체육관광부 예술인실태조사 2015).

학교를 다니면서 들은 수준 미달의 강의가 꽤 있었다. 임용 때 운 좋게 들어와서 버티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수업이 지루해 졸고 있는 학생들을 교실 문밖으로 내보내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수업 시간을 한 시간 지각하는 게 매사 양반이고 "내가 홍대 가면 너네 또래의 바텐더들이랑 술 먹는다"는 별로 재미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는 강사도 있었다. 물론 비즈니스맨처럼 강의계획서를 짜 와서 아주 성실하게 가르치는 수업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 덕에 나는 졸업할 즈음에는 이 학과가 학문 분과로서 존속해도 되는 학과인지 다소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모교 대학원에 안 갔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업에서 뭔가를 배웠다는 뿌듯한 기분으로 교문을 나설 수 없었다. 굳이 문예창작'학'씩이나 가르쳐서 나 같이 느끼는 학생을 만들어 낸다면 그건 뭔가 잘못된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학문의 존폐를 논하기 전에, 나는 "아버지의 언어로 읽고 쓰는 일이 숨이 막혔"던 것이다.

참 우연이다. 앞서 적은 '수준 미달'의 수업을 한 교수들이 모두 남성이었다니. 아니, '수준 미달'의 여교수 수업을 접할 기회라도 많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강사들 몇 명을 제외하곤 여자 정교수의 창작 강의는 소설과 시에서 각각 한 번씩 들을 수 있던 게 전부였다. 또 우연찮게도, 그 수업들이 내가 들은 창작 강의 중 제일 좋았다.

어딘가에서 반드시 최 시인에게 창작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 자리를 줬어야 했다는 말은 아니다. 결국 공부할 만한 학문을 찾아 대학원에 진학한 동문이 내게 말했듯 "(교수들이) 엄연히 학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예술가 연기하는 게 보기 좋지 않았다"는 의견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녀도 시창작 전문가가 맞다.

더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다른 데 있다. 누구에게는 기회가 주어졌고,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예창작학과에는 여학생들의 비율이 늘 절반 이상이거나, 혹은 훨씬 더 높다. 그러나 과거 홍보팀에서 3년쯤 동문들의 진로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했을 때, 막상 작가로 데뷔하는 비율을 살펴보니 성비가 비슷하거나 남학생들이 더 많은 것으로 보였다. 왜 그랬을까? 데뷔한 이후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글쓰기를 하는 여성 작가를 떠올리면, 찾기 어렵다. 왜 그랬을까? 학과 내 정·부교수 중 여성 교수는 단 한 명이었다. 왜 그랬을까?

최영미'들'이 조롱받지 않는 사회를 바란다

최영미 시인의 페이스북 글. 이 글 하나로 최영미 시인은 하루아침에 '갑질 시인'이 돼버렸다.
 최영미 시인의 페이스북 글. 이 글 하나로 최영미 시인은 하루아침에 '갑질 시인'이 돼버렸다.
ⓒ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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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은 지난 10일 지금 살고 있는 월세 계약이 끝났다는 글을 썼다. 거듭 적는데, 최 시인은 부수로 5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시집의 작가다.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하면 평생 인세로 먹고살며 화려한 삶을 살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인은 집이 없어서 "이사가 지긋지긋"하다고 적었다.

시인은 공교롭게도 나의 어머니와 동년배다. "내가 좀 더 배우기만 했어도 글을 썼겠다"는 내 어머니. 어머니도, 어머니의 딸인 나도, 서른 살의 딸이 있을 만한 나이의 시인도 이 나라에 가진 집이 없다. 우리가 몇 년 단위로 계약하며 정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의 지겨움을 겪어야 하는 사회. 이 사회는 괜찮은 것일까?

시인은 호텔에서 글을 쓰던 미국 시인 도로시 파커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좋아하는 호텔에서 강연과 책모임도 하고 홍보를 하면서 1년간 살고 싶다는 제안을 호텔 측에 넣었다고 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17년 전 한 독자에게 "정론직필"할 것을 주문받은 <중앙일보>는 이번에 앞장서서 '단독'을 달고 사건을 보도하며 이슈몰이하기에 바빴다.

기사는 397번이나 공유되었다. 시인의 이름은 여기저기 "갑질", "허영", "철없는", "분수를 모르는" 같은 불명예스러운 표현과 함께 팔려나갔다. 기사를 쓴 언론인의 시각이 정말 거기까지인지, 기삿거리가 그리 없는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현실이 이렇게 된 걸 보니 그런 상황인가 보다.

글 써서 잘 된 작가들을 떠올려 본다. 머릿속에 몇몇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저서 인세로 먹고사는 수준의 작가는 인문과학·사회과학·문학 전반 합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이 출판계 근방에 있으면서 들은 얘기다. 대부분 작가는 제 밥벌이를 못 한다는 얘기다.

분명 예술계 전반은 몹시 열악하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⁵ 글 써서 잘 된 '여류' 작가만을 떠올린다면, 앞서 생각났던 사람들 중 대부분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여류' 작가 같다는 표현은 문학 창작 수업에서 작품을 혹평할 때 쓰는 말이다. 우연일까?

여성 작가지망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강한 역할모델이 너무 적다. 그래서 나는 최영미 시인이 호텔에 초청받아 글을 쓰고 그것으로 조롱받지 않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작가로서 사는 여성의 삶을 떠올릴 때 너무 비참한 것들만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잘 됐으면 좋겠다.

시인을 비웃고 싶은 사람들. 예술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사람들.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시를 썼으나 자신의 집을 못 가진 '여류' 시인이 평소 가지던 바람대로 호텔에 머물기를 청하니, 기회라도 잡은 듯이 그걸 주제넘은 여자의 허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그들은 최고은이 죽고 나자 가난한 예술가를 동정했다. 아, 불행한 사람들, 병약한 사람들, 빈사의 사람들 곁을 떠나서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그대에게 말하니, 일어나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⁶

여전히, 최영미에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여전히, 최영미에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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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문헌
1) 최승자, 〈삼십세〉, '이 시대의 사랑'
2)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첫 문장
3)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4) 위의 책
5) 위의 책
6)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끝 문장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홍혜은씨는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의 저자입니다. 이 글은 홍혜은씨가 개인 SNS에 올린 글을 일부 보완, 수정한 것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최영미, #여성문인, #문예창작, #페미니즘,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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