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

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는 청년 프로그램으로 스스로 규정하지만, 이 프로그램 속에 사실 진짜 청년은 없다. 다만 청춘으로 타자화된 이들만 있다. ⓒ 온스타일


지난 8월 1일, 온스타일은 <열정 같은 소리>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청년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주제에 대해 공감하고 분노하며 헬조선에 사이다를 선사하는 프로그램'이란다. 설명만 들으면 기성세대와 비교하면 약자라고 할 수 있는 20대 청년들을 대변해주는 프로그램 같아 보인다.

그러나 <열정 같은 소리>는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간판 아래 청년을 타자화한다. 청년의 고통은 기성세대의 시선과 가치체계에 들어맞게끔 왜곡되고, '청춘'이라는 이름표 아래 일반화된다.

청춘을 타자화하는 프로그램

 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

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의 패널들 중 정말로 청년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 온스타일


타자화란 특정 대상을 '다른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행위다. 이 '다름'에 대한 강조 때문에 타자화의 현상에서 '공감'은 '동정'으로 변질된다. 사람은 자신과 타인이 비슷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다. 이때 사람은 그 '같음'을 징검다리 삼아 타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역지사지의 체험은 '너'와 '나'를 '우리'로 묶어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부여한다. 그러나 타자화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역지사지가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공감 대신 동정이 일어나는데, 동정에는 대상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 그래서 동정하는 사람의 편의에 맞게 대상의 아픔을 쉽게 그리고 단순하게 재단한다.

또한, 타자화는 '대상과 자신의 다른 점'으로 상대를 파악하고 다른 개별적 특성은 무시한다. 특히 타자화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위계가 성립할 때, 타자화된 대상은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 당한다. 결국, 대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선택, 표현할 권리를 잃어버린다.

<열정 같은 소리>는 이러한 타자화의 단점을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일단 출연진 중에 현시대의 청년의 삶을 사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메인 MC는 허지웅으로 소위 40대 '아재'다. 그 외에 출연하는 8명의 패널 중에서도 20대는 달랑 두 명이다. 그조차도 가수와 모델로, 학점과 토익, 취업에 허덕이는 보통 청년들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런 패널 구성은 기본적으로 '청년이 아닌 사람들이 청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출연자들이 청년들에게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청년들의 삶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경우 이를 바로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청년의 삶을 청년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없다면 타자화가 일어나기 좋은 구도다.

아니나 다를까, 패널들은 자신의 경험과 입장에서 '자신과 다른' 청년들의 삶을 바라본다. 이러한 시선은 청년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감정의 기반을 동정에 두고 있다. 때로는 이 동정이 폭력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지난 5일 방송의 주제는 청년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이었다. 게스트로 나온 부동산 중개업자는 청년들이 자주 산다는 3평짜리 방을 보여줬다. 침대 옆에 변기만으로도 꽉 찬 화장실이 있는 것을 보면서 허지웅은 '저게 사람이 사는 곳이 맞느냐'고 되묻는다. 중개업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패널들은 경악하고 '청춘의 누군가는 살고 있을 것'이라는 자막이 깔린다.

결국 이 프로그램에서 청년은 '내'가 아닌 '누군가'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시청자이자 스물셋 청년인 나는, 졸지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는 불쌍한 누군가가 된다. 그들의 탄식과 표정을 보고 난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까. <열정 같은 소리>는 정말 그런 공간에 살고 있는 청년이 느낄 모멸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제작진이 내놓는 프로그램 콘텐츠는 이러한 폭력성을 증폭한다. 프로그램 전반에서 청년의 아픔은 중요 소재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 아픔이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이유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제작진이 그다지 고민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청년의 입장에서.

청년들에 대한 공감이 행해졌다면 청년들의 입장에 서서, 청년들 스스로의 가치관과 문화로 그들의 아픔을 이야기했을 터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으로 청년들의 이슈를 해석한다. 물론 타 집단의 문제를 소재로 차용하여 나름의 가치관으로 그 해결책을 모색하거나 새로운 해석을 덧대는 것 또한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청춘의 가치관과 문화는 기성세대의 가치관 때문에 입은 상처에서부터 생겨났다. 이 상처만 소재로 취한 다음, 또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덧대는 것은 청년의 아픔을 조롱하는 행위일 수 있다.

<열정 같은 소리>는 3화 방송에서 취업성형부터 9대 스펙까지 이야기하며 '스펙 취준진담'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취지는 청춘들에 대한 공감과 위로다. 그런데 정작 패널들에게는 자신의 스펙을 열거해보라고 주문한다. 패널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스펙을 열심히 꼽고, 고스펙 패널을 부러워하면서 그와 비교되는 자신의 '저스펙'을 민망해한다. 그놈의 스펙 때문에 미래가 불안한 청춘들을 방청객으로 앞에 놓고, 그 앞에서 스펙이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손가락을 꼽으며 서로의 스펙을 비교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는 자신만의 스펙을 준비해오라고 요구해놓고 각 스펙을 평가한다. 심지어 직무 적합도를 기준으로 심사해 1위를 뽑아 시상한다. 장문복이 자기 장점으로 선택한 '매운 것을 먹을 수 있는 인내심'은 심소영의 '순간 기억 능력'보다 열등한 스펙으로 평가 받고, 심소영은 심사위원을 맡은 심상정 의원에게 상품을 수여받는다.

청년이 취업난에서 느끼는 좌절감은 단순히 '스펙을 쌓기가 어렵다'는 단편적인 감정이 아니다. 타인의 고스펙과 내 저스펙이 비교될 때의 열등감, 경쟁 속에서 도태될 것 같은 불안감, 그리고 내 가치가 오로지 스펙 및 기업 활용도로 평가되는 듯한 굴욕감이 섞여있는 감정이다.

<열정 같은 소리>에는 이러한 감정들을 그대로 패널들에게 들이밀고 이를 유희로 삼는다. 그 웃음 속에서 청년들의 문제들은 고민과 공감 없이 오로지 패션으로 소비된다. 청년들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와 같은 논리가 재생산되고, 그 억압으로 인한 상처들마저 가벼운 웃음의 소재가 된다. 물론 이러한 상처들에 기반한 탈권위, 탈경쟁과 같은 청년 가치 담론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단순화된 '청춘'의 이미지 속에 진짜 청년들의 감정과 사유들은 소외된다. <열정 같은 소리>가 공감보다는 동정에 가까운 이유다.

그뿐인가. <열정 같은 소리>의 모든 코너, 자막에는 '청춘'이라는 레이블이 따라붙는다. "당신은 어떤 청춘인가요?"라고 묻는 1화의 인터뷰 질문조차 '너희는 청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청년 당사자인 나로서는 한없이 어색한 호칭이다. 나는 갑자기 젊어지지도, 열정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나를 '청춘'이라고 부른다. 가난하지만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누군가의 사진이 내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느낌이다. 정작 그 아래 얼굴은 지난한 일상이 버거운데.

프로그램에서 청년들은 '청춘'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 단어가 지시하는 '젊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요약된다. 그리고 '젊다'는 꿈, 열정, 희망, 긍정, 어려운 현실과 그 극복이라는 뉘앙스를 한아름 청년에게 선물한다. 참 달갑지 않은 선물이다. 그래서 <열정 같은 소리>는 비극이다. 청년을 위한, 청년에 대한 프로그램에서조차 청년은 청춘으로 타자화된다. 청년들이 청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 있는지 곱씹게 한다.

사회 속 청춘담론의 문제

 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

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 ⓒ 온스타일


그러나 <열정 같은 소리>의 문제점들은 프로그램 내부의 문제보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가깝다. 애초에 청춘담론이 청년들이 아닌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스레 청년들에 대한 타자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20대 청년들을 '청춘'이라고 부르는 여러 청춘 담론이 형성되어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야>를 위시한 청춘 도서들과 청춘 콘서트까지 관련 콘텐츠도 넘쳐난다. 하지만 청년과 청춘은 다르다. 청년 중 스스로 '청춘'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청춘'이라는 단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꿈, 열정, 젊음과 같은 관념들이 자신과 너무도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본 것과 견주어 새로운 것을 파악한다. 때문에 10대를 거쳐 20대에 다다른 청년들에게 20대란 직장인이 되라는 압박, 갑자기 주어진 자유와 책임, 불안, 경쟁 따위지 '젊음'이 아니다. 20대를 '젊음'이라 부르는 것은 늙은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향수와 과거 미화가 덧씌워진 20대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청춘,' 푸른 봄이라 할 수 있겠다.

청춘담론 또한 마찬가지다. 청춘담론의 발화자는 청년이 아니라 기성세대다. 청춘담론 속에서 청년은 소재로 이용되고, 기성세대의 입맛에 맞춰 왜곡된다. 이에 기반한 청춘 콘텐츠 역시 마찬가지다. 선행 자료들이 전부 그러한데, <열정 같은 소리>가 완전히 새로운 청춘담론 혹은 청년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웠을 테다.

그렇기 때문에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담론이 아니라, 청년세대가 스스로 자신들을 규정하며 만들어낸 담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가치체계는 대개 기존 가치체계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진다. 예컨대 탈권위, 탈경쟁, 규정성 거부 등이 있을 것이다. 이런 가치들은 이미 사회에 존재하는 것들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대안적 가치들이 실질적인 삶을 구현해나가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실험이 필요하다. 이론이 어떠한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이론은 현실을 건설해 낼 수 있는 이념으로 발전한다.

청년들의 가치체계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현실 이념이 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실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사회의 결정권이 기성세대에게 남아있고, 사회는 그들의 가치관에 따라 굴러간다. 그러나 청년들만의 담론은 현실 실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청년담론이 어떤 현실 이념이 되어 어떤 현실을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다.

TV는 미디어산업이고, 보장된 시청률과 보장된 이윤을 필요로 한다. 기업 직원인 제작진이 그런 실험에 귀한 편성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을 테다. '각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필요했을 테고, 청년담론을 청춘담론의 첨가물 정도로밖에 이용할 수 없었을 수 있다. <열정 같은 소리>는 이러한 현실적 조건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클의 정신

<열정 같은 소리>에는 '다 사회가 그래서 그래~'라는 말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기획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러나 제작진은 청년 담론을 청춘 담론 사이사이 '첨가'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가 바로 '태클'이다.

방송 내내 이랑, 최서윤, 김꽃비 등은 제작진의 프로그램, 그리고 타 패널들의 대사에 '태클'을 건다. 앞서 언급한 열악한 주거 환경에 대해 최서윤은 "우리에게 너무 놀라면 실제 사는 분에겐 상처일 수도 있다"며 타 패널들을 제지한다. 이랑은 자신의 '수저'를 고르라는 제작진에게 "자신의 수저(경제적 상황)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건 폭력적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꽃비는 '짠내 배틀'에서 모태솔로임을 고백하는 장문복에게 "모태솔로가 왜 짠내냐"며 반박한다.

이러한 '태클'이 승인된다는 건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청년들이 프로그램에서 자주 타자화되고 있음을 인지시킨다. 제작진들은 이 장면들을 편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사실을 일부 시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태클'로 미약하나마 청년 담론을 일부 브라운관에 담는다. 이로써 우리는 기성세대가 소환하는 전형적인 청춘 담론, 그 이외의 '청년 담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청년 담론으로 현실을 구성하려는 실험들과 그 결과물을 TV에서 곧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

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의 포스터. 여러 한계를 가진 프로그램이지만 '태클' 정신 덕분에 그 가능성도 분명 지니고 있다. 과연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 온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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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간결함이 왜곡이 되지 않도록, 자세함이 장황함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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