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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여행을 인생에 비유한다. 아마도 여행지를 정하고 여행지의 상황과 여건에 맞춰 준비하고 대처하는 과정이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님'이라고 한다. 반면에 내가 떠나는 모든 여행은 사고와 생각을 정돈하는 변화를 모색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중국 연길 여행은 내가 지금까지 다녀온 여행과는 참여하는 마음이 사뭇 달랐다. 성문밖 학교 선생님으로 3학기를 지내면서 여러 학교행사에 제대로 참여를 못했다.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연길여행을 주저 없이 가겠다고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바로 여행 그날이 왔다. 2014년 10원 8일, 우리에 집결지는 인천공항 D부스였다.

도착하니 이미 성문밖 가족을 포함해 치과 의료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게 두 카테고리로 형성된 멤버가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라고 새겨진 똑같은 벽돌색의 티셔츠를 받아 입는 순간 한 그룹의 멤버로 일치됐다. 두 개의 카테고리는 어느새 하나의 공동체가 돼 26명이 움직였다. 그 하나를 확인하는 더욱 값진 시간은 공항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찍은 사진 한 장으로 고스란히 담겼다.

티켓을 확인해서 받고, 수하물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위해 검색대를 통과하고, 출국 도장을 찍고, 출국 수속을 밟으니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났다. 비행기에 탑승한 후 두 시간의 비행 끝에 연길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한 연길공항은 '연변조선족조선자치주'란 말을 바로 실감시키려는 듯 한글과 한문으로 써진 공항이름이 나란히 눈에 들어 왔다. 가슴 저변에 안타까움으로 뭉클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을 볼 때와는 너무 다른 감정이었다. 피로 연계된 한민족이 전쟁, 사건, 정치, 경제적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피는 같으나 서로 다른 별개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비극이었다.

연길공항에서 멤버들이 4명씩 나눠서 '꿈터'로 이동했다. 꿈터의 학생들과 방문한 우리 모두가 함께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꿈터에는 이미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꿈터의 학생들은 탈북여성들의 아이들로, 대부분이 가족과 살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연민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들 자체에 장점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 아이들을 더 건전한 생각으로 볼 수 있다고 여겼다. 꿈터의 아이들은 더러는 한국말을 했고 더러는 한국말보다 중국어를 편하게 했다. 비슷한 얼굴 모습에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언어로 말했다. 이질적인 모습에서 이질적인 다른 언어가 나오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데 같은 비슷한 모습에서 다른 언어를 느끼고 보게 되는 것은 아픔이었다.

침대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향했다. 12시간이 걸리는 긴 기차여행이었다. 기차 안에는 여러 언어들이 혼재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에는 늘 신선함이 있다. 밤에는 불편하고 낯설고 힘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처럼 새벽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어김없이 오전 5시다. 새벽에 일어나 맞게 되는 이국, 중국의 여명이 너무나 차분히 내게 다가섰다. 서서히 퍼지는 여명이 슬픔이 어리도록 아름다웠다. 날씨가 흐린듯했다. 날씨는 싸늘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보는 731부대는 슬픔 그 자체이다. '행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늘 내가 삶의 철학으로 가지고 있는 말이다. 731부대를 보며 마음속으로 이 말을 다시 마음에 새겼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이유로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접한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지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731부대를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암울함이 주는 분노는 또 인간이기에 어쩌지 못하는 아픔이었다. 731부대는 전쟁과 강대열강에 내몰린 우리의 약함을 결코 잊지 말자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며 전율케 했다.

나에게 이번 여행은 내 안에 숨어 있는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러시아와 북한 중국이 함께 자리한 '조중접경지역'인 도문을 볼 때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몰려왔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리는 모두 사람, 인간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지구에 살고 있는 공통분모인데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학창시절 내내 윤동주라는 시인을 사모해왔다. 윤동주를 그렇게 사모했기에 생가를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도 컸을 것 같다. 별이 총총히 뜬 까만 밤에 생가에 도착했다. 생가에 보이는 것은 없었고 아무 것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 '윤동주생가' 돌로 된 팻말 옆에 서서 한 장의 사진으로 대신해야 할 때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이곳에서 사실 청년 윤동주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무심히 쳐다 본 밤하늘은 장관이었다. 별들이 내 머리 위로 쏟아 질 것 같았다. 어두운 밤에 그 깜깜한 밤에 무수한 별들이 우리를 마중하고 있었다. 나처럼 아쉬워하는 여행객에게는 그야말로 별의 향연을 베풀어 달래주려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우리 모두는 고개를 뒤로 해서 그 많은 별들과 조우했다. 모두 감탄을 하며 연신 탄성을 질렀다. 북두칠성, 북극성, 카시오피아 등 알고 있는 상식을 동원하여 별자리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난 알게 되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결코 우연히 나온 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시를 '어떻게 짓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했다. 시를 지을 수뿐이 없는 환경이었고 저절로 시상이 떠올랐을 거라고 여겨졌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그렇게, 그 순간 나는 이 구절을 수도 없이 입으로 달막거렸던 학창시절 그 시간 속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백두산에서 용정으로 오는 길에 청산리 전투터를 찾아가는 도중이었다. 운전기사도 길을 확실히 모르는지 여러 번 버스를 세우고 주위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가도 가도 인가가 드문 산길이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선가 버스가 고장이 났다. 운전사는 극도로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운전사가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다른 버스가 온다고 했다. 클러치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일행은 모두들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에 있던 먹을 것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꿈터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한국노래를 찾아 부르려고 하셨다. 운전사를 격려하며 꿈터 선생님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성문밖학교 오미화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이 함께 박수를 치며 박자를 맞췄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모두 말은 많이 안 했어도 함께하고 있었다. 마음 깊이. 남과 북이라는 짙은 이념이 아무리 한민족을 갈라놓는다 해도 피의 고리는 절대로 끊을 수가 없다는 마음이 굳게 마음을 울렸다. 우리는 하나였다. 어떤 체제와 거리 속에 있다하더라도.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굉장한 기쁨이었다.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인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차를 고치고 내려오는 길에 다른 버스가 왔다. 우리는 모두 환호를 하며 새 버스에 갈아탔다. 아마도 평생을 두고도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간과 마음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번 여행으로 난 이념과 체제라는 짙은 화두어를 갖게 되었다. 그 두 화두어의 사고와 깊이를 넓혀가는 여행이 되었다. 잊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시간을 지나며, 또 새로운 곳 어디를 가더라도…. 그 시간을 공간을 공유한 모든 일행에게 함께 한 모든 것에 감사를 전한다.


태그:#연길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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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kespeare 전공. 문학은 세계로 향하는 창이며, 성찰로 자신을 알게 한다. 치유로서 인문학을 조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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