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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로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삶을 살았던 분이 58년간의 '소풍'을 마쳤습니다.

나그네는 1980년대 동국대를 졸업하고 기득권에 편승하면서 어쩌면 평범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나그네의 그런 삶은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하다가 석방된 이인모 선생과의 인연으로 세상의 주변부를 떠돌며 인생행로와 역정이 여러 번 뒤바뀌었습니다.

나그네는 1992년 5월 북의 연형묵 총리와 남의 국무총리가 회담하는 이른바 '남북고위급회담장'인 신라호텔에 이인모 선생과 동행했다가 특수공무집행 방해죄로 1년 반 정도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나그네는 아르헨티나에 있던 중 북에 있던 이인모 노인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뿌리치지 못해 당국의 허가 없이 북에 들어가면서 19년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나그네는 2012년에 구순을 바라보는 부모님 모시겠다며 귀국을 결심했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인천공항에서 연행된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여를 교도소에서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나그네는 귀국 후 5년여 만인 2017년 9월 19일 소성리 사드 배치에 반대하며 자신의 하나뿐인 몸을 평화의 마중물로 내던졌습니다.

한강성심병원에 차려진 고 조영삼 선생 빈소
 한강성심병원에 차려진 고 조영삼 선생 빈소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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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마중물이 되고자 했던 '조영삼'

나그네의 이름은 조영삼입니다. 그는 19일 오후 4시 11분경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며 분신을 시도한 후 치료를 받다가 오늘(20일) 오전 9시 34분 58년간의 삶을 마감하고 선종했습니다.

조영삼 선생의 죽음을 놓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듯합니다. 그가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념이나 사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 게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과의 지난 10여 년간의 인연을 되돌아 볼 때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바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조영삼 선생은 유서에서 이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저의 산화가 사드철회를 위한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 방울이나마 좋은 결과의 마중물이 된다면 연연세세 가문의 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던 어느 이름 없는 평화주의자가 한 떨기 마지막 잎새를 떨굼으로써 이 땅에 평화를 기원한 나라, 대한민국을 얕보지 말라고..."

1993년 7월,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 선생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가 접견하고 있다.
 1993년 7월,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 선생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가 접견하고 있다.
ⓒ <영광의 50년>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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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된 '이인모' 마지막 소원은...'조영삼 선생을 만나고 싶소'

조영삼 선생의 삶은 비전향 장기수로 북송된 이인모 선생과의 인연을 빼고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조 선생은 1990년대 초 한겨레신문 지국장 일을 정리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선박사업을 하고 있는 큰형님의 초청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부산의 한 서점에서 접한 <말>지의 기사 때문에 장고 끝에 아르헨티나 행을 포기했습니다.

문제의 기사는 신준영 기자가 쓴 '아름다운 상술 최상근'이었습니다. 그는 <말> 지 부산지사를 통해 최상근씨를 만났습니다. 의기투합한 그는 최상근씨가 후원하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한창우 선생이 혼자 어렵게 운영하고 있는 경남 김해군의 청둥오리 농장을 찾았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행을 포기하고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내 '튼튼한 몸'을 던지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사상에 경도되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야만의 시절, 빨갱이라고 덧칠되면 곧 매장을 의미하던 시절에 수십 년 동안 갖은 협박과 공갈에도 굴하지 않고 험한 감옥살이를 견디고, 또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강철 같은, 튼튼한 동아줄 같은 신념이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창우 선생과 함께 농장 정상화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던 중 처음으로 이인모 선생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고문으로 지병이 악화되어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영삼 선생은 당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에 대해서 2011년 쓴  글을 통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20세기 마지막 10년을 시작하는 1990년대 초, 서울에서 생활하던 나는 한겨레신문 지국장 일을 정리하고 부모님이 계신 부산 집에 내려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선박사업을 하고 있는 큰형님의 초청으로, 막 떠날 참이었다.(중략)

내가 아르헨티나 행을 포기하고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내 '튼튼한 몸'을 던지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사상에 경도 되어서가 아니다.(중략) 나는 전쟁터에서 초개와 같이 산화해 간 이름 없는 국군병사나 인민군병사도 존경한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떠나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병사들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이른바 보주주의자들의 신념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중략)

나는 부산대학병원에 들러 병상에 누워 있는 이인모 선생을 처음 대면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 퀭한 두 눈, 한 쪽 눈은 검은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마 한 쪽은 폭탄 맞은 자욱처럼 푹 패여 있었다. 인민군 종군기자 출신 이인모! 신념이 무엇이기에, 무엇이 이 늙은 노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당시 나는 연민과 존경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이렇게 맺어진 이인모 선생과의 인연은 그가 1992년 5월 특수공무집행 방해죄로 징역살이를 하고 있을 때 이 선생이 판문점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끝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영삼 선생은 이인모 선생과 다시 이어진 인연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한창 일에 열중해 있을 때 이북에서 이인모 선생 이름으로 초대장에 준한 엽서가 날아왔고, 나는 일생일대의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이인모 선생이 타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인모 선생과의 마지막 이별은 너무나 서글프고 처량했었다. 남북고위급회담 진입 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안기부로 끌려가는, 싸늘한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고속도로 선상에서 였다.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아직 젊다.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이 선생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금지의 땅'으로 나를 이끌게 한 동기였다. 결국 나는 독일을 거쳐 지구를 거의 정확히 한 바퀴나 에돌고 돌아서 우리의 반쪽 땅을 밟았던 것이다. 1995년 8월 15일의 일이다. 국가보안법상 '반국가 이적단체'의 땅에, 허가받지 않고."

1995년 8월 이인모 선생의 집을 방문해 평양 현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
 1995년 8월 이인모 선생의 집을 방문해 평양 현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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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마친 '조영삼' 하늘나라에서도 자유로운 바람이 되시기를....

그의 고단한 삶의 시작은 젊은이의 애틋한 측은지심의 발로였습니다.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19년 동안의 망명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1년여의 옥고로 그 업보를 떨쳐내고 평범한 삶을 가꾸어 가던 중 사드가 또 한 번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며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촛불혁명의 소산인 문재인정부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자신의 하나뿐이 몸을 불살라야만 했습니다. 그의 빈소가 차려진 한강성심병원 장례식장에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한 인생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아직 이 세상 소풍 끝나지 않은 분들, 외람되지만 제 처와 어린 아들내미 부탁합니다"

조영삼 선생이 분신 당일인 19일 아침 밀양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 가족들에게 메모장에 남겨 놓은 글이 제 눈시울을 붉히게 합니다.

"한*아 여보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하늘나라에서 보자 안녕 안녕..."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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