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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 오전 서울가재울초 정문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지도를 하고 있는 어르신.
 9월 6일 오전 서울가재울초 정문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지도를 하고 있는 어르신.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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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선을 지킵시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포대기로 등에 업은 엄마. 이 엄마가 손에 든 깃발에 적혀 있는 글자다. 녹청색 모자를 눌러 쓴 이 엄마는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보였다.

내 아이가 다니는 한 초등학교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녹색알바 1만5000원...구합니다"

"○○초 녹색 알바 구합니다. 9월 5일 봉사 끝난 후 녹색어머니 일지에 사인하신 거 사진 찍어서 보내주시면 입금해 드립니다. 1만5000원."

요즘 심심찮게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는 글귀다. 녹색어머니회 교통지도 봉사활동을 대신해줄 사람을 구하는 이른바 '녹색알바' 광고다. 요 몇 년 사이 전국 상당수 초등학교들이 녹색어머니회 교통지도를 모든 학부모로 강제 할당하면서 이런 광고는 더 늘어나고 있다.

학생 교통안전을 위한 학부모 동원은 '필요악'인가? 학부모를 동원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 9월 6일 오전 8시 25분,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초 앞에도 교통지도를 벌이는 8명의 봉사대가 있었다. 이들도 일제히 '정지선을 지킵시다'란 글자가 적힌 노란색 깃발을 들었다 내렸다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가재울초 학부모가 아니었다. 학부모는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이 입은 노란조끼엔 다음과 같은 글자가 박혀 있다.

"어르신 일자리-서대문구."

서울 서대문구청이 노인일자리 사업 가운데 하나로 교통봉사활동을 벌이도록 인력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8명의 어르신은 날마다 오전 8시부터 8시 55분까지 가재울초 학생들의 교통안전 지도활동에 나선다. 한 달에 받는 노동의 대가는 21만원이다. 이달부터는 26만으로 5만원 오른다.

이 돈을 주는 곳은 서대문구청이다. 공식 명칭은 '어르신 일자리를 위한 스쿨존 안전지키미 사업'이다. 어르신 일자리 사업은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예산이 책정된 지원 사업이기도 하다.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가 같은 돈을 투자해 이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다. 다른 시도도 마찬가지다.

학생 안전도 지키고 돈도 버는 어르신들

"다른 일하는 것보다 학생들 안전하게 길 건너게 하는 거니까, 보람이 있죠. 폐지 줍고 그러는 것보다 백번 낫지요."

세련된 머리를 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환히 웃는다. 다른 할머니는 "간혹 인사를 잘 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기분이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혁신학교인 가재울초 등 몇몇 학교만 교통안전지도를 '학부모 동원' 없이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가재울초의 오종열 교장은 "구청 지원으로 어르신들이 날마다 오시면 녹색 학부모회를 만들지 않아도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맞벌이 학부모들은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하지 않아 부담 없고, 어르신들은 의미 있는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서 좋고, 교사들은 빚쟁이처럼 학부모에게 부탁하지 않아서 좋고…."

오 교장은 "이런 사례를 다른 학교에서도 많이 했으면 한다"면서 "무엇보다 교육청에서 중심을 잡고 지방자치단체와 협조체제를 구성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재울초는 지난해 3월 개교부터 올해까지 줄곧 학부모 동원 없는 교통지도를 벌이고 있다.

서대문구에 있는 초등학교는 모두 19개교. 서대문구청이 '스쿨존 안전지키미'로 학교에 보내고 있는 어르신 총 인원은 172명이다. 학교마다 평균 9명씩의 어르신이 교통지도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지역 상당수의 학교는 여전히 '학부모 동원' 교통지도에 나서고 있다.

이는 전국 다른 시도도 마찬가지다. 노인 일자리사업이나 경찰 자체 사업이 있는데도 '학부모 동원'은 여전하다. 이런 점에서 가재울초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보다 '교통 전문성' 높은 어르신 교통봉사대

이 학교 김효숙 평화안전부장은 "지난해 3월 개교 전에 교직원회의에서 녹색어머니회를 없애기로 뜻을 모은 뒤 방법을 찾았더니 쉽게 해결되었다"면서 "학부모 동원 때문에 민원이 생기는 것이지 어르신들이 교통안전지도를 맡으면서는 이에 대한 민원도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부장은 "1년에 학부모가 한두 번 나와 교통지도를 하는 것은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져 위험할 수도 있다"면서 "오히려 어르신들은 날마다 교통지도를 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전문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어르신의 건강 등을 살펴 교통지도에 적절한가를 살펴야 한다'는 이견도 나올 수 있다.

이 학교 학부모회장을 맡고 있는 서현정 학부모한테 전화를 걸어봤다. '학부모 동원' 없는 교통 안전지도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다. 두 아이를 이 학교에 보내는 서 학부모의 대답은 명쾌했다.

"저희 만족도 정말 높아요. 이전 학교에 아이 보낼 때는 젊은 엄마들이 아침에 교통지도를 하러 나오면 아이를 맡길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녹색알바'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맞벌이 부부도 그럴 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가재울초로 온 뒤 그런 걱정이 싹 사라졌어요. 우리학교 사례가 전국 초등학교로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서울가재울초 학생들이 논의해 학교 복도에 붙여놓은 교통규칙.
 서울가재울초 학생들이 논의해 학교 복도에 붙여놓은 교통규칙.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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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마친 뒤인 27일, 가재울초에도 걱정거리가 생긴 것으로 확인됐다. 날마다 8명씩 오던 어르신이 4명으로 줄어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 관계자는 "어르신이 노동, 봉사하는 시간이 다른 지역보다 많다는 민원이 자치단체에 들어와 기존 20일씩이던 어르신들의 노동시간을 10일씩으로 줄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는 교육부와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등이 나서 예산을 확대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급식봉사 이어 '학부모 동원' 교통봉사, 사라질 수 있을까?

학부모의 손을 반강제로 갖다 쓰던 학교 차원의 청소봉사, 급식봉사 등은 이제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사라졌다. '학부모 동원' 교통봉사도 사라질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시교육청 웹진 <지금서울교육>에 쓴 글을 상당 부분 깁고 더한 것입니다 .



태그:#교통안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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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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