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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에 위치한 하미마을에는 커다란 연꽃이 그려진 위령비가 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여 세운 비석'인 위령비가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인 1968년에 일어난 '하미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에 있다.

당시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던 한국군이 하미마을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던 사건이었다. 135명에 이르는 가족과 이웃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위령비를 세워 한국군의 만행을 세세하게 적고자 했다.

그런데 완공 직전, 한국의 참전 단체는 비문에서 학살의 기록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비석 위 커다란 연꽃이 비문을 덮게 됐다.

하미마을의 위령비 문구를 가린 연꽃 그림의 모습.
 하미마을의 위령비 문구를 가린 연꽃 그림의 모습.
ⓒ 한베평화재단 홈페이지, 사진 이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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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마을 위령비 위 연꽃이 49년 동안 진실을 가려왔던 것처럼,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라는 문제는 은폐되었다. 2018년 꽝남성 지역 학살 50주기를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아직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다.

2015년, 한국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응우옌떤런씨와 응우엔티탄씨가 방문했다. 일주일간의 한국행에서 그들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알리기 위해 여러 일정을 소화했다.

참전군인들의 반대 집회를 뒤로, 어렵게 시작한 강연회에서 응우옌떤런씨는 "어떤 원한이나 증오감을 부추기려" 그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대신 그는 "저는 제 심장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언제나 머리로만 이해되었다. 우리는 경제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을 정당화했지만 전쟁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더 늦기 전에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참전군인의 태극기

작년 겨울,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시위가 연일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나는 지하철에서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을 만났다. 작은 태극기를 손에 쥔 채 베트남전 참전 경험에 대해 큰 소리로 말하던 그는 태극기 집회 참여자이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의 동조를 받으며 퇴진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던 그는 연신 국가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나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명분도, 도덕성도 잃은 전쟁인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그가 박근혜 정부의 든든한 지지층이 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가서 총을 쏴야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트라우마가 지워졌던 일, 그리고 그들이 다시 박근혜 정부의 지지자가 된 과정은 모두 '애국'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었다.

약 20년 전에 나온 <한겨레 21> 기사들을 읽으며 나는 50여 년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갔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 사람들이 과거의 학살을 숨기기 위해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하미마을의 위령비를 연꽃무늬로 덮어 비문의 내용을 가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전 당시 학살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문득 내가 배운 역사는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전쟁을 경제 성장의 발판으로만 언급하는 역사 교육과, 전쟁을 '기념'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분노를 느꼈다.

이후 친구들과 함께 <연꽃아래>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우리 사회는 하미 마을의 위령비를 연꽃으로 덮어버렸지만, 우리는 그 연꽃 아래에 숨겨진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위령비를 가린 연꽃이 진실을 가리는 꽃이 아니라 평화의 꽃이자 베트남 국화라는 의미를 회복하기를 바랐다.

추모를 넘어서 평화로

베트남에 사과하는 1인 릴레이 시위에 <연꽃아래> 회원들도 함께 참여했다.
 베트남에 사과하는 1인 릴레이 시위에 <연꽃아래> 회원들도 함께 참여했다.
ⓒ 연꽃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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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아래>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서포터즈들은 자신이 배워온 역사가 거짓말이라는 사실에 공분했다. 전쟁에 참여한 세대도, 전쟁을 경험해본 세대도 아니지만 우리는 전쟁을 미화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였다.

<연꽃아래> 서포터즈 활동은 경제성장, 애국, 반공과 같은 문구들이 죽어간 사람들을 조명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매주 세미나를 하며, 처음으로 학살 문제를 한국에 알린 구수정 선생님과 퐁니, 퐁넛 마을에 취재를 가셨던 고경태 선생님을 만나며, 더 나아가 수요집회에 참가하고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사죄의 뜻의 1인 시위를 하며, 그리고 성주로 농활을 떠나며 우리는 국가폭력이라는 것이 다만 한 가지 사건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성주 소성리 농성장. 지난 6월 28일, <연꽃아래> 서포터즈들은 성주에서 7박 8일간의 초록 농활에 함께했다.
 성주 소성리 농성장. 지난 6월 28일, <연꽃아래> 서포터즈들은 성주에서 7박 8일간의 초록 농활에 함께했다.
ⓒ 연꽃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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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에 대한 수십 년간의 침묵에 균열을 냈던 것은 1999년 <한겨레 21>을 통해 기고된 한 편의 기사였다. 학살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한국 사회에 처음 알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몇몇 사람들은 약 20년간 이 문제를 다뤄왔고, 그들 덕분에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제주도에는 학살 피해자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베트남 피에타 상이 만들어졌고, 1999년 <한겨레 21>을 통해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알렸던 구수정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베평화재단이 발족했다.

그렇다면 <연꽃아래>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에 어떻게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한국 사회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수정 선생님과 같이 지난 20년 동안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가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랐다. 또한 <연꽃아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들의 노력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고민 끝에 우리가 생각한 방법은 바로 '토크콘서트'였다.   

IMAGINE, 평화를 상상하다

토크콘서트 <IMAGINE : 연꽃아래 평화의 빛깔을 그리다>는 베트남 꽝남성 학살 50주기를 앞두고 오는 12월 10일 개최된다. 콘서트를 주최한 <연꽃아래>의 이름과 콘서트의 부제처럼,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연꽃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진실을 알기 위해 연꽃 아래에 선 우리는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국가 폭력으로 삶의 평화가 짓밟혔거나 그것을 외면할 수 없던 이들은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연꽃 아래에서 시작할 때만이 이제껏 발화되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평화의 '빛깔'을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20년간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진실을 은폐하는 연꽃 위에 비를 내리는 것이었다면, 20년 후의 우리들은 그 결실을 모아 연꽃 위로 평화의 무지개를 띄워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연꽃아래>는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사드 배치 반대, 양심적 병역거부 등 여러 방면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콘서트 패널로 초청할 예정이다. 패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국가의 평화가 아니라 우리 삶의 평화를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중앙이 <연꽃아래> 단장 신민주, 왼쪽이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선생님.  9월 19일 프란치스코 회관 앞 <베트남과 함께 여는 평화 ‘만만만’ 캠페인> 선포식에서 학살 피해 생존자 분들에게 드리는 편지를 낭독했다.
 사진 중앙이 <연꽃아래> 단장 신민주, 왼쪽이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선생님. 9월 19일 프란치스코 회관 앞 <베트남과 함께 여는 평화 ‘만만만’ 캠페인> 선포식에서 학살 피해 생존자 분들에게 드리는 편지를 낭독했다.
ⓒ 연꽃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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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한겨레 21> 기사에 구수정 선생님은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라고 물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질문은 유효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추모해본 적도, 반성해본 적도 없다.

평화로 나아가는 길에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추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의 아픔을 직시하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까지 지난한 길이 놓여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긴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 위대한 역사가 될 것을 믿는다.

이 콘서트에 참여한 사람들이 또 다른 평화의 지평을 열 수 있었으면 한다.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연꽃아래와 토크콘서트 <IMAGINE : 연꽃아래 평화의 빛깔을 그리다>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 토크콘서트 <IMAGINE : 연꽃아래 평화의 빛깔을 그리다>의 모든 수익금은 서포터즈들의 베트남 평화기행 비용과 베트남 따이한 제사(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이 학살한 베트남 민간인들을 기리기 위해 마을별로 진행되는 제사) 지원금으로 사용됩니다.


태그:#연꽃아래,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베트남 전쟁, #토크콘서트 IMAGINE,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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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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