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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뜻으로 하는 말이라도 우리 말과 영어는 말 차례가 다르다. 이를테면 우리 말로는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해야 자연스럽다. '한 권의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면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물론 뒤엣말처럼 차례를 바꿔 말할 때도 있다. 힘주어 말하거나 시에서 말맛을 생각해서 앞뒤 말을 바꿔 쓰기도 한다. 그런 자리 말고는 앞처럼 말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우리 말에서 숫자를 말할 때 영어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다. 숫자말을 앞세워 말하거나 무엇을 한데 싸잡아 말할 때 흔하다. 말맛이 좀 어색해도 뜻을 주고받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까닭에 너나없이 쓴다. 그러나 본디 우리말 차례에서 벗어났다.

▲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토마토 농사를 한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는 "금신전선 상유십이 미신불사(今臣戰船 尙有十二 微臣不死)"로 적었다. 이 말을 어떻게 뒤쳐야 하나. 영화 <명량>에서는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풀었다. 하지만 이 말을 우리 말 결을 살려 말하자면 "아직 신에게는 배 열두 척이 있사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 다음 문장은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토마토 농사를 짓는다" 정도로 해야 자연스럽다. 이때 '대부분의 ◯◯' 꼴은 대개 "most of ~, the bulk ~, the major ~" 따위가 들어간 말을 가르칠 때 우리 말 차례를 생각하지 않고 판박이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에는 어설픈 영한사전과 참고서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잡아야 할 선생조차도 인이 박혀 그대로 쓰기 때문에 더욱 번졌다. 다음 그림책은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수록 도서'라는 글귀를 자랑처럼 달았다. 하지만 '열 개의 발가락'은 우리 말법에 어긋난다.

교과서에 실린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책 <발가락>(논장)
▲ 그림책 <발가락> 교과서에 실린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책 <발가락>(논장)
ⓒ 이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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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1학년 국어 교과서에서 이렇게 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대목을 차례로 짚어 보겠다.

열 개의 발가락은 뭐든지 될 수 있어요.(1-2-가, 15쪽)
 →  발가락 열 개는 뭐든지 될 수 있어요.
여러 개의 문장으로 표현하기(1-2-가, 65, 74쪽)
 → 문장 여러 개로 나타내기/ 여러 문장으로 나타내기
여러 개의 문장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봅시다.(1-2-가, 76쪽)
 →  여러 문장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아봅시다. / 문장 여러 개로 만드는
여러 개의 문장으로 표현하면 장면을 자세하게 나타낼 수 있어요.(1-2-가, 76쪽)
→  문장 여러 개로 표현하면 장면을 자세하게 나타낼 수 있어요.
여러 개의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보세요.(1-2-가, 76쪽)
 → 여러 문장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알아보세요.
여러 개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1-2-국어활동, 27쪽)
여러 문장으로/ 문장 여러 개로 나타내어 봅시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했다. 지금 어른이야 이미 눈에고 귀에고 입에고 잘못된 글말이 익어 아무리 잘못이라 해도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 아이들이 만들어쓰는 말이나 은어, 막말에 분노하면서도 자기 입에 붙은 글말투에는 꽤나 너그럽다. 오히려 글말투를 써야 배운 사람으로 받들어 대접하기까지 한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더 어렵고 어수선한 말을 쓴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가) 국어 교과서 121쪽에 보면, 윤석중이 <똑같아요> 노랫말이 나온다.
▲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린 <똑같아요>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가) 국어 교과서 121쪽에 보면, 윤석중이 <똑같아요> 노랫말이 나온다.
ⓒ 이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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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척의 배'와 '배 열두 척', '한 잔의 커피'와 '커피 한 잔', '두 짝의 젓가락'과 '젓가락 두 짝'.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러운가. 앞엣말이 더 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많이 한 사람일 듯하다. 하지만 우리 말 질서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이렇게 된 데는 교육의 힘이 크다. 그래서 아이에게 주는 국어 교과서는 달라야 한다. 더구나 온 나라 아이들이 한 가지 교과서로 공부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말을 평생 우리 말의 본보기로 알고 살아갈 것이다.


태그:#초등학교, #1학년, #국어, #우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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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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