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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법무부가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방안을 발표했다. 입법·행정·사법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및 그 가족의 직무 관련 범죄를 우선적으로 수사·기소·공소유지(재판 상태 유지)할 수 있는 공수처의 등장이 예고됐다. 1996년 11월 참여연대가 부패방지법 입법을 청원하면서 제안한 공수처 설립이 오랜 우여곡절 끝에 현실화 직전 단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정부 권력보다 국민 권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공직자들의 힘은 약해지고 국민들의 힘은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공수처 같은 기구가 활동하기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임금도 호통친 조선시대 '양사'

이런 공수처와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기구가 있었다. 조선시대도 있었고 그 이전도 있었다. 조선시대 경우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권한 중에 공수처와 유사한 데가 있었다.

<경국대전>과 이것의 개정판 법전들의 이전(吏典, 행정법) 편에 따르면, 사헌부의 권한 중에 "모든 관리를 규찰"하는 게 있었다. 검찰청과 비슷한 일을 했던 것이다. 사간원의 권한 중에는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관리들의 잘못을 규탄"하는 게 있었다. 국회처럼 임금과 조정을 견제했던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합쳐서 양사(兩司)라고 불렀다. 이때 '司'는 '담당하다'란 의미다. 양사는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문제점을, 사간원은 임금의 문제점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양사의 공직자 감시 기능은 국회·검찰청·감사원·경찰청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능가했다. 그렇게 막강했기에, 양사의 중하위직 관리만 나타나도 왕들이 긴장했을 정도다.

이들이 임금을 긴장시킨 사례가 실록에 수도 없이 기록돼 있다. 일례로, 미녀 후궁에 푹 빠진 중종은 <중종실록>에 따르면 음력으로 중종 13년 3월 12일(양력 1518년 4월 21일) 아침, 사헌부 정4품 관료한테서 '여색에 빠진 자는 용렬한 임금'이란 지적을 받았다. 중앙부서 국장급 혹은 과장급이 아침부터 임금의 사생활을 비판한 것이다. 장희빈의 남편인 숙종도 비슷한 충고를 들었다.  

사간원 터. 서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맞은편에 있다.
 사간원 터. 서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맞은편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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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가 막강했다는 점은, 15세기 후반에 양사를 장악한 개혁 유림세력 즉 사림파가 백년간의 투쟁을 거쳐 16세기 후반에 지배층이 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567년 선조 즉위와 함께 이들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지배층 교체를 이루어냈다. 조선 전기 2백년을 지배한 훈구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지배층이 된 것이다. 15세기 후반부터 양사에 진출해 훈구파 고위공직자들을 비판하며 약화시키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몰아낸 것이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는 개혁세력이 국회나 검찰청 같은 곳을 장악해 지배층 교체를 일구어낸 일이 없다. 1960년·1987년·2017년에 역사적 성과가 있었지만, 해방 당시의 친미·친일적 지배층이 아직 여전히 건재하다. 그런데 양사를 장악한 조선시대 사림파는 그런 일을 해냈다. 이것은 사림파도 대단한 세력이지만, 양사 역시 대단한 관청이었음을 보여준다.

법무부가 발표한 공수처 설치안과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용을 비교하면, 양사는 권한 면에서는 공수처를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부패한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수처보다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진행된 역사만 놓고 보면 그렇다. 

양사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한 가지 원동력은 정치적 중립성이다. 양사의 신입 관료들은 과거시험 급제자 중에서도 성적 우수자들이었다. 또 양사 전체 직원들은 여타 관청에 비해 나이가 젊었다. 그래서 부패에 물든 노장 관료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혈연·학연·지연 때문에 특정 세력과 개인적으로 가까웠을 수도 있지만, 이들은 공직자 감시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또 임금과 함께 학술 세미나를 많이 하다 보니 그만큼 인격을 수양할 기회도 많았다. 이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이들은 현실 정치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한 중립성은 달성되지 않았지만, 여타 관청에 비하면 상당한 중립을 유지한 셈이다.

공수처는 시민들이 지켜야 한다

임금과 신하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율곡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임금과 신하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율곡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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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추진되는 공수처는 양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중립성을 지향한다. 법무부 정책기획단이 15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공수처의 중립성을 실현하는 장치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공수처장 임명 방식이다. 

법무부장관·법원행정처장·대한변협회장 및 국회 추천 4인으로 구성되는 추천위원회가 처장 후보 2명을 추천하면, 국회의장이 교섭단체 대표의원들과 협의해서 1명을 선출하고, 국회에서 선출된 그 한 명을 대통령이 처장으로 임명한다.

만약 국회의장과 교섭단체 대표의원들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후보 2명 중 1명을 대통령이 지명한 뒤 인사청문회를 거쳐 처장으로 임명한다. 이처럼 공수처장 임명 과정에 법무부장관·법원행정처장·변협회장·국회·여야정당·대통령 등을 관련시킴으로써 공수처가 특정 세력한테 장악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사헌부·사간원의 중립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선시대 방식과 공수처의 중립성을 실현하기 위한 지금 방식 중에서 어느 게 더 효율적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조선시대 방식은 이미 검증됐고, 지금 방식은 앞으로 겪어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치적 중립성만 갖고는 대통령과 고위공직자들을 제대로 견제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개인·단체·종교 등은 무수히 많다. 중립적 세력이 있다는 것만으로 고위공직자들을 견제할 수 있다면 이들의 비리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사실, 정치적 중립이란 것은 다른 각도로 보면 정치적 힘이 없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런 힘도 없이 강력한 법적 권한만 가질 경우에는, 정치적 힘을 가진 세력한테 오히려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 헌법에서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에 버금가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권한을 행사한 총리는 거의 없다. 권한에 걸맞은 정치적 힘이 없기 때문이다. 공수처 역시 다르지 않다. 실질적 힘도 없이 법률 규정만으로 강력한 기구가 되기는 쉽지 않다. 입법·행정·사법 분야를 전 방위적으로 견제하려면 그에 맞은 실질적 힘도 있어야 한다.

그런 힘을 공수처에 보탤 수 있는 힘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민사회 밖에 없다. 공직사회 전체를 상대로 고독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공수처를 응원할 세력은 시민사회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요즘은 인터넷과 SNS의 영향으로 시민사회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이런 새로운 시민사회가 공수처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힘이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기구라서 사실은 정치적 힘이 별로 없는 공수처가 정치적 힘을 가진 공직사회 전체를 견제할 수 있으려면, 공수처가 시민사회로부터 힘을 제공받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실질적 힘도 없이 법률상의 막강한 권한만 믿고 공직사회와 맞붙었다가는 공수처가 유명무실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데 법무부가 발표한 방안에는 시민사회와 공수처의 연관 가능성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시민사회가 힘을 보탤 수 있는 장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 시민사회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변협회장이 공수처장 추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인다.

양사를 지탱한 건 '사림'

사헌부 터. 서울 광화문광장 서편의 세종로공원에 있다. 건너편 건물은 주한미국대사관.
 사헌부 터. 서울 광화문광장 서편의 세종로공원에 있다. 건너편 건물은 주한미국대사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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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사간원의 권력 감시 역시 정치적 중립성만으로 달성된 게 아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서 정치적 힘이 약했던 양사가 정치적 힘을 가진 대신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은 단단한 후원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사 관원들은 사림파의 상징적 존재들이었다. 사림파는 대지주가 아닌 중소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사림파는 이들의 후원을 배경으로 여론을 주도하고 정부를 압박했다. 양사 관원들의 상당수는 바로 이 사림파에서 나왔다. 

양사 관원들 중에는 나중에 대신이나 고관이 된 경우도 많고 대지주로 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림파의 이익을 대변했다. 양사 관원들이 "아니 되옵니다!"를 연발하며 임금의 일에 사사건건 제동을 건 것은 임금의 정책이 중소 지주계층의 이익과 상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사림파에서 배출되고 사림파의 목소리를 대변했기 때문에, 양사 관원들은 사림파를 의지처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런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임금과 고위공직자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목청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관직에서 파면돼 낙향한다 해도, 지방 사림파의 지원과 존경을 받으며 재기를 도모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더 소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과 똑같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에도 그 시대 나름의 시민사회가 있었다. 그런 시민사회가 조선판 공수처를 뒷받침했다. 그랬기 때문에 조선판 공수처의 정치적 중립성과 공직사회 감시 기능이 상당 정도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그:#공수처, #사헌부, #사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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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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