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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면서 교장 선생님하고 무슨 얘기를 했냐는 질문에 "엄마, 교장이 뭐야?" 아들은 되묻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들은 이미 호주를 살고 있고, 엄마는 아직 한국을 산다.
 집에 돌아오면서 교장 선생님하고 무슨 얘기를 했냐는 질문에 "엄마, 교장이 뭐야?" 아들은 되묻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들은 이미 호주를 살고 있고, 엄마는 아직 한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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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30분, 아이 픽업 시간에 십분 정도 늦었다. 황급히 모자를 눌러쓰고 달려가니 교장이 운동장에서 아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교 시간에 운동장을 돌며 학생들이 안전하게 부모에게 돌아갔는지를 확인하던 교장의 눈에 발견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서 교장 선생님하고 무슨 얘기를 했냐는 질문에
"엄마, 교장이 뭐야?" 아들은 되묻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들은 이미 호주를 살고 있고, 엄마는 아직 한국을 산다.

멜버른에 있는 공립학교의 프렙(Prep, 멜버른의 학령기는 한국보다 일년 먼저 시작하는데, 한국의 유치원 마지막 해를 초등학교에 편입시켜 일년간 학교적응 훈련을 하는 과정을 일컬음)에 입학 한 지가 일년이 다 되어가는 아들은 아직 교장의 존재를 모른다. 다른 학부모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들이 교장을 행정실 직원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서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송곳>, 최규석)라고 했던가? 사는 국가가 다르니, 보이는 풍경이 충격이다.

 학교 캡틴이 주관하는 멜버른 학교의 아침조회. 각종 상장이나 상품도 캡틴이 전달한다.
▲ 멜버른 학교의 아침 조회 학교 캡틴이 주관하는 멜버른 학교의 아침조회. 각종 상장이나 상품도 캡틴이 전달한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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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실 옆에 딸려 있는 교장실은 면적이 한국 교실의 1/3 이나 될까? 행정실 직원이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책상엔 책과 파일들이 가득하고, 벽면에 세워진 책꽂이는 언제 구입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낡았다.

벽과 책상의 이곳 저곳엔 아이들이 작업한 미술 작품들과 사진 등이 정신없이 붙어있어 마치 창고 같은데도, 항상 반쯤 열려 있는 교장실은 호기심과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앞을 지나다 뜬금없이 들어가 질문하는 학생들이나 스스럼 없이 교장에게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들을 보는 일이 마냥 신기하다.

반면 내가 오랫동안 경험한 한국의 교장실은 존재 자체로도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교장실 앞의 복도는 유난히 반짝였고, 늘 굳게 닫힌 문짝은 일반 교실과는 색깔과 재질부터 달랐다. 새로 부임하면 멀쩡한 '교장용' 책상과 의자를 먼저 교체했고, 교직원실은 좁아 터져도 이 방의 넘쳐나는 공간은 난이나 커다란 소파가 차지하곤 했었다.

항상 폐쇄적인 이 공간을 나같은 평교사가 통과할 수 있었던 경우는, 사고(?)를 쳐서 호출 당하거나 결재판을 들고서 머리를 조아릴 때이다. 발령 첫 해, 세상물정 모르는 숙맥이었던 시절에 교장실에 들어갔다 묵사발이 된 후, 그 곳엔 보이지 않는 출입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좋은 아이디어를 건의' 한 것이었고, 교장에겐 '학년부장-교무부장-교감' 결재라인을 거치지 않은 '되바라지고 건방진 처사'였다.

한국의 교장이란 직위가 갖는 '배타적 권위와 강요된 복종'을 알지 못하는 호주의 교장은 오늘도 학교를 누빈다.
 한국의 교장이란 직위가 갖는 '배타적 권위와 강요된 복종'을 알지 못하는 호주의 교장은 오늘도 학교를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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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교에서 교장이 형식적으로 메우던 자리를 이곳은 학생과 담당 교사, 심지어는 학부모 자원봉사자들이 실질적으로 채운다.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전 학년 아침 조회는 학생회장단이, 도서 주간 행사는 담당 사서와 학생이, 체육대회는 체육교사가, 부모들은 <학교에서 캠핑하는 밤>을 주관한다. 다양하고 넘쳐나는 행사에서 교장을 찾는 일은 마치 '월리를 찾아라'의 월리를 찾는 격이다.

한국의 교장이란 직위가 갖는 '배타적 권위와 강요된 복종'을 알지 못하는 호주의 교장은 오늘도 학교를 누빈다. 놀이 공간의 안전을 챙기고, 등교길에 부모와 아이들을 반기고, 안전하게 귀가 했는지를 확인하고, 학생들과 직접 대화하고 학부모의 민원을 해결한다. 매주마다 발간되는 학교 소식지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직접 보고하는 것도 교장의 몫이다.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 시절, 콘크리트처럼 강한 위계질서와 관료제가 무너지면 학교 자체가 붕괴되는 줄 알았다. 학교의 구성원을 교장, 교감, 부장, 평교사, 기간제교사, 시간강사 등으로 계급을 세분화하여 호명하지 않으면 하극상이 일어나 무법지대가 될 것만 같았다. 특히 상급자에게 말을 트고 섞는 일은 살얼음 판 위를 걷듯 조마조마했었다.

호주에서 학부모 노릇을 하며 그 시절 질식할 것만 같던 무거운 공기의 실체를 어렴풋이 느낀다. 한국에서 '교장선생님' 이란 극존칭의 호명을 수없이 입에 달고 살았어도 생기지 않던 신뢰와 존중이 멜버른의 교장에게  '수' 하며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미 신뢰와 존중을 넘어 애정이 묻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태그:#호주의 학교, #멜버른의 교장실, #멜버른 교장의 역할, #동등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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