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

ⓒ 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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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런 일은 없었어야 해요." 생전에 히스 레저와 깊은 교감을 나눴던 음악가 벤 하퍼는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 첫 시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의 요절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2006)을 함께했던 이안 감독 역시 그의 때 이른 죽음을 두고 신이 질투한 재능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요절한 재능 있는 사람들을 두고 그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두 사람만이 아니다. 히스 레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모든 사람이 그의 허망한 죽음 앞에 이와 같은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제 막 전성기로 접어들던,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배우의 삶이 '28'이라는 숫자에서 멈추기엔 역시 이른 감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는 그의 사후에 제작된 작품으로 히스 레저라는 배우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어떤 것들을 추구하며 나아가고자 했는지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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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히스 레저는 언제나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로 기억되고 영화 속 인물로 남았다. 아니 그마저도 제한적이었다. 히스 레저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델마였고 <다크나이트>(2008)의 조커였을 뿐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유명한 작품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어떤 배우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오랫동안 회자될 배역이 필요할 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그런 기억들이 아쉬움이 된다. 이번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가 중요한 이유다.

<아이 앰 히스 레저>는 그가 어떤 배우였는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존에 제작된 고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그의 지인들에 의한 인터뷰나 그의 업적에 대한 내용으로 대부분 채워지는 것과 달리, 기존의 방식에 더해 그가 직접 촬영한 비디오와 사진들이 끊임없이 제시되는 이유다. 다른 누군가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히스 레저 본인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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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게 가능했던 것은 히스 레저가 생전에 비디오와 사진을 찍는 것에 많은 시간을 들였고, 그 결과 다양한 스냅들이 유품처럼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시간과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길 원했던 인물이었다. 스스로의 모습은 물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말이다.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 스틸 사진. 히스 레저는 자신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길 바랐다.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 스틸 사진. 히스 레저는 자신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길 바랐다. ⓒ 오드


히스 레저는 카메라를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처럼 여겼다. 이는 그의 연기 경력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예술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그는 단편 영화는 물론 뮤직비디오 촬영도 직접 했으며, '더 메시스'라는 레이블을 만들어 그레이스 우드루페라는 호주 가수를 프로듀싱하기도 했다). 단순히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색을 덧입히고 구도를 채워나가는 모습들은 그의 예술성을 돋보이게 만든다. 이번 작품을 통해 그가 직접 연출한 단편 영화들과 뮤직비디오(벤 하퍼의 Morning Yearning 뮤직비디오가 등장한다)를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흥미로운 재미를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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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앰 히스 레저>는 아티스트의 필모그래피를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함께 작업하거나 생활한 이들의 인터뷰를 싣는 기존 다큐멘터리의 전통적인 방식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 <브로크백 마운틴>, <다크나이트> 뿐만 아니라 히스 레저의 초창기 작품인 영화 <패트리어트–숲속의 여우>(2000), <기사 윌리엄>(2001)과 같은 작품들까지 모두 포함됐다. 또 영화 <독타운의 제왕들>(2005)처럼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은 작품까지 볼 수 있다.

특히 히스 레저가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통해 특정 장르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보여줬던 모습이나 영화 <독타운의 제왕들>이 끝나자마자 <브로크백 마운틴> 작업에 들어가야만 했던 상황에 대해 짚어주는 부분은 팬들에게 또 다른 흥미로움을 준다.

영화 <네드 켈리>를 통해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배우 나오미 왓츠나 <패트리어트–숲속의 여우> 당시 히스 레저가 가장 많이 의지했다고 알려진 같은 호주 출신의 대배우 멜 깁슨 또 <브로크백 마운틴> 촬영 당시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안 감독의 인터뷰도 실렸다. 이는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인터뷰만큼이나 진짜 히스 레저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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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문턱 앞에서 히스 레저가 세상을 떠날 당시,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사람들은 많은 소문을 만들어냈다. <다크나이트> 조커 역이 그에게 과도한 부담을 줘 그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임 낫 데어>(2008)를 촬영하며 쌓인 스트레스가 지속돼 삶을 일찍 마감하고 말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셸 윌리엄스와의 불화가 원인이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원래 성향 자체가 우울한 쪽에 가까웠기에 시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에서는 그가 직접 촬영한 영상들도 함께 볼 수 있다.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에서는 그가 직접 촬영한 영상들도 함께 볼 수 있다. ⓒ 오드


그러나 <아이 앰 히스 레저>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든 루머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결코 우울하거나 현실에 낙담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과거에 대해 깊은 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이다. <다크나이트>의 조커 역을 맡은 그는 "드디어 처음으로 자신이 모든 장면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느낄 만큼, "촬영장에서 그 어떤 두려움도 하나 느낄 수 없었다"고 직접 이야기할 만큼 즐거워했다고 말이다. 적어도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사고였다고 믿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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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 스틸 사진. <브로크백 마운틴>의 이안 감독이 회상하는, 촬영장에서의 히스 레저 모습 역시 흥미롭다.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 스틸 사진. <브로크백 마운틴>의 이안 감독이 회상하는, 촬영장에서의 히스 레저 모습 역시 흥미롭다. ⓒ 오드


이번 다큐멘터리는 히스 레저라는 배우가 생전에 보여준 모습 뿐 아니라, 그의 사후 이후에 가족들이 느낀 상실감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을 보여준다. 단순히 아들의 죽음이라는 슬픔이라기보다 그 사실을 가족이 아닌 세상이 먼저 알아버리게 된 일에 대한 무력함과 공허함에 대해 말이다. 동생의 죽음을 세상이 먼저 알게 된 것, 그것이 평생 동안의 한으로 남을 것 같다는 누나의 말은 팬들이 느끼던 그의 죽음에 대한 놀라움과 안타까움 이전에 가족이 느꼈을 슬픔을 먼저 생각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의 흐름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그 많은 작업과 이야기 속에서 마치 그의 삶이 30대 중반 혹은 40대에야 이룩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을 이루어놓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만큼 그는 짧은 시간 많은 일들을 이루었고, 더 많은 작업을 하고자 했다. 영상이 끝나면서 화면에 드리워지는, 그가 세상과 이별한 나이 28살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에 대해 더 많은 것들 것 알지 못한 채로 막연한 안타까움만 갖고 있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영화가 끝나고 OST곡인 본 이베어(Bon Iver)의 '퍼스(Perth)'가 흘러나온다. 그러면 작품 초반부 벤 하퍼가 읊조리던 그 말을 함께 되뇌게 된다. "애초에 이런 일은 없었어야 해"라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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