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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고운 가을 휴일에 남양주 축령산 전망대에서 쓰다. 추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다.
▲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단풍이 고운 가을 휴일에 남양주 축령산 전망대에서 쓰다. 추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다.
ⓒ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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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중에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라는 말이 나온다.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 즉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그림과 글씨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뜻이다. 대단한 내공이 느껴지는 그림과 글씨를 보면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에게서 풍기는 문자향과 서권기는 지성미다. 지성미를 발산하는 사람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달하고 싶은 경지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뭔가 다른 점이 있다. 사고의 폭이 넓고 깊으며,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 배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서 그런 고상한 기운이 배어나려면 먼저 그 사람됨의 바탕에서 우러나야 한다.

추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다.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평생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엄청난 노력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그 정도의 연마 없이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은 바라지 말라는 말일 수도 있다.

유홍준 선생의 <완당평전>을 읽으면서 거듭 감탄했었다. 추사의 진면목을 알게 해준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김정희를 고작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의 창시자이며, 수많은 사람이 격찬하는 '세한도'를 그린 인물로만 알았다. 유홍준 선생이 서장에서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라고 표현한 구절이 있는데,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완당평전>을 통해 추사의 다양한 글씨를 볼 수 있었고, 유홍준 선생의 해박한 식견으로 말미암아 고미술을 감상하는 안목이 조금은 생긴 듯하다.

"김정희에게 질문 안 받은 학자, 별 볼 일 없다"

어떤 인물을 제대로 알려면 그 사람의 행적을 살펴보는 노력도 필요하다. 거스를 수 없는 환경, 그 환경에 대처하는 자세 등이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추사는 19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며 불세출의 예술가다. 추사가 태어난 경주김씨 가문은 조선 후기 권력의 핵심에 있던 경화세족(京華世族)으로,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혼인해 월성위에 봉해진 인물이다.

추사 나이 7세 때 당시 재상 체제공이 추사의 글씨를 보고 장차 명필이 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12세 때 큰집 양자로 입적한 추사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월성위궁에서 보냈다. 월성위궁의 서고 '매죽헌'에는 수많은 책이 있었는데, 추사는 그 책들을 통해 폭넓은 독서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큰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당시 실학의 태두였던 박제가에게 사사해 중국의 학문 경향과 서예, 그리고 실사구시의 학문에 대해 깊이 깨우치게 된다. 특히 글씨가 뛰어나 20세 전후에 이미 그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고 있었다.

추사는 24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그해 중국에 동지부사로 가는 생부를 따라 연경(베이징)에 가게 됐다. 연경에서 추사는 60일 동안 머물며 당시 연경 학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경학과 금석학, 서예에 대해 깊이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된다. 추사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에 반한 옹방강은 자신의 막내아들 옹수곤을 불러 의형제를 맺게 할 정도였다.

연경에서의 체험은 추사의 일생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34세에 대과에 합격해 출셋길에 오른 추사는 너무나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가문이 좋고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다 보니 콧대가 꽤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독서량도 엄청났다. 독서를 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학식이 높은 선비들을 찾아다니며 질문해 기어이 알고 넘어가는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김정희에게 질문을 받지 않은 사람의 학문은 별 볼 일 없다"라는 말까지 떠돌았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으로 학문적인 논쟁이 일어나면 중국의 원전 이름을 거론하면서 국내 학자들의 기를 팍팍 죽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샀다고 한다.

추사는 당대의 서예가였던 원교 이광사가 집대성한 <필결>을 신랄히 비판했다. 원교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명필이다. 그런데 추사는 "왕희지의 글씨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왕희지 법첩이란 판각에 판각을 거듭하면서 변질하여 사실상 가짜인데 원교는 한심하게도 이를 모르고 있다"라고 깎아내렸다.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그 당시에 원교는 소론 출신, 추사는 노론 출신이었던 점도 이광사를 비난하며 평가절하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한 원인도 그의 오만한 성품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사람들은 오만하고 잘난 사람을 싫어하는 법이니까.

추사의 벼슬길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또한, 30대 후반쯤에 추사체를 이룬 그의 문하에는 필법과 화법을 배우려는 준재들이 앞다퉈 모여들었다. 벼슬은 더욱 높아지고 따르는 사람이 많으니 안하무인격 성품은 심화했을 것이다. 꼬장꼬장하면서도 독불장군과 같은 성격은 반대파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정쟁에 휘말려 모든 걸 잃은 추사

추사는 40세 때 충청우도와 경기도 암행어사가 돼 비밀리에 민정을 시찰했다. 그때 충청도 비안 현감이던 김우명의 실정을 파악해 파직하게 한다. 김우명은 당시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안동김씨의 일문으로, 추사는 당시 권력의 중심인 안동김씨와 척을 지게 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다.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가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추사에게 앙심을 품었던 김우명의 상소로 시작된 정쟁은 10년 전에 종결된 '윤상도의 옥사(獄事)'를 빌미로 기어이 추사를 중죄인으로 옭아매고 말았다.

1840년 9월, 55세의 추사는 인생 최대의 위기 속으로 빨려들었다.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36대의 곤장을 맞은 뒤 가까스로 목숨만을 구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귀양을 떠나는 그 심정을 어찌 형언할 수 있으랴!

반듯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글씨다.
▲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 반듯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글씨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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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초의선사가 머물던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그런데 자신이 혹평했던 원교의 글씨 편액 '침계루(枕溪樓)', '대웅보전' 등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거침없이 말했다.

"여보게 초의,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대웅보전 현판으로 걸고 있나? 당장 떼어 내리게나. 내가 써 주겠네."

추사는 대웅보전 편액을 써서 걸게 했다. 이왕 붓을 든 김에 초의선사와 차를 나누던 선방에 걸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 글씨도 하나 더 써주었다. 귀양을 가는 길에도 오만한 콧대를 꺾지 않았던 추사였다. 그랬던 추사가 햇수로 9년간의 제주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러고는 대웅보전의 자기 글씨를 떼어내고 이광사의 현판을 달게 했다.

유배 생활 전후로 인생관이 바뀐 것이다. 그동안 금실이 좋았던 부인이 죽었고, 귀양지에서 회갑을 맞았다. 억울함과 외롭고 쓸쓸함을 추사는 독서를 하거나 글씨를 쓰며 달랬다. 노자 <도덕경>에 "물이 깊으면 파도가 고요하고, 배움이 넓으면 말소리가 나직하다(水深波浪靜 學廣語聲低)"라는 구절이 있는데, 추사도 8년여간의 유배 기간을 보내면서 깊은 자아 성찰을 통해 겸손의 덕을 쌓은 것이리라.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제주도는 조선 시대 최대의 유배지였다. 유배지 중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서 죽음의 섬이라 여겼다. 해남에서 제주도까지 열흘 이상 걸리는 뱃길은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먼 길이었다. 가다가 풍랑이라도 만나면 꼼짝없이 고기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서남쪽으로 80리나 떨어진 '모슬포'에 위리안치됐다. 위리안치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유배지에서의 시간은 귀하게만 자란 한양 양반에게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풍토병 때문에 유배 생활 내내 병을 달고 살았던 추사는 모슬포의 바람을 독풍(毒風)이라 불렀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독서와 글씨 쓰기였다. 그를 후려치던 모진 비바람과 파도는 고스란히 서법에 녹아들었다. 추사체는 그렇게 분노와 울적함을 쏟아내려는 쉼 없는 붓끝에서 피어났다.

시련으로 완성된 '학예 일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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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를 그린 것은 제주도로 유배된 지 다섯 해가 되던 무렵이다. 염량세태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인심은 세력이 있을 때는 아첨해 따르고 세력이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법이다. 추사를 따르던 많은 사람도 그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제자 이상적은 추사가 권력에서 밀려났어도 스승에 대한 마음은 한결같았다.

역관(譯官)으로 중국을 드나들며 귀한 서책을 구해다 바치는 제자의 변치 않는 성심에 감동한 추사는 <세한도>를 그렸다. "날씨가 추워진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직접 체험하고서, 그 구절을 적은 것이리라. 추사와 같이 학식이 깊고 통찰력을 갖췄다고 자부했던 인물도 세상인심의 비정함과 간사함을 톡톡히 맛본 이후에야 비로소 성인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대목이다. 만약 유배를 오지 않고 인생의 양지만 밟았더라면, 아마 우리가 보는 추사체와 <세한도>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기교가 매우 뛰어난 글씨를 남기지 않았을까?

우리는 흔히 한마디로 추사체라고 말하지만, 추사체를 보면 매우 다양해 과연 어떤 글씨를 추사체라고 하는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에서도 서체상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개성이 강한 글씨라는 점뿐이다. 추사의 독창적 서법은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필치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사람의 수가 급증하고 있었다. 추사에 대한 세간의 평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글이 거의 압권이다.

"추사의 글씨체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번 변했다. 젊어서는 그 당시 급진적이었던 동기창의 글씨를 따랐었고, 중국에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의 글씨를 열심히 써서 쓸데없이 기름지고 두껍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다 중년을 지나면서 중국의 구양순을 비롯한 여러 대가의 글을 다 익히더니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여러 대가의 장점은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추사는 평생 많은 문자 도장을 새겨 작품 첫머리에 찍는 두인(頭印)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중에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는 것도 있는데,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추사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봉은사에서 지냈다. 1856년 9월 판전이 완공되자 추사는 '板殿'(판전)이란 글씨를 남기고 사흘 후 세상을 떠났다. 유홍준 선생의 <완당평전>에 보면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 즉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오며, "서법에 충실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라고 평하고 있다.

추사의 만년 작품을 보면 어딘지 서툰 듯하다. 그러면서도 묘한 깊이감과 조화가 느껴진다. 예로부터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추구한 바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었다. 노자 <도덕경>에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말이 나온다. 훌륭한 기교는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수십 년 붓글씨를 연마한 전문 서예가의 작품도 '문자향 서권기'가 없으면 간판장이의 글씨와 다를 게 없다.

추사는 학자이자 예술가로서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학예 일치의 경지를 실현했다. 누가 뭐라든 자기 길을 열심히 걸어간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고 오래도록 향기를 풍긴다.


태그:#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 #추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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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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