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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카네 이웃사촌. 돌카 엄마로부터 채소 꾸러미를 건네받은 그가 집으로 초대했다. 고등학교 선생인 그는 주말 부부로 생활하고 있었다.
 돌카네 이웃사촌. 돌카 엄마로부터 채소 꾸러미를 건네받은 그가 집으로 초대했다. 고등학교 선생인 그는 주말 부부로 생활하고 있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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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카 엄마가 담장 너머로 채소 꾸러미를 넘긴 사내와 라다키어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저만치 서 있는 나를 향해 차를 마시는 몸짓을 보이며 말했다.

"아똥, 아똥! 짜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라다키 사내는 부인으로부터 어린 아기를 건네 안으며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줄레!"
"줄레!"

'나마스테'가 '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인도 인사말이라면 '줄레'(juley)는 라다키의 인사말이다. 그는 돌카 엄마가 나에게 말했던 '아똥'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는지 영어로 말했다.

"짜이 한잔하시죠. 라다키어로 아똥은 먹는다, 마신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돌카 엄마로부터 배웠습니다."

사내의 집은 넓었다. 너른 앞마당을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텃밭에는 돌카네 채소밭에서 보았던 치커리, 케일, 시금치, 완두콩, 고수 등의 갖가지 채소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안락한 소파가 놓여 있는 그의 거실에는 제법 큰 책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돌카의 8촌이라는 그는 영어가 유창한 고등학교 선생이었다. 그가 근무하는 학교는 이곳, 초크람사의 요코마 마을에서 열 시간 거리에 있어 주말 부부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내가 내온 달콤한 짜이를 마시며 물었다.

"라다크에도 티베트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꽤 있죠?"
"예, 라다크에도 중국의 침략으로 티베트에서 망명한 많이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인도 국적을 가지고 있는 라다키도 티베트 사람입니다. 하지만 티베트에서 망명한 사람들은 인도 국적이 없습니다."

그의 말로는 티베트 망명자들은 땅이나 집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인도 국적을 가진 티베트인, 라다키들의 명의로 땅이나 집을 구입하고 있다고 한다.

"집 앞에 있는 텃밭을 봤습니다.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 텃밭을 일구기 어려울 것인데 누가 농사일을 합니까?"
"아내가 틈틈이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라다크의 중심지 레의 근교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 초크람사 요코마는 네 개 마을로 구성됐다고 한다. 대도시 주변 마을답게 약 2천 명의 라다키들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의 주민이 대대로 농사지어온 농토를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화 바람이 불어오면서 남자들은 도시에 나가 돈벌이를 하고 있고 농사일은 여자들의 몫이 됐다고 한다.

"나도 한국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대부분 채소 씨앗을 직접 받아 농사를 지었는데 이곳에서는 씨앗을 어떻게 구합니까?"
"평생 농사를 지어 오고 있는 돌카 엄마는 씨앗을 받아쓰고 있습니다. 우리도 몇 가지 토종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접 받아쓰는 토종 씨앗
 직접 받아쓰는 토종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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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일반 씨앗의 반값으로 판매하는 토종 씨앗
 정부에서 일반 씨앗의 반값으로 판매하는 토종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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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기다리라며 어디선가 씨앗 봉지와 씨앗 통을 가져왔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씨앗은 직접 받아쓰는 토종 씨앗이었다. 예전에는 3년마다 다른 마을의 토종 씨앗들과 교환해서 쓰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포장된 씨앗을 내밀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이 씨앗은 종묘상에서 사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정부에서 판매하는 토종 씨앗입니다."
"정부에서 토종 씨앗을 판매하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이곳 농민들 대부분이 정부에서 관리하는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씨앗은 일반 씨앗에 비해 반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일반 종묘상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이 씨앗은 토종 씨앗을 보존하기 위해 정부가 씨앗 가격의 반을 부담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지혜로운 방법이네요. 정부에서 토종 씨앗을 관리하고 농민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씨앗을 구입할 수 있고…."
"한국의 농부들은 당신처럼 씨앗을 받아씁니까?"
"아닙니다. 거의 모든 농가에서 종묘상의 씨앗을 구입해서 씁니다.  종묘상에서 나오는 씨앗은 한국의 토종 씨앗이 아닙니다. 한국의 종묘 회사들은 이미 오래전 몬산토 등의 다국적기업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자금력과 기술이 막강한 몬산토, 시젠타 등의 다국적기업들은 곡물회사와 전략적 제휴를 통해 전 세계 종자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다.

"몬산토 등의 다국적기업에서 유전자 조작 씨앗을 판매한다고 하던데요."
"예 맞습니다. 그들이 판매하는 씨앗은 받아서 쓸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내놓는 종자들 대부분은 일회용 씨앗에 불과하다. 그 씨앗으로 자란 작물에서 씨앗을 받아쓰면 아예 싹이 트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애초에 발아 능력을 없애버린 것이다. 그나마 발아 능력을 가진 씨앗들은 수확량이 떨어지게 개량해 놓았다.

이들은 모든 농민이 공짜로 얻던 씨앗을 팔기 위해 씨앗에 유전자변형을 일으켜 대를 잇지 못하는 씨알머리 없는 작물로 만들어 특허권까지 얻고 있다. 결국 이들의 독점으로 농가는 농산물 재배의 비용과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위험을 감수해 가며 부채를 떠안게 된다.

나는 그들이 판매하는 배추 씨앗을 받아 쓴 경험이 있다. 다른 씨앗에 비해 가격이 비싼 배추 씨앗을 받아 고집스럽게 8년에 걸쳐 재배했었다. 그들의 씨앗을 받아 재배한 배추 중에 속이 꽉 찬 배추를 수확한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무처럼 뿌리가 굵고 속 알맹이가 없는 것처럼 잎사귀만 무성한 기형 배추가 나왔다.

라다키들의 토종 씨앗을 보다가 문득 인도의 종자 비축 운동을 이끌고 있는 여성 생태운동가인 반다나 시바가 떠올랐다. 그녀는 생물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인도의 전통 농업을 지키기 위해 데라둔의 나브다냐에서 농부들에게 유기농법을 가르치고 조건 없이 씨앗을 빌려주고 씨앗을 갚게 하는 종자 은행을 설립했다. 어쩌면 이곳 라다크에서 지켜나가고 있는 토종 씨앗 또한 그녀의 노력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 사촌들과 함께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시냇물에 채소를 씻어 자루에 담고 있는 돌카
 이웃 사촌들과 함께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시냇물에 채소를 씻어 자루에 담고 있는 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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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다발을 등에 지고 시장으로 나서는 돌카엄마와 이웃사촌들
 채소 다발을 등에 지고 시장으로 나서는 돌카엄마와 이웃사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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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카네 이웃사촌의 집에서 점심 식사까지 챙겨 먹고 돌카 모녀와 함께 다시 밭으로 나섰다. 마을 길에서 만난 몇몇 아낙네가 일손을 거들기 위해 밭에 따라갔다. 밭작물들이 고새 땡볕에 축 늘어져 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설산이 훤히 보였는데 산봉우리에 잔설이 남아 있을 뿐이다. 7월 초순의 라다크 밤은 춥지만 한낮은 뜨겁다.

돌카 엄마가 장에 내다 팔 채소들을 뽑아내면 돌카와 마을 여성들이 밭 저만치로 흐르는 냇가로 가져갔다. 땡볕에 축 처져 있던 채소들이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온 냇물에 싱싱하게 살아났다. 시냇물에 말끔하게 씻어낸 채소들을 종류별로 다발다발 묶고 있는 돌카에게 물었다.

"이곳 밭작물들은 언제 씨를 뿌리고 수확은 언제부터 합니까?"
"4월까지 눈이 내리기도 하는데 대체로 4월부터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립니다."

수확은 6월 말부터 9월 초순까지. 9월 말이나 10월 초순부터 눈이 내리고 땅이 얼기 시작한다. 그 무렵이면 히말라야 설산이 얼어붙어 시냇물이 흐르지 않는다. 농지는 긴 휴식기에 들어간다고 한다.

돌카와 이웃사촌들의 도움으로 채소 작업이 손쉽게 마무리됐다. 종종 톨카가 일손을 도울 때도 있지만 대부분 돌카 엄마 혼자서 작업한다. 자루에 가득 담긴 채소 다발을 등에 지고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가벼워 보였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라다키어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깔깔깔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었다.

칼라차크라 행사로 혼잡한 초크람사 거리에 좌판을 펼쳐 놓고 채소를 팔고 있는 돌카 엄마
 칼라차크라 행사로 혼잡한 초크람사 거리에 좌판을 펼쳐 놓고 채소를 팔고 있는 돌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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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카네 밭에서 다발다발 묶여 나온 채소는 채소상에 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돌카 엄마는 초크람사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좌판을 펼쳐 놓고 있는 아낙네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좌판을 펼쳐 놓고 있는 아낙네들은 그 누구도 손님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돌카는 칼라차크라 행사장으로 떠났다. 나는 돌카 엄마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목소리를 높였다.

"채소가 아주 신선합니다.! 한 다발에 단돈 10루피에서 20루피! 달콤한 채소가 왔습니다. 과일처럼 달콤한 채소 사 가세요!"

돌카 엄마는 물론이고 옆에 줄지어 앉아 있는 아낙네들이 깔깔깔 웃어 댔다. 칼라차크라 행사로 혼잡하게 붐비는 거리에서 낯선 이방인, 그것도 아낙네들 사이에서 수염발 허연 낯선 이방인이 '채소 사세요'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고 모여들었다.

총각무처럼 생긴 달콤한 무는 한 다발에 10루피에서 20루피. 국거리용 채소는 세 다발에 20루피에 팔고 있었다. 대략 무 종류는 열댓 묶음, 몇몇 채소는 서른 묶음, 고수와 샐러드용 채소 몇 다발을 포함해 좌판에 내놓은 채소는 모두 오십여 다발 정도 됐다.

이것을 다 팔면 우리 돈으로 만 원도 채 안 되는 4백 루피에서 5백 루피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일주일에 세 차례 정도 좌판을 벌여 팔면 한 달 수입은 우리 돈으로 10만 원 정도다. 채소 수확기가 3개월~4개월에 불과하니 일 년 수입은 30여만 원 정도. 그만큼 소박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손이 갈라지고 터지도록 농사지은 오십여 다발의 채소를 다 팔면 우리 돈으로 만원도 채 안 되는 4백 루피에서 5백 루피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손이 갈라지고 터지도록 농사지은 오십여 다발의 채소를 다 팔면 우리 돈으로 만원도 채 안 되는 4백 루피에서 5백 루피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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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카 엄마는 채소 농사를 지어 거리에서 좌판을 펼치는 일을 결혼 전부터 해왔다고 한다. 결혼 후에는 이 일로 두 남매를 먹이고 가르쳤다. 나중에 돌카로부터 들어 알게 된 것인데 그녀의 남편은 라다크에 산업화 바람이 한창 몰아닥칠 무렵 돈 벌러 대처로 나가 여태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한 장 없다고 한다. 당시 아이들은 넷 다섯 살에 불과했다.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세 다발의 채소를 팔 무렵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3500m의 고지대에서 그것도 평소에 없던 땡볕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어젯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칼라차크라 행사장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2km 가까이 되는 숙소, 돌카네 집으로 터덜터널 걸어 돌아왔다.

오후 7시. 돌카네 엄마가 칼라차크라 행사장을 다녀온 인도 청년 쌍께와 함께 환한 웃음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평소보다 많은 채소를 팔았다고 한다. 몇 다발 남겨 온 풀 죽은 채소는 물에 담가 놓았다가 생기를 되찾는 놈들을 골라 요리해 먹는다고 한다.

채소를 가득 담아 갔던 자루에서 식빵을 꺼낸다. 내일 아침 우리가 먹을 양식이다. 그녀는 어제처럼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소들의 먹이를 주러 옛집으로 나선다. 라다크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라다키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돌카가 우리의 수제비와 비슷한 뗌뚝을 만들었다. 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나서 두 모녀가 어제처럼 집 옆으로 흐르는 도랑으로 나서 설거지를 했다. 도랑 주변에는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라다크 들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도랑에 쪼그려 앉아 설거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다운 들꽃처럼 다가왔다.

이름 모를 들꽃들, 어떤 꽃이든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해도 그 꽃은 이미 아름답다. 꽃이 그렇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름과 학벌 재산과 명예 따위를 따지지 않고도 그 사람의 성품, 마음씨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마음씨가 고우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들꽃 만발한 도랑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돌카 모녀를 사진기에 담다가 문득 오래전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꽃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꽃보다도 아름다운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이 내게 이른다.
세상에 향기를 주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이른다.
세상에 자비로운 향기를 주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말할 수 있다 이른다.

손이 갈라지고 터지도록 농사지은 채소를 등에 이고 거리로 나가 좌판을 펼쳐놓고 살아가면서도 낯선 이방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먹이고 재워주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돌카 엄마, 딸과 함께 두런두런 웃음꽃을 피워가며 손끝 시린 도랑물로 설거지를 하는 돌카 엄마가 꽃보다 아름답게 다가왔다.

들꽃 만발한 집 옆으로 흐르는 도랑에서 설거지하는 돌카 모녀
 들꽃 만발한 집 옆으로 흐르는 도랑에서 설거지하는 돌카 모녀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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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라다크, #토종씨앗, #채소 농사, #라다키 새링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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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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