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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산맥의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환경조건이 너무나 척박했다. 그럴수록 잉카인들은 더욱 태양신에게 매달렸다.
▲ 쿠스코의 '태양제' 안데스산맥의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환경조건이 너무나 척박했다. 그럴수록 잉카인들은 더욱 태양신에게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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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땅은 해발 3000m 이상의 고산지대이고, 안데스산맥 줄기인 가파른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작지를 일구어도 날씨가 좋지 못하면 수확이 어려운 환경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조건을 극복해서 생존해야만 했기 때문에 잉카인들은 매우 강인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수천 년을 흘러 스페인 점령군이 침략했던 16~17세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주요인이었다.

잉카인들은 나쁜 환경조건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신의 권능을 삶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간주했다. 잉카인들이 태양신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고, 제국 전체가 '태양제'에 참여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운이 좋게도 잉카축제가 열릴 때 쿠스코를 방문하게 되었다.

잉카 문명의 석조기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태양제’는 거대한 석벽의 잉카유적지 ‘삭사이와만( Sacsayhuaman)'에서 시작되어 쿠스코 대성당까지 약 2 ~ 3Km의 거리 퍼레이드가 이어진다.
▲ 태양제이 '거리퍼레이드' ‘태양제’는 거대한 석벽의 잉카유적지 ‘삭사이와만( Sacsayhuaman)'에서 시작되어 쿠스코 대성당까지 약 2 ~ 3Km의 거리 퍼레이드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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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축제인 '태양제'는 매년 쿠스코에서 6월 15일쯤부터 2주간 밤낮 구분 없이 매일 열린다. 예전에는 밤새 축제가 열렸다고 하나 최근에는 자정쯤 축제가 끝난다. 아무래도 치안유지와 축제 참여자들의 건강문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태양제'는 쿠스코에서 북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거대한 석벽의 잉카유적지 '삭사이와만(Sacsayhuaman)'에서 시작되어 쿠스코 대성당까지 거리 퍼레이드가 이어진다. 축제규모는 엄청나고 방대했다. 밤늦게 호텔로 돌아가도 잉카인들의 전통악기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삭사이와만은 AD 15세기 잉카의 전성기 때 파차쿠텍(Pachacutec) 왕이 건설을 시작해서 그다음 후계자 시절에 완성했다고 한다. 가장 큰 벽은 높이 9m, 무게 350톤에 이른다. 당시 크레인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렇게도 큰 돌을 쌓아 올렸을까? 그야말로 '써프라이즈'다.

가까이 가서 돌의 석조과정을 살펴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서로 다른 크기의 돌들을 미세한 틈조차 없게 쌓아 올리고 모서리 부분은 절묘하게 돌을 깎아 이어 붙였다. 마치 성벽처럼 보여 요새라는 설도 있고, 쿠스코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 시절이라는 학설, 그리고 잉카시대 푸마를 숭배해서 쿠스코를 푸마 모양으로 건설했는데, 삭사이와만은 그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는 설까지 다양한 견해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분명한 것은 잉카인들의 석조기술이 놀라운 수준이라는 점이다. 이미 마추픽추에서 확인해봤지만, 그들의 바위를 깎는 정교한 기술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AD 15세기 잉카의 전성기 때 파차쿠텍(Pachacutec)왕때 건설된 ‘삭사이와만’은 요새로 건축되었다는 설과 수로시설이라는 학설 그리고 잉카시대 푸마를 숭배했는데, 그 머리 부분이라는 설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 삭사이와만 유적 AD 15세기 잉카의 전성기 때 파차쿠텍(Pachacutec)왕때 건설된 ‘삭사이와만’은 요새로 건축되었다는 설과 수로시설이라는 학설 그리고 잉카시대 푸마를 숭배했는데, 그 머리 부분이라는 설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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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의 각 부족들이 입장하는 것으로 태양제는 시작된다. 잉카족은 쿠스코를 중심으로 크게 4개의 부족으로 나뉜다 그 부족들은 색깔로 구분되는데 그들의 색채감은 원색적이었다. 군사들에 이어 시녀들이 입장을 하고 신분에 따른 각 계급의 부족원들이 그다음으로 입장을 하고 끝으로 황제가 등장하여 신에게 제례를 올린다.

산토 도밍고 성당 앞에서 퍼레이드는 모든 부족이 함께 춤을 추면서 태양제는 끝이 나고 아르마스광장까지 축제 참여자들 모두가 거리행진을 몇 시간 동안 계속한다. 댄스를 하면서 또 풍악을 울리면서 이어지는 거리 퍼레이드는 대장관이다. 형형색색의 전통 잉카인들의 복장을 한 무희들이 펼치는 거래행진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의 눈에는 신비롭기만 하다.

추수감사절을 겸한 기우제 성격의 태양제가 성대했던 것은 그만큼 잉카인들에게 주어진 환경조건이 좋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태양신인 인티(Inti)가 그들을 돌봐서 생존을 보장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전쟁과 제국의 멸망... 가슴 아픈 잉카의 역사

석벽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인 삭사이와만은 스페인점령군과 잉카제국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고통의 땅이다.
▲ 잉카제국군과 스페인점령군 사이의 전투 공간 석벽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인 삭사이와만은 스페인점령군과 잉카제국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고통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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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제가 삭사이와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픈 역사적 유래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롭던 잉카제국에 스페인 점령군이 1526년 침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군과 잉카군의 치열한 전투는 삭사이와만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와 친인척의 스페인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가 파나마 지역에서 내려와 1526년에 잉카제국에 도착했다. 그들이 찾던 엘도라도(El dorado, 황금도시)에 가장 근접한 제국이었고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제국을 점령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그 이전인 1519년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인들이 멕시코에 상륙하였고, 그 일부는 파나마 지협에 진출하여 원주민의 황금을 약탈하면서 파나마 시를 건설했다. 그런데 파나마 시의 시민들 가운데 일부의 사람들이 남쪽 지역을 탐험하던 중 남쪽 바다 저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는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1524년 파나마 시의 유지인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는 신부 에르난도 데 루케의 말에 따라 환상의 제국을 찾아 남쪽으로 탐험할 계획을 세웠다.

피사로가 스페인에서 다시 돌아왔던 1532년에 잉카제국은 후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Atahualpa)의 내전과 중미(스페인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에서 번진 홍역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진 상태였다. 피사로는 겨우 180명의 병사와 대포 1문과 27마리의 말만 3척의 배에 나눠 태워 데리고 왔기 때문에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면 잉카군을 당해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1월 16일 저녁, 아타우알파의 군대를 카하마르카의 광장으로 유인한 다음 기습공격을 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음으로써 마침내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군의 목적이 황금이라는 것을 알고 엄청난 양의 금·은을 제시했지만 스페인군은 약속을 저버리고 그를 석방하지 않았다. 결국 아타우알파에게 누명을 씌우고 1533년 8월에 살해하고 동생인 망코 잉카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다.

‘태양제’ 거리퍼레이드에서 잉카제국군 분장을 한 참가자와 잠시 사진촬영을 했다.
▲ 잉카제국군 분장 ‘태양제’ 거리퍼레이드에서 잉카제국군 분장을 한 참가자와 잠시 사진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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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코 잉카는 스페인군 내부에서 피사로와 디에고 대 알마그로 사이에 서로 암살하는 등 갈등이 표면화되자, 그 틈을 타서 잉카제국을 되찾기 위해 1536년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다. 망코는 쿠스코의 스페인군을 모두 죽이면 리마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공격해 페루 중앙을 해방시킬 생각이었다.

망코는 세력을 넓혀갔다. 잉카군은 10만~20만 명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잉카군의 주력부대는 농부나 목동이었고, 군사들은 정글 활, 새총, 단창, 도끼를 들고 나왔다. 망코는 1536년 5월 6일에 스페인군을 향해 총공격을 명령했다. 원주민은 언덕 아래의 도시를 향해 창, 돌, 화살을 마구 날렸다. 거리에 있던 스페인 병사는 급히 몸을 숨겼다. 엄호지원을 받은 백병전 병사는 밀집대형으로 천천히 도시로 들어가 중앙광장으로 향했다.

거리 퍼레이드에는 남미 원주민들도 많이 참여한다. 아이마라족도 있고 케추아족도 있다.
▲ 남미 원주민들 참여 거리 퍼레이드에는 남미 원주민들도 많이 참여한다. 아이마라족도 있고 케추아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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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의 군대는 4000km에 이르는 제국을 정복한 전사군단으로 이제는 잉카제국의 수도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 망코의 전략은 간단했다. 먼저 스페인군을 중앙으로 몰아넣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동시에 공격해서 궤멸시키는 전략이었다. 다른 곳에 있던 스페인군도 잉카군의 공격이 줄어든 틈을 타 중앙광장으로 후퇴했다.

스페인군의 전략은 중앙광장의 순투르 후아시(Suntur Huasi)와 하툰 칸차(Hatun Cancha) 석조건물에서 버티는 것이었다. 에르난도 피사로와 에르난 폰세 데 레온이 한 건물씩 차지하고 지휘를 맡았다. 스페인군이 두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기자 잉카군의 투척무기가 비가 오듯이 쏟아졌다.

거리 퍼레이드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고 방대했다. 구경하는 관광객들 숫자도 3만 ~ 5만 명은 되는 듯 보였다. ‘태양제’ 기간 동안 쿠스코 전체가 들썩거렸다.
▲ 쿠스코대성당 앞 내빈석 거리 퍼레이드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고 방대했다. 구경하는 관광객들 숫자도 3만 ~ 5만 명은 되는 듯 보였다. ‘태양제’ 기간 동안 쿠스코 전체가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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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군은 태양신 인티(Inti)가 하늘에서 언덕 아래로 사라지면 잉카군도 뒤로 물러나 그날 하루를 마무리할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망코의 군대는 중앙 광장 부근까지 장악한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페인군은 기병돌격이 최후의 전술이었다. 기병이 돌격하며 잉카군의 대열을 무너뜨리면 보병이 뒤따라가 수많은 병사를 베고 찔러서 죽였으며 거리는 온통 피로 물들여졌다.

거리에 시체가 쌓이고 잉카군이 장애물을 설치하면서 기병의 파괴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잉카군의 숫자와 기세는 대단했지만 스페인 병사 하나를 죽이려면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원주민 전사가 죽어야 했다. 스페인군의 중장갑, 말과 날카로운 철제 무기는 원주민 전사의 무기로는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잉카군은 계속 달려들었고 잉카 제국의 상징인 쿠스코의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찼다.

다시 하루를 번 스페인군은 삭사이와만 요새를 야습해서 잉카군의 지휘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방어거점으로 삼았다. 에르난데스와 스페인군은 사다리를 가지고 공터를 안전하게 건너 벽에 다가섰다. 잉카 경비병은 무방비로 기습을 당했고 첫 번째 벽을 너무나도 쉽게 내주었다.

적의 기습을 알게 된 잉카군이 잠에서 깨어나 돌덩이를 던져댔지만 스페인군은 계속 사다리를 올리며 다음 벽을 공격했다. 뒤로 물러나던 잉카군도 마지막 벽인 세 번째까지 몰리자 결국 백병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거리 페레이드는 대장관이다. 형형색색의 전통 잉카인들의 복장을 한 무희들이 펼치는 거래행진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의 눈에는 신비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형모양의 퍼포먼스는 아무래도 스페인점령군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 스페인으로부터 유입된 문화 거리 페레이드는 대장관이다. 형형색색의 전통 잉카인들의 복장을 한 무희들이 펼치는 거래행진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의 눈에는 신비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형모양의 퍼포먼스는 아무래도 스페인점령군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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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샐 때까지 잉카군대는 마지막 보루를 내주지 않았다. 요새에 갇힌 비약 우무와 잉카군 지휘관은 이제 스페인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스페인군은 이들의 통로를 열어주지 않았다.

에르난도 피사로는 나머지 벽의 3개 탑을 동시에 공격했고 궁지에 몰린 잉카제국군은 학살을 당했다. 결국 망코의 첫 번째 반란은 군사 2천~4천 명을 잃고 35명의 스페인군을 죽이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다시 망코는 2차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결국 스페인은 잉카제국을 몰락시키고 대학살을 감행하면서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잉카의 옛 수도 쿠스코의 축제, 낮과 밤 구분 없이 열기 뜨거웠다

길거리에 있는 대형벽화이다. 잉카시대부터 스페인식민지 시절까지의 페루인들의 일상적 삶을 신화적 시각에서 페인팅한 것으로 생각된다.
▲ 길거리의 대형벽화 길거리에 있는 대형벽화이다. 잉카시대부터 스페인식민지 시절까지의 페루인들의 일상적 삶을 신화적 시각에서 페인팅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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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들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사촌인 페드로 피사로가 1571년 잉카 정복기를 남겨서 전해지게 되었다. 마코 잉카 이후에도 저항은 계속되었다. 비루카밤바 최후의 잉카는 투팍 아마루(Tupac Amaru)였는데, 그도 스페인황실이 파견한 5대 부왕에 의해 체포되어 1572년 쿠스코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이렇게도 잉카인들의 저항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잉카인의 고통과 아픔의 역사는 '태양제'의 재현으로 부활되었다. 물론 오랜 역사로 인해 잉카인의 전통문화는 스페인 점령자의 문화와 혼혈이 되었다. '태양제'의 거리 퍼레이드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많이 참여한다.

그런데 그들이 입은 옷은 사실 남미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의 옷이다. 즉 식민지 시절 때부터 입던 옷이다. 거리 퍼레이드에는 남미 원주민들도 많이 참여한다. 아이마라족도 있고 케추아족도 있다. 또 쿠스코의 거주시민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시골의 원주민들도 전통의상을 입고 참여한다.

잉카 원주민의 전통의상을 입은 잉카 후예들이 미국, 유럽관광객들을 상대로 거리음식도 팔고 각종 공예품도 판다. 주로 쿠스크 인근에서 많이 생산되는 옥수수, 감자, 돼지고기, 닭고기 튀김 등과 페루식 막걸리인 ‘치차’와 잉카맥주를 판다.
▲ 잉카원주민들의 거리음식 잉카 원주민의 전통의상을 입은 잉카 후예들이 미국, 유럽관광객들을 상대로 거리음식도 팔고 각종 공예품도 판다. 주로 쿠스크 인근에서 많이 생산되는 옥수수, 감자, 돼지고기, 닭고기 튀김 등과 페루식 막걸리인 ‘치차’와 잉카맥주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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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주민들은 거리 퍼레이드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페루사람들이나 미국, 유럽관광객들을 상대로 거리음식도 팔고 각종 공예품도 판다. 그 수입이 짭짤하기 때문에 시골주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축제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페루와 쿠스코의 유명한 전통음식으로는 페루식 막걸리인 옥수수로 제조한 '치차', 기니 피그로 만든 바비큐 요리인 쿠이 차따도(Cuy Chatado), 길거리에 진열대를 차려놓고 파는 또끄또(tocto, 말린 돼지껍질 튀김), 돼지고기를 기름에 튀긴 요리인 치차론(Chicharron de Chancho) 등이 유명하다. 꼬치요리도 포차에서 맥주와 함께 파는데, 매우 인기가 있다.

마추픽추를 오고 가면서 2박 3일 쿠스코에 머무는 동안 잉카의 후예들의 축제에 대한 열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로 10대들이 학교를 통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외에도 전통의상을 입은 나이 든 사람들이 하루 종일 댄스를 추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2~3km의 거리 퍼레이드를 보름 동안 매일 참여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잉카의 후예들은 관광객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적 퍼포먼스를 보여주려는 즐거운 마음으로 행사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였다. 외국관광객들의 눈에 비치는 그들의 땀과 열정은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다. 잉카의 옛 수도 쿠스코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듯 열기가 뜨거웠다.

덧붙이는 글 | 안데스산맥 줄기인 해발 3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살았던 잉카인들은 자연환경 때문에 강인하고 거친 성격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고 스페인 점령군에게도 쉽게 항복하지 않고 오랜 시간동안 저항했다. 그러한 역사의 상흔이 미국과 유럽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태양제의 거리 퍼레이드에 그대로 남아있다. 여름방학을 활용하여 <잉카에서 마야까지> 배낭여행한 보람이 있었다.



태그:#태양제, #삭사이와만, #쿠스코대성당, #잉카원주민의 거리퍼레이드, #쿠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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