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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삼초'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어떤 한자로 구성된 사자성어일까 싶지만, 풀이를 보면 꽤 단순하다. 대학교 이학년 말에서 삼학년 초까지 애인이 없으면 남은 대학 생활을 솔로로 보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줄여서 '이말삼초'다. 어느덧 대학교 사학년이 돼버린 나는 아무래도 '이말삼초'를 정통으로 겪은 것 같다. 애인이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십삼년 동안 솔로였다.

항상 주위엔 걱정하는 사람들로 넘쳤다. 하기야 초등학생 때부터 '여친', '남친' 하는 시대에 무려 이십삼 년 동안 솔로로 살았으니, 흔치 않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다, 연인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을 뿐. 인연이 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렇게 일 년, 이 년 흐르다 지금이 됐다. "그래도 한 번은 사귀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넌 너무 눈이 높아!", "적당히 괜찮으면 그냥 사귀어" 충고와 걱정은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개인의 노력이 모든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개인의 노력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미디어에서 귀에 땀띠 나도록 들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연애를 못하는 사람이 됐다. 이성에게 어필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 그게 나였다.

개인에게 강요되는 노력은 연애에도 적용됐다. '나'라는 사람은 사라지고 연애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만 남았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미팅도 나가고, 소개팅도 해보고, 대외활동도 하고, 심지어 소개팅 어플까지 깔았다. 연애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괜찮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건 싫었다. 애초에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를 이 오해를 풀기 위해 나는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

<연애하지 않을 자유>
 <연애하지 않을 자유>
ⓒ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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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소개팅이 끝난 날,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만났다. 당시 나는 연애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상대방의 호감을 받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을 가꾸는 것,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추측하는 것, 모든 걸 멈추고 싶었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는 그런 내게 자유를 선고했다.

연애는 그저 그 사람이 그 순간에 누군가와 맺고 있는 관계이자,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의 형식 중 하나다.

'우리는 모두 홀로였다. 날 때부터 애인과 "오늘부터 1일!"을 외치며 나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 비연애 상태는 모두가 경험하는 삶의 일부다. 그런데 왜 홀로는 언제나 기를 쓰고 탈출해야 하는 것, 무능함의 상징으로 여겨질까? 연애하라고 몰아대는 이 '보이지 않는 손'은 도대체 어디서 뻗어 나왔으며, 연애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왜 은폐될까?'

<연애하지 않을 자유>는 연애 여부가 곧 그 사람의 가치인 양 치부되고, 연애 이외의 관계는 무시되는 우리 사회의 연애지상주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연애'라는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뛰어가는 중이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렸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력에서 해방된 지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연애 담론 속 폭력

그제야 보였다. '연애'라는 목적 아래에 겪어왔던 수많은 폭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평가의 폭력'이다. 연애는 몇 단계의 평가를 전제로 한다. 외모, 성격, 경제적 능력 등 그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그래도 너처럼 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있어!" 나는 나의 외모를 좋게 평가해줄 사람, 내 얼굴에 평균 이상의 점수를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보는 것은 곧 권력을 뜻한다. 그리고 그 권력은 평가를 받는 사람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두 번째, '취향의 폭력'이다. 이십삼 년 동안 솔로였다는 사실은 이십삼 년 동안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했다는 뜻과 같다. 그래서일까, 성적 취향을 심문당하는 일도 많았다. "여자 좋아하는 건 아니지?" 여기서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한다. 동성을 좋아하는 것에 부정적 어미가 붙는 오류와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의 원인으로 성적 취향을 꼽았다는 오류다. 세상이 기대하는 '정상적인' 연애는 이처럼 공격성을 띠기도 하고, 누군가를 배척하기도 한다.

마지막, '호감의 폭력'이다. 두 번째 소개팅이었다. 상대방이 자꾸 손을 잡으려는 게 불편해서 저녁만 먹고 집에 갔다. "그만큼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야." 불쾌했다. 친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지만, 동의 없는 스킨십은 엄연한 폭력이다. '호감'으로 포장될 수 없다. 연애를 목적으로 한 만남이라 해서 일방적인 스킨십이 가능하다면, 그때 의미하는 '연애'가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연애하지 않는 자, 행복하라

'비연애'라는 말은 국립국어원이 정의한 협소한 '연애'의 정의(남녀 간의 열렬한 사랑)에 반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여기에는 엄연히 연애를 하고 있음에도 세상이 연애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비가시화되는 성수자의 연애도 포함된다. 따라서 비연애 담론'은 연애지상주의, 이성애중심주의, 결혼지상주의에 대항하는 모든 목소리와 움직임이다.'

연애라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연애를 강요받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연애하지 않음'을 존중받고 싶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연애일 뿐이다. 결핍이 아닐 뿐더러, 하지 않음에 대해 압박을 느낄 필요도 없다. 나는 이십삼 년 동안 솔로였지만 좋은 사람들과 다양한 인연을 맺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말삼초', 그게 뭐 대수겠는가.

연애의 뜻이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이라 했을 때, 그 반대의 뜻은 '남녀가 서로 미워하거나 증오함'이다. 다시 말해 비(非) 연애, '연애하지 않음'은 연애의 반대말이 아니다. 어쩌면 반복되는 노력에서 잃어버렸던 건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치일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향했던 시선을, 타인에게 두었던 무게를, 하나씩 나에게로 돌리고자 한다. 무심코 입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하나씩 보듬으면서 말이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 - 행복한 비연애생활자를 위한 본격 싱글학

이진송 지음, 21세기북스(2016)


태그:#연애하지 않을 자유, #이진송,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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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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