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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배움터경당)은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며 2014년부터 해마다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열어왔습니다. '생명의 교육, 길을 찾아서'(2014년), '나로부터 행하는 교육, 공적 글쓰기'(2015년), '생명의 교육, 역사 위에 서다'(2016년)를 거쳐, 올해는 '생명의 교육, 생명의 마을'을 주제로 정했습니다. 

2017교육문화연구학교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안양 동안구 비산3동 마을을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과 소망을 담아 진행됩니다. 기간은 10월 13일부터 12월 29일까지이고, 비산동 마을 관련 6가지 주제(△마을개선, △마을허브공간, △언론출판, △농사준비, △재개발연구, △문화사업)를 나눠 총화와 팀별 세미나 및 마을 대상 다양한 실천 활동 등을 병행해 나갑니다. - 기자 말

잎줄기가 그림자와 함께 하트를 그리고 있다.
 잎줄기가 그림자와 함께 하트를 그리고 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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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아날로그 감성에 젖어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때였다. 어느 가게 앞을 지나다 데크에 놓여 있는 화분이 줄기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여 필름에 담았다. 필름을 현상해서 거꾸로 뒤집어 놓으니 데크 밑으로 늘어진 줄기가 그림자와 어울려 하트가 되었다. 입가에 웃음이 절로 번진다. 그리고 한마디. "예술이야!"

시간이 흘렀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거기가 어디였는지, 사진을 찍은 기억조차 흐릿해져 갔다. 그때는 사진을 취미로 찍었지만, 이제는 돈을 받고 찍는다. 필름 카메라는 장롱 신세가 되었고 손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들려 있다. 한 번 촬영에 수백 장, 몇 번 촬영하고 나면 고용량 하드디스크에 수천 장의 사진이 쌓인다.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모니터에 빨려 들어가 이미지 파일에 파묻혀 버릴 것만 같다.

그러다가 바로 얼마 전, 사진들의 무덤을 뒤적여 그 하트 사진 한 장을 다시 찾아냈다. 혹시나 해서 찾았는데 역시나였다. 그때 우연히 필름에 담았던 곳은 바로 여기였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는 공간, '울' 말이다. 그때 그 사진의 현장이 '울'이 되다니!

  누군가를 기다려도 보고, 생각에 잠겨도 보며 날이 저물도록, 하염없이 머물고 싶은 그런 공간, 빛 바랜 필름처럼 그리운 공간, '울'.
 누군가를 기다려도 보고, 생각에 잠겨도 보며 날이 저물도록, 하염없이 머물고 싶은 그런 공간, 빛 바랜 필름처럼 그리운 공간, '울'.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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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들이 모여 틔워낸 공간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날 저물도록 몰랐네


(작사·작곡: 김현성, 노래: 윤도현)

기다림, 만남, 그리고 헤어짐. 시인에게 가을의 우체국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지금의 나에게 '울'이 그렇듯이. 누군가를 기다려도 보고, 생각에 잠겨도 보며 날이 저물도록, 하염없이 머물고 싶은 그런 공간. 빛 바랜 필름처럼 그리운 공간, '울'.

11월 17일 저녁, '울'에 들어서니 배경음악으로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흘러나왔다. 영업시간이 끝났는데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여기 모인 모두가 다름 아닌 '울'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개장식 후 6일, 개장 후 4일 만의 첫 회동이었다. (관련 기사: '울'에서 울리는 만남의 바람) 함께 머리 맞대고 구상해 온 공간은 이제 눈앞에 실재하고 있다.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감격이 있겠지만 몇몇 사람들은 마음에만 담아둘 수 없는 그 소회를 풀어냈다.

"비싼 돈을 들인 것도 아닌데 이 공간이 이토록 좋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하나 고민하고 손때 묻혀가며, 애써 만들어 낸 공간이라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애정을 쏟아 얻어 낸 결실입니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만남들이 쌓여 가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공간이 될지 상상도 안 될 정도입니다." <김주열씨(40세)>

"도면에 그리던 공간,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공간이 이렇게 눈앞에 펼쳐지는 감격이 큽니다. 그 공간을 의뢰한 의뢰인의 모든 것을 공간에 담아내도 사용하는 주인의 성향에 따라 공간은 변모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모여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졌지만, 이 공간을 이용할 다양한 이들에 의해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기대됩니다." <내지선씨(36세)>

"간절한 바람들이 지금 이 공간을 만들어 냈지만, 공간이 여기 현실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기운이 있습니다. 공간의 존재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기운을 주고 받는 화학작용을 하며 새롭게 변해갑니다. <최한솔씨(30세)>

'울' 공간이 주민들과 만나며 어떻게 변해갈지 기대에 찬 참석자들. 왼쪽부터 김주열 씨, 내지선 씨, 최한솔 씨.
 '울' 공간이 주민들과 만나며 어떻게 변해갈지 기대에 찬 참석자들. 왼쪽부터 김주열 씨, 내지선 씨, 최한솔 씨.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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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씨, 내지선씨는 그동안 공간 인테리어를 도맡아 수고했고, 최한솔씨는 공간 운영 및 물품 판매 책임을 맡았다. 이들은 '울'이라는 공간을 배 아파 낳은 자식마냥 생명체를 대하듯 이야기했다. 공간을 만들어 낸 손길들과 간절한 바람들이 이곳을 찾는 발길들을 만나고 어울려 한없이 아름답게 변모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나같이 울에서 사람들을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울'에서는 안 쓰는 물건을 기증받아 저렴하게 판다. 단순히 보면 옷, 신발, 가방 등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장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간 연출자들의 생각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물품 판매를 위한 공간 구성은 전체 공간의 절반에 한정하고 남은 공간은 찾는 사람들이 편하게 이용하고 쉬어갈 수 있도록 음료 셀프바와 테이블, 쇼파 등으로 자리를 채웠다. 서로 물건을 사고팔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 각자의 삶이 '울', 즉 '우리'의 삶으로 변모해 가는 것에 이들의 뜻이 있다.

주거니 받거니 우리가 되어 가는 곳

장미진씨(34세)는 물건이 임자를 만났다며 이곳에서 구입한 한복을 입고 나와 자랑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한복을 구하고 있던 차에 절묘하게 만났다며 기뻐했다. 이명구씨(35세)도 개장 첫날 득템한 모자를 쓰고 나와 요즘 매일같이 쓰고 다니며 자꾸 거울을 보게 된다고 즐거워하며 말했다.

'울' 개장 후 불과 며칠 사이에 많은 마을 주민들이 다녀갔고, 물건들도 임자를 만났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들 법도 한데 편안하게 이용해 주고 만나 주는 모습은 고맙기까지 하다. 매일같이 들러 거리낌 없이 셀프바를 이용하고 간다는 재미난 초등학생의 이야기도 나왔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원래 그렇게 반갑고 편안하고 고맙고 기쁘다. 이웃을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게 만드는 오늘의 문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당찬 사람들이 여기 있다. 기꺼이 공간을 찾아 주고 편안하게 만나 주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울'에게는 고맙고 반갑다.

동네에 이런 공간이 생긴 것을 기뻐하시며 기꺼운 마음으로 물건들을 기증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 동네에서 이십 년을 사셨다는 이웃 분은 한번 오셔서 둘러보시더니 이후 옷, 잡화, 종이 가방 등 온갖 기증품들을 잔뜩 챙겨 오셨다. 색소폰을 연주하신다는 한 마을 분은 들어와 보시더니 공간에 필요하겠다 싶어서 스피커를 기증하기도 하셨다. 강남, 분당, 일산, 구리 등 멀리서도 소식을 듣고 기증해 주시는 분들도 있어 주말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느라 바쁘다.

진열된 상품 모두가 기증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공간에 놓인 테이블, 소파, 냉난방기, 냉장고, 행거 등 필요한 가구나 물품 대부분도 기증받은 것이다. 책, 조명 램프, 스피커 등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기증한 이의 온기가 남아 있는 물건들이다.

'울' 에 들어서면 "물건은 각기 다 주인이 있기 마련이니까요."라는 제목의 글귀를 만나게 된다.
 '울' 에 들어서면 "물건은 각기 다 주인이 있기 마련이니까요."라는 제목의 글귀를 만나게 된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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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에는 안 들어도 저 맘에는 꼭 드는 수가 있거든요. 아조 참 희한하지요. 이것은 팔리기 틀렸다 싶어서 구석에다 쳐박아 뒀댔는데, 일 년에 한번을 와두 환히 알고 있는 것처럼 똑 그 물건을, 있느냐고 사러 온단 말이에요? 내, 탄복을 한두 번 한 게 아닙니다. 나 그럴 때면 사람 인연도 그런 건가 싶습니다. 아, 그래서 항상 진담삼아 농담을 하지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심보를 갖지 말구우, 내가 안 쓸거면 빨리 '버립니다' 꼬리표 붙여서 길에 내 놓으라구요. 그럼 남이나 줏어가지 않겠습니까? 돌보지도 않을 것 버리지도 않구 꽁꽁 묶어 가지고는, 쩌어 캉캄한 광에다가 턱 쳐박아 곰팽이 나게 썩후는 건 죄로 갈 짓이라구 그랬지요." <혼불 5권 - 111쪽>

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첫인상과 같은 글귀다. 이 한 글귀에 울의 뜻이 담겨 있다. 내가 쓰던 물건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는 것이 낯선 세상이 된 지 오래지만, 여기 오는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다.

김주열씨(40세)는 이 땅의 아픈 역사를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집에 소장하고 있던 조정래 작가의 소설 <한강>, <아리랑>, <태백산맥>을 '울'에 기증했다. 그는 요즘 자신이 쓰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좋을 만한 그런 물건들이 없을까 자꾸 집을 두리번거리게 된다고 한다.

'울'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 무언가 '울'에 내놓을 만한 것이 없을까 나누고 싶은 마음이 바이러스처럼 격하게 침투한다. 이 바이러스는 중독성이 강하다.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어 또 나누고 싶고 자꾸 나누고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이고 나눠지는 온기 어린 공간이다 보니 쌀쌀한 초겨울 날씨에 자꾸만 기웃거리고 머물고 싶어진다.

  최봉실 대표는 '울'을 마을 주민과 청소년을 위한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해 달라고 했다. 뒤로 벽면에 보이는 것처럼 전시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최 대표가 기증받은 시계를 소개하며 미소짓고 있다.
 최봉실 대표는 '울'을 마을 주민과 청소년을 위한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해 달라고 했다. 뒤로 벽면에 보이는 것처럼 전시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최 대표가 기증받은 시계를 소개하며 미소짓고 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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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에서 피어나는 문화예술

"근처에 자주 오는 꼬마 친구들이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모님이 늦게 들어오셔서 밤에 근처를 배회하는 친구들이에요. 그 친구들이 여기 와서 머물거든요. 편하게 있다가 옷을 사기도 하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는 것 같아 기쁩니다."

'울'의 기획자이자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최봉실 대표는 '울'이 마을의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나 음악CD, 옷 등 청소년들을 위한 특별 판매 기간을 갖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정선영씨(47세)는 청소년들이 자주 찾을 수 있는 독서모임이나 애니메이션 전시 같은 문화 활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 만남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 또한 이들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최 대표는 지금껏 마을 주민들을 만나고 싶어도 그럴 만한 공간이나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는데, '울'을 열고 나서 자연스럽게 이웃과 만나지는 것에 기뻐했다. 옷이 어울리니 안 어울리니 하는 이야기 하나 가지고도 오랫동안 같이 이웃에 살았던 분처럼 만나게 된다며 감격해 했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돈이 들어가야지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아름다운 마음들이 주고 받아지는 모든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것들을 이웃 분들과 풍성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까운 곳에 아나바다 장터가 생겨서도 좋아하시지만 이곳이 문화예술공간이라는 데 많은 분들이 반가워한다고 한다. 어떤 분들은 이런 공간이 이런 외진 곳에 있으면 손해가 아니냐고 한다. 애초에 이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오기가 생겨서 "이런 곳에 한번 문화예술을 번성시켜 보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전했다.

"물건이 제 임자를 만났습니다." 장미진 씨는 울에서 구입한 한복을 입고 나왔다. 한복은 이틀 전 경당의 학부모님이 기증한 것이다.
 "물건이 제 임자를 만났습니다." 장미진 씨는 울에서 구입한 한복을 입고 나왔다. 한복은 이틀 전 경당의 학부모님이 기증한 것이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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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호 학생(19세, 새들생명울배움터경당)은 새로운 만남을 꿈꾸는 이 공간이 '개척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개척지에 문화를 일구고 예술을 꽃 피우려면 아이디어가 절실하다. 최 대표는 참석자들에게 아이디어를 계속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이디어가 미래로부터 다가왔을 때 손을 내밀어 잘 맞이해 달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을 그 미래가 우리의 현실에 거할 수 있도록 놓치지 말고 잘 붙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무언가 절묘하게 만나고 오묘하게 어우러진 것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예술이야!" 그렇다면 '울'은 미칠 듯이 예술이다. 기증받은 가구들은 오묘하게 공간에 어울리고, 안 쓰던 물건이 여기 오니 절묘하게 쓰이고, 필요했던 물건이 때마침 진열대에 오른다. 기꺼이 내어 주는 마음과 감사히 받는 마음이 절묘하게 만나지는 곳. 예상치 못한 만남의 감격이 가득한 곳. 울은 존재 자체로 심장이 터질 듯이 예술이다.

예술적인 만남은 그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바라기에 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2017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의 참석자들이자 아나바다·복합문화예술공간 울의 개척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지런히 예술 활동 중이다.

덧붙이는 글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카페 바로가기(http://cafe.daum.net/kyungdang)
새들생명울배움터 페이스북 페이지 바로가기(https://www.facebook.com/saedeullifefence)



태그:#교육문화연구학교,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아나바다, #울, #예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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