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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배신

어느 일요일 오후. 밖에 놀러나갔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온 아이들에게 샤워를 시킨 뒤 안방 침대에 누워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이 다투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안방을 나와서 보니 세 아이가 다투고 있었는데, 어찌 되었든 둘째와 셋째가 발가벗은 채로 화장실에서 나와 떨고 있었다. 뒤이어 화장실에서 들리는 까꿍이의 고함 소리.

"들어오지 마! 이제 나, 너희들하고 같이 목욕하기 싫단 말이야."
"아~ 왜? 아빠가 같이 샤워하라고 했단 말이야."
"몰라. 그래도 싫어. 이제 나 혼자 목욕할래. 나가!"

부쩍 성숙해진 까꿍이
 부쩍 성숙해진 까꿍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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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르게 욕실에서 누나한테 쫓겨난 산들이와 복댕이 두 아들은 나를 붙잡고 억울하다며 말을 이어갔다.

"아빠. 누나가 이상해. 우리랑 같이 목욕 안 하겠대.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
"응. 그런데 누나가 싫어할 수도 있지. 누나가 머리가 길어서 말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누나 먼저 샤워를 하라고 하고, 그 다음 너희 둘이 들어가서 하자."
"치. 너무해. 누나 변했어. 우리는 같은 가족인데 왜 샤워를 같이 하지 않겠다는 거지?"
"글쎄. 왜 그럴까?"

나는 짐짓 모르는 체 하면서 그 자리를 피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 상 산들이는 내게서 합당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같은 질문을 던질 텐데, 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9살 2학년 까꿍이는 화장실을 혼자 쓰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예전에는 가족들 앞에서 옷을 거침없이 벗고 속옷을 갈아입던 아이가 이제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샤워를 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목욕을 끝내고 알몸으로 화장실에서 나와 팬티를 찾는 일이 부지기수이지만 그 빈도수는 확연하게 줄어들고 있다.

까꿍이는 그렇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화장품을 구매하는 아이

이제 곧 10살이다!
 이제 곧 10살이다!
ⓒ 유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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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스럽게 카톡으로 말을 걸어왔다.

"여보, 까꿍이 어떡하지?"
"왜? 무슨 일인데?"
"아니 어쩌다가 가방을 들게 되었는데 너무 무거워서 뭐가 있나 하고 살펴봤더니 글쎄 화장품이 있는 거야."
"뭐? 화장품? 초등학교 2학년이?"
"아니 뭐 색조 화장품 그런 거 말고, 기본 파우더 같은 거."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내 딸이 화장을 하겠다고 화장품을 사다니. 아내는 연애할 때부터도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아침에 로션 정도 바르는 것이 전부였다. 결혼한 후에도 내가 아내의 화장한 모습을 본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그런데 까꿍이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화장품을 산걸까? 결국 TV의 영향인가?

빠졌던 이빨도 거의 다 자랐다
 빠졌던 이빨도 거의 다 자랐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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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장품에 대해서 뭐 아나. 그런데?"
"이거 어디서 났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얼버무리더라고. 그래서 솔직히 안 말하면 용돈을 압수하겠다고 하니 그제야 사실대로 불대. 암사역에 있는 올리브*에 가서 자기가 샀다고. 무려 2만8500원씩이나 줬대."
"우아. 녀석 간 크네. 이래서 용돈 함부로 많이 줄 수 있겠나. 그래서 어찌했어?"
"어쩌긴 뭐. 화장품 빼앗고, 용돈 주는 것은 다시 고려해본다고 했지."

그래서일까? 퇴근해서 만난 까꿍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엄마한테 혼나긴 했는데 왜 혼나야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억울함도 섞여 있었다.

"너희 반에서도 화장하는 친구들 있어?"
"5~6명 정도?"
"화장을 왜 하고 싶었어? 엄마도 잘 안 하잖아."
"그냥. 예뻐지고 싶어서."
"어렸을 때는 화장 안 해도 예뻐. 아니, 안 하는 게 더 예뻐. 특히 아빠는 화장 안 하는 여자가 더 좋더라."

아직까지는 품안의 자식
 아직까지는 품안의 자식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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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됐지만 나 스스로 혼란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부모로서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생각보다 성장과 발육이 훨씬 빠른 세대. 그런 아이들을 과거 우리의 기준으로 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자본은 그런 아이들의 동심을 야금야금 파고 들어오고 있는데, 지금 우리의 기준은 너무 투박하고 촌스러운 건 아닐까?

어쨌든 9살의 까꿍이는 그렇게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이제 곧 아빠 징그럽다고 밀쳐내는 시기가 다가오겠지.

아버지의 상처

이랬던 까꿍이
 이랬던 까꿍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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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꿍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오래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가정적이고 자식들과의 스킨십을 좋아하셨는데, 여동생이 4학년이던 어느 날 딸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셨다. 퇴근 후 뽀뽀하자던 아버지에게 여동생이 징그럽다고 한 것이다.

사춘기가 다가오는 딸자식의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아버지에게 그 말은 꽤나 큰 상처였던 것 같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여동생에게 일절 스킨십을 하지 않으셨고, 우리가 커서는 가끔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당시를 씁쓸하게 복기하곤 하셨다. 아마도 아버지에게는 그 순간이 품안의 자식을 떠나보낸 시점인 듯 했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 시점이 내게 닥친 것이다. 아직 까꿍이는 퇴근한 내게 매달리며 반갑다고 인사하고, 자기 전에는 침대에 나를 눕힌 뒤에 껴안으며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아스라한 추억으로 보낼 시간이 다가왔다. 나도 아버지처럼 더 이상 까꿍이를 예전처럼 대하지 못하겠지. 어느새 우리 딸이 숙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고, 그만큼 난 나이를 먹은 거겠지.

아빠와 즐거운 한 때
 아빠와 즐거운 한 때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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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유치원 다니기
 아빠와 함께 유치원 다니기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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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들이 들자 새삼스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 낳았을 때는 이 녀석을 언제 다 키우나 한숨부터 나왔는데, 이제는 어느새 다 커서 페이스북에서 가끔 보여주는 녀석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구나.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을. 현실에 충실하고 지금 이 순간에 더 열심히 까꿍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수밖에. 까꿍아. 이제 아빠도 너를 품안에서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구나. 기특하다 우리 딸. 지금까지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어서 고맙다. 앞으로도 열심히 같이 잘 살아보자꾸나. 징그럽다고 너무 뭐라 하지는 말고.


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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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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