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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17년차, 엄마경력 8년차. 워킹맘 K에게 쓰는 편지는 아이와 일을 사랑하며,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완생을 꿈꾸는 미생 워킹맘의 이야기를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내려 합니다. [편집자말]
사표를 고민하는 K에게

사표를 고민하기전에 따져봐야 할 것들
 사표를 고민하기전에 따져봐야 할 것들
ⓒ ⓒ jadlimcaco,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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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너무 하기 싫고, 출근하기도 싫고, 아이까지 아프고, 사표가 유난히 눈앞에 어른거리는 오늘. 마침,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어. '사표'쓰고 싶다고. 피식, 웃음이 났지. '사실은 나도'라는 말이 올라왔지만, 같이 사표 쓰러 가자고 할 수는 없었어. 알고 있을 거야. 쉽게 쓸 수 없다는 것을.

사표는 사실 직장인의 로망이지. 퇴사 버튼을 누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이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히든카드'이기도 하고…. '사표 낼까요? 말까요?'라고 누군가에게 질문하면 '사표 내세요'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점쟁이한테 가도 마찬가지야. '사표' 내지 말고 최대한 버티는 것. 누구나 그렇다는 것이 뻔한 결론이지. 좀 힘 빠지는 이야기인데, 오늘은 그 힘 빠지는 이야기를 좀 다르게 이야기해보려 해.

워킹맘이 진짜 사표를 쓰고 싶을 때

한번 생각해보자. 워킹맘이 가슴속에 품었던 사표를 진짜 꺼내고 싶은 때는 언제일까? 아이가 아플 때? 아이 학교 행사 때? 아이 봐줄 사람이 없을 때?

글쎄. 나의 경우는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할 때였어.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내가 일한 것만큼 평가를 받지 못할 때…. 내가 이 조직과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나도 월급도둑인 건가? 뭐 그런 비루한 생각이 들 때 정말로 사표를 내고 싶더라. 사실, 아이가 아플 때도 사표가 생각나긴 하는데,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할 때만큼 간절하지는 않았더라고.

평가가 좋지 않으면 옆 사람과 비교를 하게 돼. '쟤는 나보다 평가가 좋네?', '쟤는 운이 좋아서 평가가 좋았나?'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 사표 생각이 나더라.

내가 진짜로 평가를 낮게 받아야 했던 이유를 되돌아볼 여유는 나지 않아. 왜 그런 거 있잖아. 우는 아이 떼어놓고 나와서 하는 일인데, 결국 회사에서까지 인정받지 못하면 '나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

평가가 낮게 나오던 날, 갑자기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더라. 야근했던 순간들, 주말에도 일하러 나왔던 순간들, 열이 펄펄 나서 엄마를 찾는데도 그냥 출근길에 올랐던 순간들, 그리고 나서 저녁에 퇴근하면 웃어주던 아이들 얼굴 말이야.

그날, 아이들이 생각나서 울면서 퇴근을 했어. 그 눈물의 의미를 무엇인지 잘 설명을 못하겠더라. 그냥 서러웠어. 누군가는 평가라는 것이 돌고도는 것이니 괜찮다 라든가, 언젠간 너를 알아줄 거야 라고 위로하지만, 잘 위로가 안돼. 나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고픈 생각이 굴뚝같은 그런 순간이 오더라.

나를 알아주는 곳이 다른 회사면 오히려 나을지도 몰라. 사실 순간적인 감정으로 이직을 알아보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자리를 찾기는 어려워. 이직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준비도 해야 하고, 더 나은 자리가 지금보다 워킹맘을 배려해주리라는 보장은 없거든. 또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는 올인 해야 하는 각오도 필요하고.

내가 아는 한 동료는 욱하는 감정으로 다른 회사 면접을 봤는데, 면접관이 이런 질문을 했대. "아이는 누가 돌봐주나요?". 아, 나름 경력 10년이 넘은 IT 전문가인데, 면접 질문이 '아이는 누가 돌봐주나요?'라니… 남자라면 그런 질문을 했겠어? 또 순간 욱했다더라구.

결국, 그 동료는 이직을 포기했는데, 이직포기의 결정적 사유가 그 면접질문 때문은 아니었어. 그 회사가 야근이 많기 때문이었어. 야근도 싫고, 거기에 아이 키우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힘들 것 같다는 것도 이유였지. 참 쉽지 않아.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곳이 바로 '집'이야. 이 기회에 '집에서 차라리 애나 볼까?'하는 거지. '집에서 차라리 애나 볼까' 하는 생각은 애 보기가 쉬워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야. 알잖아. 애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육아만 한다고 해서 기똥차게 잘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아.

다만,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이와 일, 두 가지 다 챙기지 못했으니 하나에라도 집중하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거지. 일과 육아, 두 가지를 하면서 동동거리는 것보다 '여유'라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돼. 여유와 사표를 맞바꾸고 싶은 시점에 아이가 있더라고.

생각했지. 지금 사표를 써야 하는가, 고민을 말이야. 사표… 쓰고는 싶지만, 쉽게 쓸 수는 없어. 당장 아파트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아이들 학원비며, 보험금이며, 양가 용돈이며.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만 계산해도 사표는 쑥 들어가 버려. 그러면서 갑자기 서글퍼져. 다음날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일상인 거야. 이렇게 일상을 버텨내야 하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사표를 쓰려면 먼저 100일을 버텨보자

나는 사표를 쓰고 싶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 지금부터 딱 100일만 버텨보자
 나는 사표를 쓰고 싶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 지금부터 딱 100일만 버텨보자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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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순간을 버텨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멀리 보지 않는 거야. 멀리 보면 지루해. 당장 숨이 턱까지 차서 힘든 사람에게 산 정상이 저기라고 말해봤자 먹히지 않아.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당장 되돌아갈 수도 있는 전환점이 필요한 거야. 너무 크고 멀리 있는 목표가 아니라, 한 걸음만 더 가면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되는 법이거든. 그럼 조금은 힘을 낼 수도 있어.

나는 사표를 쓰고 싶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 지금부터 딱 100일만 버텨보자. 100일 후에도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고, 지금처럼 사표 내는 것에 변함이 없다면, 그때는 사표를 내는 거야. 그리고 100일이 다가와. 그런데 그때도 힘들지만 사표를 낼 용기는 여전히 없어. 그럼 다시 100일을 연장하는 거야. '100일만 다시 생각해보자. 그때도 죽을 것 같이 힘들면 정말 사표 내는 거야!'.

그런데 마음이란 게 말이야. 물처럼 흘러가버려. 공기처럼 흩어져. 시간이 지나고 흘러가다 보면 마음에 내성이 생기기도 하고, 상황이 변하기도 해서 그냥 또 다니게 되더라고. 그렇게 1년을 버티고 났는데도 사표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다면, 그땐 정말 사표를 써도 된다고 생각해. 12개월 내내 그 생각만 했다는 것은 무언가 절실히 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지금의 조직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을 확률이 크거든.

내가 아는 동료는 그렇게 2년을 버텼어. 그 2년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는지 옆에서 지켜봤었지. 사실, 난 그 동료가 계속 버텨주길 바랐어. 하지만, 2년이 지난 시점에 그녀는 사표를 썼어. 그리고 말했어.

"정말 시원해.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몰라."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 심사숙고했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사표를 쓰고 싶을 때마다 그녀 생각이 나. 지금 그녀는 둘째를 낳고 육아에 전념하고 있지. 그리고 만족하고 있어. 그녀처럼 '사표를 쓴 시원한 맛'은 아직 느끼지 못했지만, 아직 너와 나에겐 시원한 맛을 느끼게 해 줄 시간적인 숙성이 필요할 것 같아.

사표도 준비가 필요해

전환점을 이야기했지? 고지를 앞에 두고, '이 길이 아닌가 봐'하고 뒤돌아설 수 있는 확신이 들려면, 사표를 내 커리어의 끝이 아닌 전환점이 되도록 준비를 해야 해. 준비 없는 사표는 독이 될 뿐이야. 사표를 쓰는 시점에 이직을 하게 되든, 창업을 하게 되든, 혹은 전업맘이 되든 고민의 결과가 나에게 전환점이 된다면 과감해져도 되지. 그러기 위해서는 100일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버티는 동안 준비를 해야 해.

준비의 시작은 일단 실행이야. 책을 읽고, 생각하고, 강의도 들어보고, 정보도 수집하고… 육아하고 일하면서 어떻게 이런 걸 준비하냐고? 천천히 하면 돼. 빨리해야 할 필요가 없잖아. 나에겐 지금 매달 월급을 주는 직장이 있는데,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뭐 있어. 다만, 너무 천천히 준비하다가 페이스를 잃고, 다시 준비 없는 사표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뿐, 천천히 가도 괜찮아.

지금의 커리어가 생계를 위한 것이 더 크다면, 플랜 B는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흐뭇한 일이야. 플랜 B가 있다면, 지금의 직장생활에 너무 많은 가중치를 두지 않아도 돼.

회사에서 알면 싫어한다고? 뭐 어때. 회사는 우리를 언제든지 밀어낼 수 있는 권력자인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잖아. 관계란 서로 동등한 관계가 되었을 때 오히려 건강해지는 법이야. 회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 그러니 지금 회사는 내가 플랜 B를 설계하는 동안 경제적인 지원을 해줄 든든한 지원군쯤으로 생각하자.

그러니까 우리, 일단 사표는 집에서만 쓰자. 시간이라는 숙성을 거쳐서 사표가 나에게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거야. 실패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인생을 멋있게 만들어 줄 전환점 말이야.

회사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속상해할 것도 없고, 순간적으로 욱하는 감정에 휘둘릴 필요도 없어.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 지금 사표가 생각이 난다면, 인생의 플랜 B를 설계할 때가 왔구나, 이런 생각을 하자.

오늘 사표를 쓰고 싶다고 했지? 오늘부터 딱 100일 동안만 버텨보자. 그대의 100일을 응원할게. 그대의 플랜 B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틀, 두가지 삶을 담아내다>(http://blog.naver.com/longmami)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편지, #워킴맘후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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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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