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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 화백의 일기
 문은희 화백의 일기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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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정리작업이 끝날 무렵 문 화백은 자신의 일기(Diary)를 내놓았다. 그 안에는 지금까지 보다 더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사람은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기 싫어하지만, 서로 인간적인 신뢰가 쌓이면 그 고뇌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가 보다.

문 화백은 누드에 한창 빠져 있던 1988년~1990년, 충주로 이사한 1994년, 그리고 청주에서 회고전을 한 2001년의 일기를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해 당시 문은희 화백의 내면과 예술세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부딪치는 일마다 불쾌한 세상, 내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내가 바보일까?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서러움에 흐느끼고 싶다. 어린애같이 와 하고 울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러면 내 자신 무너질 것 같아 오늘도 뼈를 깎는 심정으로 아픔을 견디며 온 힘을 다해 버텨본다. 전생의 죄를 씻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를 위로한다. 많은 그림들을 억울하게 사기당하고, 싼값으로 팔아야 하고, 태산 같은 이자를 물어야 하는 일들이 견디기 어렵다. 이제 늙었는지 담까지 결려온다. 그렇지만 허리띠를 동여매고 크로키를 했다. 그러자 몸 아픈 것을 잊겠다. 귀신 곡할 노릇이다. 그림 그리는 일이 천직인가보다." (1988년 4월 22일)

"빚으로 이어가는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 건가? 수많은 그림이 사장되고 있는데, 하늘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올 들어 처음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겨우 빚을 얻어 이자를 메꾸고 집으로 돌아와 한숨을 돌린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 자신의 삶에 화가 난다. 2만원을 갖고 시장에 가 화풀이 겸 반찬거리를 샀다. 조개젓 2000원, 삼치 1200원, 동태 2000원, 파 500원, 시금치 500원, 고기 10000원.

그래도 화가 치밀어 정희와 눈 구경 나갔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온 세상이 흰색으로 덮여진 화곡동 골목길에서 젊은이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다. 나는 젊은이 집에 전화를 걸어주었다. 무슨 괴로움에 그토록 술을 마셨을까? 측은한 마음에 부인이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부인과 둘이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정희와 함께 골목골목 소복이 쌓인 눈 위를 터벅터벅 걸었다.

여기서 좌절하기에는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다잡아 일어서야겠다. 내 나이 벌써 60이 되었으니 혈압이 오른다. 온몸이 쑤신다. 눈이 흐려진다. 예술적인 고통과 좌절, 가정적인 고뇌, 자식에 대한 고심,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1990년 1월)

마광수와는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MBC <밤의 예술기행> 촬영
 MBC <밤의 예술기행> 촬영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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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 화백은 1990년 4월 8일 MBC <밤의 예술기행>에 출연한다. 당시 '이 사람의 작품세계'라는 코너에 "동양화가 문은희의 이색적인 누드 화풍"이라는 제목으로 문은희 화백의 수묵 누드가 소개되었다.

이때 대화를 주도한 사람은 연세대 국문과 마광수 교수다. 프로그램의 전반부에는 문은희의 삶과 예술세계가 소개된다. 그리고 중반부에 마광수는 문은희 화백에게 누드화와 에로티시즘의 관계에 대해 직설적인 질문 세 가지를 던진다.

'사진과 포르노 잡지에 나오는 누드와 예술세계의 누드가 어떻게 다른가?' '예술과 에로티시즘의 차이는 무언가?' '남자 누드와 여자 누드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문은희의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MBC <밤의 예술기행> 출연: 마광수와의 대담
 MBC <밤의 예술기행> 출연: 마광수와의 대담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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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누드가 철학적이라면, 에로티시즘으로서의 누드는 감각적이다. 누드화가 이념이나 사상을 누드라는 대상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라면, 에로티시즘은 감각적인 외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누드화는 내면적이고, 에로티시즘은 쾌락적이다. 내가 누드화에서 주로 표현한 것은 내면의 고통과 고뇌다. 남자 누드는 근육 때문에 선이 예쁘지 않다. 그러므로 힘을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여체의 선은 부드럽고 굴곡이 있어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동양 누드와 서양 누드의 차이에 대한 대화가 이어진다. 서양의 누드가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 넘어온 것이 대개 르네상스 이후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그리고 서양의 누드가 완성을 향해 채워가는 것이라면, 동양의 누드는 여백을 만드는 비움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동양의 누드에서 생동감이 더 느껴진다고 문은희 화백은 말한다.

그러한 생동감은 오히려 문 화백 누드 군상과 누드 콜라주를 통해 실현된다. 그러나 TV 대담 당시에는 아직 누드 콜라주에 대한 개념이 완성되지 않은 때여서 확실하게 설명을 하지 못한 것 같다. 문 화백의 누드화는 30년 필력과 10년 이상의 누드 크로키와 수묵 작업의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1990년대 문 화백은 누드 콜라주를 완성한다. 문 화백의 그림 인생에서 이룬 최고의 업적은 수묵 누드와 누드 콜라주다.

충주호변 화암리에서 희망을 보다

1994년 5월 12일 충주: 문은희 화백과 황의철 교수
 1994년 5월 12일 충주: 문은희 화백과 황의철 교수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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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 화백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완전히 충주로 온 것은 1994년 5월 14일이다. 그것은 1994년 다이어리를 통해 확인된다. "충주로 이사한 첫날, 비가 옴"으로 적혀 있다. 이튿날에도 하루 종일 비가 온다. 그 때문인지 문 화백은 집안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때 마침 열린 창문으로 새들이 날아 들어와 문 화백을 즐겁게 한 모양이다.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과 생태에 만족해, 다시는 서울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하게 된다.

"이틀 동안 촉촉이 비가 내린 후 해가 드니 신록이 눈부실 지경이다. 아카시아 꽃을 따다 술을 담갔다." (5월 16일)

"오랜만에 안정을 얻게 되어 작품정리를 했다. 저녁에 정씨 할머니 댁에서 생선 매운탕 파티가 열렸다. 훈훈한 인정을 느꼈고 매운탕을 두 대접이나 먹었다." (5월 17일)

"윗집에 심어놓은 조롱박, 한련화를 캐다가 심었다. 오전에는 인절미를 갖고 덕희 할머니 댁에 갔다고 딸기밭에서 딸기를 처음 맛보게 되었다. 오후에는 그림 정리를 했다." (5월 18일)

"어제 고염나무 위로 올라가 말라가는 고염을 털어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았다. 새 항아리에 가득 찬 고염이 익기만 기다리면 된다. 이것으로 올 가을 즐거운 일들이 다 끝나고, 이제 차분히 그림을 그려야겠다. 콜라주 작품 2점이 완성되어 간다. 오늘 아침 좋은 착상이 떠올라 이제부터 대작을 시작할 계획이다." (11월 13일)

"이가원 선생님이 화실을 방문, 화암화실(花巖畫室)이라는 편액을 써주시다. 화제를 보니 '소원이 충주호변 화암 마을에 새롭게 화실을 열었다. 이곳에서 예술이 더 성숙하길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화암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화암리 낭골이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님께 녹차와 술을 대접했다." (12월 18일)

신이 들린 상태에서 최고의 누드 연작이 나왔다

구술 채록 문은희
 구술 채록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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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문 화백은 일기를 제대로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연보를 정리하고 대인관계를 기록하는 글들을 몇 개 썼다. 그리고 누드의 역사를 정리하는 메모도 남겼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글이, 수묵 누드가 자신의 예술과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누드 그리기가 자신의 한과 응어리를 풀어주는 도구이고,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누드화는 신의 선물이라고 했다.

"누드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기나긴 불운의 시대, 뼈를 깎고 살을 깎으면서 높은 탑을 쌓아올렸다. 탑은 하루아침에 쌓아지지 않는다. 수없이 무너진 자리에 상처뿐인 알몸의 나, 누드를 만나게 되었다. 동양화에서는 그려서는 안 되는 게 누드였지만, 나는 누드에의 욕구를 막을 길이 없었다. 49세, 그때까지 그려온 그림도, 가족도 다 버리고 누드를 통해 나의 한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누드를 그릴 때마다 엉킨 실타래가 한올한올 풀리는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 누드는 어렵지만 나에게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누드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무당 같다는 말을 들을 만큼 누드에 미쳐버렸다. 그리면 그릴수록 누드 그림은 어려워졌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흘러갔다. 그 즈음에야 내가 그리고 싶은 누드를 그릴 수 있었다. 1989년 바탕골미술관에서의 누드 퍼포먼스가 그 때까지 모든 한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남자 1명 여자 3명을 모델로 해서 2시간에 150명의 움직이는 누드를 그려냈다.

누드 군상 중 문 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누드 군상 중 문 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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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나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그간 화실에서 1명의 모델만 놓고 그려온 내가 4명의 움직이는 누드를 연작으로 그리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큰 손이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머리에서는 구성, 공간, 포즈의 삼박자가 소리를 내며 지시를 내렸다. 나는 먹으로 글씨를 쓰듯이 술술 크로키를 해나갔다. 지금껏 체험해보지 못한 환희 속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선물이었다. 그 후 나는 한 장의 누드도 더 못 그릴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늘이 나를 부려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만 쉬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가 내 몸을 부리면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부려 이러한 경지까지 오게 만든 것은 아닐까? 누드의 선을 그리는 일이 몸서리치게 무서워졌다.

그 즈음 김기창 선생이 가끔 나의 화실에 들렀다. 말없이 한참 동안 계시다 떠나면서 한마디 툭 던진다. '네가 마티스보다 낫다. 나도 이것은 못 그린다' 선생님만이 수묵 누드의 어려움을 아신 것이다."          

누드 콜라주 앞에 선 문 화백
 누드 콜라주 앞에 선 문 화백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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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 누드 후 문 화백이 택한 장르가 누드 콜라주다. 국립예술자료원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184 <문은희(文銀姬: 1931-)>(2010)에 따르면, 34m, 40m 짜리 누드 연작을 그리고 난 다음,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아 누드 콜라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도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가 누드 콜라주라고 한다. 먹을 기본으로 누드를 표현하고, 거기에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문 화백은 시 같은 수묵 누드를 거쳐 산문 같은 누드 콜라주로 옮겨간 것이다. 수묵누드가 시와 같이 영감과 상상력을 순간적으로 표출한 것이라면, 누드 콜라주는 사상과 감정을 이야기 구조로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 화백의 누드 콜라주에는 스토리가 있다. 문학의 세 가지 장르가 시, 산문, 드라마라면, 그녀의 수묵 누드가 시, 누드 콜라주가 산문, 삶과 예술을 병행하며 겪은 고통과 고뇌가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 마지막 글이다. 그림에 평생을 바친 화가 문은희의 삶과 예술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문 화백은 드라마 같은 삶 속에서 시처럼 담백한 수묵 누드를 완성했고, 산문처럼 스토리가 있는 누드 콜라주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문 화백의 예술세계에 대해 다시 한 번 글을 쓸 수 있길 기대한다.



태그:#일기 , #구술 채록, #수묵 누드, #예술과 에로틱, #드라마 같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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