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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기자 말

입향조는 노봉 김정으로 풍산김씨 동성마을이다.
▲ 창마마을 정경 입향조는 노봉 김정으로 풍산김씨 동성마을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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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름병'에 걸린 사람처럼 숨 가쁘게 돌아 다녔다. 닭실, 바래미, 황전, 선돌, 거촌, 모두 봉화읍내에 있는 마을들이다. 이제 봉화읍에서 북으로 조금 벗어나, 물야면 오록리에 있는 창마마을을 찾아볼 예정이다. 또 하나 봉화의 오래된 마을이다. 내성천 상류에 있다.

창마마을 가는 길

길은 하나다. 태생지로 회귀하듯 본능적으로 내성천의 발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면 창마마을부터 들르게 되지만 어차피 봉화에 들어온 사족들은 주로 안동에서 들어왔기에 이들의 발자국을 되짚어 거슬러 가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7세기중기에서 후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태백산을 향해 있고 내성천가에서 오가는 길손의 안녕을 빌고 있다.
▲ 북지리마애불 7세기중기에서 후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태백산을 향해 있고 내성천가에서 오가는 길손의 안녕을 빌고 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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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마마을에 가려면 물야면 북지리와 가평리를 지나야 한다. 북지리에는 북지리마애불이, 가평리에는 이몽룡의 생가로 알려진 계서당이 있다. 북지리마애불을 만나 각자 안녕을 빌고 계서당을 찾아 '이몽룡 생가'에 얽힌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간다면 마음의 평온과 재미를 동시에 얻을 수 있겠다.

계서당이 이몽룡 생가라고?

계서당은 가평리 안마마을의 창녕성씨 종택이다. 1613년 계서 성이성(1595-1664)이 지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와 종손의 얘기로는 성이성이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실존 인물이고 성이성의 성씨를 춘향이에게 붙여 성춘향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계서당은 이몽룡의 생가라는 것인데 아직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계서당 후손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봉화 창녕성씨 종택으로 1613년 성이성이 지었다. 굽은 소나무는 성이성이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나무로 500년 되었다.
▲ 계서당 전경 봉화 창녕성씨 종택으로 1613년 성이성이 지었다. 굽은 소나무는 성이성이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나무로 500년 되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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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의 아버지 성안의(1561-1629)가 남원부사로 있을 때, 계서는 남원에서 17세까지 4년 동안 공부를 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33살에 문과에 급제, 두 번의 어사를 지냈다. 1639년, 45세에 드디어 호남 암행어사로 남원에 '출두'했다. 남원을 떠난 지 28년 만이다.

계서의 이 짧은 이력은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계서는 남원에 출두할 당시 스승 조경남(1570-1641)을 만나 어릴 적 남원에서 있었던 처자와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주었다 한다. 조경남이 이 얘기를 듣고 꾸민 이야기가 춘향전이라는 것이다.

돌담과 어우러진 창마 고택들

길은 물 따라, 물은 길 따라 흘러, 내성천을 두어 번 건너니 마을 앞이다. 창마마을은 오록(梧麓)마을로 불리다가 마을 앞에 큰 창고가 생기면서 창촌(倉村), 창마로 불렸다. 1694년, 제주목사를 지낸 풍산김씨 노봉 김정(1670-1737)이 이웃마을 오전리에 살던 팔촌형 집에 들렀다가 이곳 터가 너무 좋아 들어왔다는 말이 있다. 사람 눈은 크게 다르지 않나 보다. 내 눈에도 창마의 산세나 물세는 사람들에게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게 보였다.

마을 앞 솔밭이 그윽하다.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하는 비보(裨補)숲이다. 노봉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솔씨를 받아다 심었다 한다. 봉화에서 쌔고 쌘 것이 춘양목인데 제주솔을 심은 이유가 있었던 게다. 

마을 위에는 갈봉산이, 앞에는 만석산과 천석산이 창마를 둘러싸고 있다. 산 아랫마을이라 돌이 많았던 게지. 마을담은 돌담이다. 돌 색깔은 왜 이리 까무잡잡한지. 노봉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제주 까만 돌을 보고 자신이 살던 마을을 꽤나 그리워했겠다.

마을사람이 소과나 대과에 합격하고 교지를 받을 때마다 세운 솟대다. 솟대위에 새대신 용을 달아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예전에 111개가 세워졌다한다.
▲ 솟대와 창마마을 마을사람이 소과나 대과에 합격하고 교지를 받을 때마다 세운 솟대다. 솟대위에 새대신 용을 달아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예전에 111개가 세워졌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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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앞에서 마을을 어디부터 돌아야할지 서성대는데, 마을 한 분이 다가와 "뭔 일입니꺼?" 하고 물어왔다. 사정 얘기를 하니 기꺼이 마을 내력과 집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노봉의 증조부는 팔형젠가, 구형젠가 있었십니더……. 모두 소과는 붙었고, 다섯 형제는 대과에 급제를 했지예. 그 중에 삼형제 후손들이 여기에 세거를 하였십니더."

말은 길게 이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노봉의 고조부, 김대현은 팔형제는 아니고 모두 구형제를 두었는데 마을분이 말끝을 흐린 것은 열일곱 나이에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다 물에 빠져 사망한 여덟째는 마음에 걸렸는지 두루뭉술하게 얘기한 것으로 짐작한다.  

노봉 증조부 중에 오형제가 대과에 급제를 하여 풍산김씨는 전성기를 맞는다. 장남 김봉조, 넷째 김경조, 아홉째 김숭조는 안동 풍산에 세거하고 차남 망와 김영조(1577-1648), 삼남 장암 김창조(1581-1637), 육남 학사 김응조(1587-1667) 후손들이 물야에 세거하였다. 각각 망와파, 장암파, 학사파를 형성 오록문중을 이뤘다. 입향조 노봉이 김응조의 직계 증손이다.

마을 구경은 각 파와 관련된 집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돌담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돌담의 시작인지 끝인지, 시작이라 생각하고 찾아간 집이 장암정. 장암 김창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정자다. 1724년에 세운 것이니 300년 가까이 되었다.

장암 김창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정자다. 마당에 네모난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 해묵은 벚나무 단풍이 고상하게 뽐내고 있다.
▲ 장암정 장암 김창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정자다. 마당에 네모난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 해묵은 벚나무 단풍이 고상하게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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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돌담의 아련한 향수가 담배창고가 붙들었다.
▲ 담배건조장 흙돌담의 아련한 향수가 담배창고가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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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뒤 토방 위에 쪼그만 굴뚝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숨을 언제 거둘지 모르지만 목숨만은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수키와 두 개로 '숨통'을 만들어 놓았다. 장암정 돌담을 타고 담배건조장이 우뚝하다. 언제 사라질지, 운명을 직감한 듯 마지막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암정 굴뚝을 처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암정 옆에 망와고택이 있다. 망와는 장암의 바로 위 형이다. 집은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지만 오록에 들어온 삼파(三派) 중에 망와파의 후손 집으로 보인다. 망와고택의 긴 돌담을 따라 걷다가 마을 중심에 들어가 보았다. 제법 널찍한 팔작지붕 집이 발길을 잡는다. 화수정사(花樹精舍)다. 마을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집이다.

화수는 문중이 화수(꽃나무)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대대손손 화목하며 번성하라는 기대가 섞인 말이다. 화수가 들어간 말로 종친회와 비슷한 화수회가 있다. 이제 친목을 도모하는 일도 돌담 저편, 마을회관에 내주고 말았다.

 풍산김씨 오록문중 가운데 망와파 후손 집으로 보인다.
▲ 망와고택 풍산김씨 오록문중 가운데 망와파 후손 집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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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노봉 김정이 초가로 지었고 나중에 후손이 고쳐지었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글씨로 알려져 있다.
▲ 노봉정사 맨 처음 노봉 김정이 초가로 지었고 나중에 후손이 고쳐지었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글씨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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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 돌담은 화수정사에서 노봉정사로 이어진다. 노봉정사는 증조부 학사 김응조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사다. 노봉은 1696년 진사시에 합격하자 이곳에 터 잡고 1723년에 초가로 정사를 지었다. 현재 정사는 후손들이 고쳐지은 것이다. 현판은 한석봉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 굴뚝은 암놈일까, 수놈일까.

민무늬 몸에 수키와 두 개로 뾰족하게 연기구멍을 만들었다.
▲ 장암정 굴뚝 민무늬 몸에 수키와 두 개로 뾰족하게 연기구멍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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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키와로 몸에 줄무늬를 내고 연가 또한 암키와로 둥글게 만들었다.
▲ 노봉정사 굴뚝 암키와로 몸에 줄무늬를 내고 연가 또한 암키와로 둥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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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이 앙증맞다. 장암정 굴뚝이 민무늬 몸에 연기구멍은 수키와로 뾰족하게 만든 반면 노봉정사 굴뚝은 암키와로 줄무늬를 내고 연가(煙家)도 암키와로 둥글게 만들었다. 굴뚝에 암수가 있다면 장암정은 수놈이요, 노봉정사는 암놈으로 보인다.

정사 바로 옆에 있는 집채는 종택이다. 굴뚝은 안채 멀찌감치 의젓하게 서있다. 쓸쓸해 뵈는 후원에서 수직 장식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정성스레 만들었다. 후원 돌담 아래서 장식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 노봉종택 굴뚝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정성스레 만들었다. 후원 돌담 아래서 장식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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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마에 산그늘이 내려앉았다. 이집 저집 굴뚝에서 솟는 밥불, 군불연기는 무거운 산그늘에 눌려 마을을 덮었다.
▲ 창마마을 저녁녘 창마에 산그늘이 내려앉았다. 이집 저집 굴뚝에서 솟는 밥불, 군불연기는 무거운 산그늘에 눌려 마을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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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파의 흔적을 더듬느라 적잖이 시간이 흘렀다. 마을은 벌써 산그늘이 내려앉아 저물기 시작했다. 망와고택 굴뚝에서 시작한 연기는 노봉종택으로 이어지고 이집 저집 밥불과 군불 연기가 무거운 산그늘에 눌려 마을에 두텁게 내려앉았다.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323년 마을 역사에 세월은 한 겹 더 쌓인 것이다.  


태그:#봉화, #창마마을, #굴뚝, #노봉정사, #장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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