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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 안에 있는 토닥토닥 책방(책방지기 김선경)에서 수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 노래하는 수수 전북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 안에 있는 토닥토닥 책방(책방지기 김선경)에서 수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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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없어 남의 빈집을 찾아 떠돌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김주혜(42)씨다. 뭐 그런 사람이 한둘인가? 했는데 노래하는 사람이란다. 급 호감 발동. 게다가 주로 이 시대의 약한 이들이 집회하는 곳, 이를테면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하는 곳이나 철거민들이 투쟁하는 곳 등에서 노래를 한단다. 자신도 집이 없어 빈집을 떠돌면서 재개발 때문에 쫓겨나거나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쫓겨나는 사람들, 투쟁 현장에서 노래를 한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주혜씨(이하 수수)의 삶을 추적해 본다.

튀는 엄마

"엄마는 자유롭게 살고싶어 했다. 나는 어릴 때 그런 엄마가 너무 튄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보험회사를 다녔고, 대학을 다시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엄마는 평생 종교 순례를 했다. 엄마 덕분에 나도 여러 종교를 경험했다. 여호와의 증인, 대순진리회, 말일성도 교회…."

수수 말대로 어머니 김혜숙씨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가정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라는 에세이를 쓴 적도 있고, "모든 인간은 부모 되면서 해방되어야 한다.", "내가 너의 엄마라는 사실이 나의 모든 건 아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김혜숙씨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대부터 머리를 밀고 다녔다. 머리가 약간 자라면 십자가 모양의 빨간 색 무늬로 물을 들였다. 지나가다 미용실이 보이면 '한 번 밀까?' 하는 생각이 들면 바로 미용실을 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궁금해 모자를 벗겨보기도 했다.

김혜숙씨는 연극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이야기였다. 제목이 <천황 하사품 돌격 제1호>였다. 이 시나리오는 훗날 둘째 딸이 연극으로 만들어 2014년에 같은 제목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일본군 성노예를 주제로 만든 연극 포스터
▲ 일본군 성노예 연극 포스터 일본군 성노예를 주제로 만든 연극 포스터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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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29일, 전북 장수군 장계국민학교(현 장계초) 교사였던 김혜숙씨는 전북지방경찰청 기자실에서 국민학교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실태를 공개적으로 고발한다. 그 전 달 전북 장수 ㄴ국민학교에서 이아무개(62) 교사가 여자 어린이 2명을 상습 추행한 혐의로 파면된 것을 비롯해 전주 ㅈ국교에서도 성추행 혐의로 교사가 퇴직하고 교장, 교감이 징계를 받는 일이 일어났는데 모두 쉬쉬하며 감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김혜숙씨는 '양심선언'을 한다고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그 사건이 언론에 나온 뒤 김혜숙씨는 온갖 음해에 시달렸다. 욕을 하는 전화가 수없이 울렸다. 온갖 상스런 욕을 하면서 교사 얼굴에 먹칠했으니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전화였다. 학부모들도 찾아와 "너 때문에 교사들이 우리 자식 학교에서 못 가르치겠다고 하는데 니가 책임져!"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보복성으로 근무를 못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수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일요일 교장이 찾아와서 엄마 이름을 크게 부르더니 일도 안 하냐고 소리친 것도 기억나고, 엄마가 매일 집에 와서 오늘 내가 볼펜 한 다스를 다 썼다고 하신 것도 기억난다. 1학년부터 6학년 비품 정리를 시킨 거다. 노동운동 하는 사람을 사측에서 조지는 것처럼 그렇게 엄마를 다른 선생들과 완전 공간 분리시키고 선생이 할 수 없는 일을 시킨 거다."

수수는 식구들이 엄마 편을 들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수수도 다른 가족들도 엄마에게 힘이 되어 주지를 못했다.

1994년 4월 29일, 수수의 어머니 김혜숙 교사가 교사들의 제자 성폭행을 고발했다.
▲ 교사의 양심선언 기사 1994년 4월 29일, 수수의 어머니 김혜숙 교사가 교사들의 제자 성폭행을 고발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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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족은 지원해줄 수 없는 거구나 생각했다. 여성운동을 하면 안 되겠구나. 난 나중에 학생운동은 해도 페미니즘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되겠다, 그런 걸 하면 가족에게도 내팽개쳐진다. 전북 대학생들은 데모하다 여기 저기 닭장차에 실려가고 그러면 영웅취급하고 광주에 대한 얘기, 김대중 이야기, 민주화 이야기 전라북도에서는 전부 영웅 취급하는데, 유독, 페미니즘 '페' 자만 나오고 여성의 성폭력, '성' 자만 나오면 그 피해자를 엄청나게…. 무서웠다."

김혜숙씨는 남원교육청 관내로 보복성 발령을 받아 하루에 버스 두 번만 다니는 오지로 쫓겨났다. 하지만 김혜숙씨가 터뜨린 물꼬로 전국 최초로 성폭력예방치료센터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전북에 성폭력상담센터도 생기고 전국에 퍼지기 시작한다.

김혜숙씨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종교를 해체하고 싶어 마고성과 박제상의 부도지를 믿는다. 우리나라 역사는 1만 5천 년의 역사인데 1만 년이 빠진 5천 년 역사밖에 남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수는 생각이 다르다.

"엄마랑 나랑 생각이 그 부분에서 다르다. 엄마는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애국하는 마음이랄지, 민족의 뿌리를 찾는데 관심이 많다. 나는 기지촌, 혼혈아이들, 재일동포, 결혼이주여성, 입양인, HIV/AIDS 감염인들을 만나다 보니 국가가 뭔가 폭력의 씨앗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정상, 보통, 규범이라는 틀에 집어넣고 그 틀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많이 생각한다."

수수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서 어머니 김혜숙씨 삶을 조금 되돌아봤다. 어머니의 삶은 여기서 줄인다. 수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갈 데가 없었다

"내가 노래를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집이 없어서 돌아다닌 게 한 5년 되는데 사람들한테 의지해서 하루하루 자고, 이런 생활을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둥지에 나를 부르는 게 좀 그렇잖은가. 그럴 때 술도 얻어먹고 그 사람 집에 초대받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노래다. 노래를 부르면 어, 우리 집에 와서 자라. 그런 경우가 많더라. 그렇게 생계형으로 노래를 불렀다."

사실 집 없는 사람이 수수뿐만이 아니다. 서울에서 살면서 내 집이라고 할 만한 집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수수는 7년 정도 어떤 사람하고 같이 살았는데 그 사람과 헤어지고 집을 나오게 됐다. 그 즈음 몸이 아팠다. 그동안 이런 저런 엔지오(NGO)단체에서 기지촌 관련 단체 등 20~30대를 그렇게 보내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망가진 것이다.

"2년 정도 힘들게 보냈는데 병이 나아질 때쯤 같이 살던 사람과 헤어지게 됐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같이 살던 사람도 없고, 일도 없고 …."

그동안 수수는 소수자, 약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학생 때는 학생운동을, 졸업하고는 동두천에서 기지촌 활동을, 기지촌에서 나온 뒤로는 성소수자 권리 운동 등을 하면서 살았다. 자신이 성소수자이고, 여성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여성 예술가이고, 한국 사회의 시민 중 한 명으로 살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안양에 어떤 여성이 아파트를 1년 간 비운다는 거다. 아파트 봐 줄 사람 필요하다고 해서 들어갔다."

1년 뒤 주인이 돌아왔다. 그다음부터는 알음알음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 어떤 아파트에서는 아이와 같이 놀아줄 상대가 필요하다고 했고, 어떤 집은 부인이 보험설계사 일을 하는데, 남편이  식물인간이라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잠깐 살기도 했다. 농촌 농막을 지을 때 작업하면서 숙소에서 지내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집 비밀번호를 다 알았을 때도 있었다."

정 지낼 때가 없으면 농성장에 가서 지낼 때도 있었다. 사실 연대라기보다 갈 데가 없었다. 그때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기자회견 앞에서 플래카드 잡고 서 있고, 청소하고, 밖에 나가서 집회할 때 소리치는 역할을 했다. 주로 갔던 농성장은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집세 올려 쫓겨난 가게 사장들이 농성하는 곳 등이었다. 현재 천 일이 넘게 길에서 싸우고 있는 콜트콜텍 농성장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하지만 오로지 잘 곳이 없어서 이렇게 돌아다니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천박한 자본주의, 수구세력이 판치는 한국 사회가 수수를 그렇게 만들었다. 수수가 약자나 불의에 눈물을 흘리는 건, 자신이 누군가를 통해 확장되는 것이다.

기지촌활동

수수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다녔다. 엄마가 예술계 쪽으로 비전을 두기를 바랐다.

"예술학과는 생전 처음 들어봤다. 엄마가 추천한 과를 썼다."

95학번. 김영삼 정권 때였다. 집안 살림은 어렵지 않았지만 돈에 무심한 어머니와 돈을 쓰는 게 어려운 일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수수는 늘 돈이 궁했다.(아버지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돈을 아꼈다.) 수수는 대학을 다니면서 알바를 해야 했다. 정말 어려울 때는 휴학을 하고 이대 앞에 있었던 페미니즘 카페 고마라는 곳에서 알바를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돈을 쓰는 수준이 달라 어울릴 수가 없었다. 먹는 것부터 그랬다.

"구내식당에 800원짜리 밥이 있었는데, 쌀밥에다 당근이나, 나물, 파, 계란 같은 거 볶아서 김치 무제한으로 줬다. 나는 맛있었다. 그런데 과 학생들이 '쓰레기 같은 음식을 어떻게 먹니?' 하면서 안 먹더라. 나는 밖에 나가서 먹을 돈이 없었다."

방학 때도 과 학생들은 해외여행 계획을 세우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수수는 그런 학우들과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풍물패를 갔다. 고등학교 때도 풍물을 해서 끌렸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들었다. 일단 배 안 고프게 막걸리도 줬다. 안주도 주고. 그 뒤로 배고플 때마다 갔다. 탈춤반 학생들이 서로 동지들, 동지들이라고 부르는 게 부러워보였다. 뭔가 자기 패가 있다는 게, 무리가 있다는 게. 엄마가 하는 페미니즘 운동까지는 못해도 학생운동쯤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 운동보다는 편해 보였다."

사실 수수는 엄마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엄마가 교사들의 성폭력을 폭로한 뒤 공격을 받을 때 지지하지 못했고, 자신이 좀 비겁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늘 들었다.

"그때 엄마가 혼자 싸운다는 걸 느꼈을 때 내 마음속에서 하고 싶은 걸 못했다. 교장 멱살도 잡고 싶었고, 전화 응답기 말을 듣지 않고 내가 전화를 받아서 교사들한테 대들고 싶었는데 못했다."

한총련이 한창 이적단체로 몰려 살벌한 시대였지만 수수는 학생운동하는 데 큰 결단이 필요치 않았다.

"남들은 엄마가 칼 들고 와서 '너 학생운동 계속하면 너 죽고 나 죽자' 하면서 동아리연합회 회장 머리채 끌고가고 그랬는데 우리 엄마는 내가 가서 '엄마, 나 데모하고 뭐 하느라고 그래서 구치소 갈지도 몰라' 그랬더니 '야, 전태일처럼 분신하고 나한테 얘기해. 구속되고 그런 걸로 나한테 얘기하지 마' 하더라."

초등학생 성폭행을 처음으로 폭로했던 용기 있는 엄마였지만 딸한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수수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수가 활동하는 풍물패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다. 수수는 사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진실은 밝혀졌다. 하지만 가해자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피해자를 공격했다. 가해자는 그 피해자가 '세미나도 안 나오고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고 엘리트주의에 빠졌고 분파주의자'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수수가 피해자를 지지하고 도와줬지만 피해자가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엄마 때 상황이 생각났다. 수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운동은 피할 수가 없나 보다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수수는 여학생회 활동을 시작했다. 농활 대신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을 돕는 '기지촌활동(기활)'을 갔다. 1992년에 일어난 윤금이 살해 사건 등으로 주한미군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지고 있던 시기였다. 1996년에는 '기지촌활동'(기활) 출신 활동가 김현선 전 대표가 주도해 '새싹이 움트는 곳'이라는 뜻의 기지촌 여성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기지촌 문제를 한국 사회에 제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당시엔 책상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철거촌을 가고 열사 시신 지킨다고 가고. 전농동 철거촌에 사람 죽어나가고 있는데 앉아서 공부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특히 기지촌은 일상이 전쟁터였다. 기지촌 언니들의 의문사들, 내팽개쳐진 혼혈아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이 문제가 많구나, 이런 아이들 삶들을 한쪽에 몰아넣고 아무도 돌보지 않고 학교에 앉아 있는 게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다녔다기보다 학교를 발판 삼아 운동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수는 처음 기지촌 여성들을 만났을 때 언니들의 삶의 일상, 작은 습관, 말투에서 엄마를 봤다. 오히려 친근감이 들었다.

"기지촌 언니들은 거칠었지만 나는 익숙했다. 그 언니들의 분노 뒤에 슬픔이 느껴졌다. 나도 무섭긴 한데 떠날 수가 없었다. 혼혈 아이들하고 놀아주고 영어 가르쳐주고. 아이들이 영어 배우고 싶어했다. 한국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해서 살기 힘드니까 차라리 (미군) 아빠 나라로 가서 시민권자가 되면 거기에 가면 기회가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 영어를 배우고 싶어한다. 그림 치유 프로그램도 하고. 애들이 그렇게 하다가도 낙담할 때가 많다. 학교 선생이 되고 싶다가도 금방 낙담한다. 자기처럼 까만 피부를 가진 선생님은 없으니까. 연예인이 되고 싶다가도 미용실이나 할까? 생각한다. 다들 삶의 선택이 제한돼 있다."

2000년 9월 19일에 군산 대명동 매춘업소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성매매 여성 5명이 사망하고 1명이 구출됐다. 인신매매돼 감금된 채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100미터 거리에 파출소가 있었는데도 경찰들이 포주들에게 뇌물을 받고 이를 눈감아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건 이후에도 포주들에게 뇌물을 받고 수사정보를 유출한 경찰들이 적발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2002년 1월 19일 군산 개복동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14명의 성매매 여성과 남자 업주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 역시 인신매매로 팔려와 감금당한 채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었던 여성들이었다. 이 사건에서도 업소 30미터 거리에 파출소가 있었는데도 경찰들은 뇌물을 받고 이를 눈감아주었고, 소방공무원들도 제대로 안전 점검을 하지 않았다. 대명동 화재 참사 이후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충격은 컸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성매매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결국 여성단체들이 끈질기게 싸운 결과 2004년 성매매 특별법이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그리고 대명동 화재 참사 희생자 중 고아 2명을 제외한 3명의 유족들이 포주와 국가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포주는 5억 9000만 원, 국가는 경찰이 성매매 여성의 감금을 묵인한 것에 책임을 물어 67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2004년에 확정되었다. 이어서 개복동 화재 참사 역시 군산시가 피해자 한 명 당 2100만 원씩, 국가는 총 2억 5000만 원을 배상하도록 하는 판결이 나와 2008년에 확정되었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은 자살도 많았고 의문사도 많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수수가 기지촌 활동을 하면서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기지촌 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에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나는 자원활동가로 갔는데, 심지어는 같이 일했던 언니들도 오지 않았다. 무서운 거다. 언니들은 장례식장에 참석하면 죽음에 연루된 느낌이 들어서, 한 번 갔다 오면 힘들어한다. 의문사, 알 수 없는 죽음이 너무나 많았다. 자정쯤에 사망한 언니 친척이란 사람이 왔다. 남자 분이 언니 통장에 있는 몇십만 원 찾으러. 그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죽은 언니한테 인사도 안 하고 돈만 찾아갔다. 그래서 사람다움에 관해 생각 많이 했다. 사람으로 사는 것. 누군가를 기억해야 되는데."

수수는 그 당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살고 있었다. 동두천까지 매일 세 시간씩 걸리면서 출퇴근을 했지만 그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기지촌 언니들하고 시간 많이 보내고 애들하고도 많이 놀았다. 언니들이 그러더라. '수수야, 너는 우리하고 동두천에서 같이 안 살래?' 근데 거기서 사는 건 엄두가 안 나더라."

수수는 성매매방지법이 만들어지고 다른 일을 하게 된다.

"내가 처음 활동했던 내용과 달라졌다. 사회복지서비스가 많아져서 언니들을 나눠야 했다. 복지대상자를 마치 장애등급 나누듯이, 약간 그런 위치에 서게 됐다. 나는 그런 일에 맞지 않았다."

수수는 기지촌 언니가 어떤 서비스를 받아야 좋을지 결정하는 게 어려웠다. 언니가 호소하는 내용이 거짓말인지도 모르니까 조사해야 하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언니들하고 그런 관계로 바뀌어지는 게 힘들었다. '에구 이 쪼꼬만 년아, 너 대학 다녔다고 나 무시하냐', 이렇게 시작했는데 내가 '언니 이게 맞아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이상했다. 결국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면서 거기를 나오게 됐다."

수수는 자신이 잘살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스스로 되돌아봤다.

"언니들 표현대로 '이빨 까면서 사는 게 신간 편하다 잉?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감놔라 배놔라 항께 뭐 니가 뭐 최고 같냐?' 이런 말이 들리는 듯했다."

게다가 성매매방지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이 시간이 지나며 적용되는 걸 봤을 때 현실이 암담했다. 성매매방지법은 성매매 여성들이 피해자니까 피해자로서 지원을 하는 취지였다. 그리고 집결지를 줄여나가는 방향이었는데 실제 법 집행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집결지를 없애면서 쫓겨나는데 해답이 없었다. 게다가 자발적으로 성매매했을 경우엔 처벌하는 조항이 남았다.

"국회의원들은 '분명히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여자들은 처벌해야 한다'는 거다. 기어이 그 조항을 넣었다. 경찰들이 그 조항을 써 먹었다. 법이 가지고 있는 그 맹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개정을 하긴 했는데, 이미 다 쫓겨났는데 어떻게 하나. 더 복잡해진 건 조선족이랄지 국적이 보장돼 있지 않은 난민이나 이런 분들이 성매매를 하는데, 법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으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현장에 벌어지니까."

수수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병이 났다는 핑계로 그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나왔다. 대학원에 가서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OO대 문화학협동 과정에 입학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모아 입학금을 내고나니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학교를 들어가니 다행히 알바 일이 생겼다. 연구하는 사람들 녹취 풀어주는 알바, 전시 기획, 여성문화 관련한 컨설팅이나 연구 프로젝트를 하며 대학원 등록금을 충당했다. 인류학 방법론으로 문화학과 여성학을 배웠고, 대학원을 수료했다. 수수는 언젠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그 뒤 수수는 미술 관련 기획도 하고 전시하는 일도 하고 살았다. 먹고살려고 보험설계사도 해 봤다.

"보험은 못하겠더라. 아웃바운드, 고객 명단을 보고 전화를 걸어 계약을 따내는 일인데 전화를 하면 대화가 끊이지 않더라. 매니저가 날 부르더니 '상품 팔고 싶냐?'고 묻더라. 당연히 팔고 싶지. 그런데 내가 전화 통화한 내용을 들어보니, 할머니 혼자 사는 이야기 다 듣고 상품 이야기를 일언반구도 안 하더라. 매니저는 '여기서 기본급 받고 한 달 이상 일하는 사람 없다'고 했다. 못하겠더라. 스트레스 받아서 나왔다."

수수는 < BODDY >(버디)라는 잡지 편집위원으로 들어갔다가 그 버디를 발행하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활동가로 일했다. 거기서 주최한 한국퀴어문화축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수수는 트랜스젠더 친구도 만나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게이나 레즈비언도 만나면서 세상을 좀 더 알게 된다.

"정말 많이 배웠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말하는 화법 같은 게 기지촌언니들 등과 뭔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낙인찍힌 사람들이 가진 특별한 서사가 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거짓말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본인들은 다 지어냈다고 하지만 진실이 숨어 있는 그런 이야기들. 타인들은 못 알아듣는다. 본인들이 사는 세계가 정상이라고 확신하고 그 세계 토대 위에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진실을 전하려고 노력해서 그 안에 뭔가 힌트를 남겨 놓는다."

수수는 2007년 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물보라'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물보라 프로젝트는 10대 여성 이반(레즈비언)들이 어떤 문제로 가출을 하는지,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무엇이 필요한지 연구하는 프로젝트였다. 수수는 이렇게 말한다.

"차별금지법은 지금 겉으로는 성소수자의 문제로 보이지만, 사실은 보편적 인권의 문제다. 지금 우리를 방어하지 않으면 언젠가 당신의 인권도 뺏기는 순간이 온다. 20 대 80, 아니 10 대 90으로 인권도 양극화되는 사회가 말이다."

2009년 9월, 수수가 여성의 눈으로 그림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각을 전해 주는 강연을 하고 있다.
▲ 강연하는 수수 2009년 9월, 수수가 여성의 눈으로 그림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각을 전해 주는 강연을 하고 있다.
ⓒ 사진 제공-김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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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김주혜"

수수는 그 뒤로 전시 기획 일, 지역문화 컨설팅, 재래시장 연구원도 해 봤다. 성매매 단체, 성폭력 단체 프로젝트 일을 10년 정도 하니까 경력이 쌓여 강연 요청도 들어왔다. '그림으로 보는 여성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수수는 그 강연에서 1980년 격동적이었던 한국의 사회상을 여성의 모습을 통해 담아냈던 그림패 '둥지'의 걸개그림들을 소개하면서 여성들이 유난히 아팠던 당 시대를 비판했다.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공부해서 똑같이 사회생활을 했고, 똑같이 부당한 사회에 저항하면서 투쟁했던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가부장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모습을 담은 '현모양처' 그림을 보세요. 학사모를 쓴 아내가 신문 읽는 남편의 발을 닦아주고 있네요."

그때 강연자 소개는 '페미니스트 김주혜'였다. 어머니 때문에 여성운동은 절대 안 한다고 했는데 결국 여성운동으로 빠진 셈이다.

웃픈 에피소드

어느 날 수수는 가슴에 종양이 생긴 걸 알았다. 수술에 들어갔다. 그런데 마취할 때 인슐린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의사가 당뇨가 심하다고 알려줬다. 수수는 자기 몸이 그렇게 망가진 걸 몰랐다. 수술이 끝난 뒤 살을 빼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100킬로그램 나갔다. 먹지 않고 조절한 결과 7개월 동안 50킬로를 뺐다.

"투쟁 열심히 하고 살았는데 몸이 망가졌다고 평가되긴 싫어서 독하게 마음먹고 살 뺐다. 7, 8개월 만에 의사도 못 알아보고. 활동하던 사람들도 못 알아봤다. 몸무게 때문에 일어난 웃픈(웃기고 슬픈) 에피소드가 있다."

2009년 용산참사가 일어났을 때 수수는 마포FM 비혼 페미니스트를 위한 '야성의 꽃다방' 진행자로 일하고 있었다. 용산 '레아'에서 진행했던 라디오 방송 '행동하는 라디오'의 '함께 가꾸는 삶의 정원'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도 맡았다. 당시 자전거 행진 대오가 용산참사 현장을 들렀다가 광화문 가는 행사가 있었다. 상징적인 행사였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대로에서 자전거를 막았다. 수수는 생방송을 한다고 그 와중에 경찰을 밀쳤다고 채증을 당했던 듯했다. 2년이 지난 뒤 공무집행방해로 방송했던 사람들한테 백만 원, 이백만 원 벌금이 나왔다.

"신기했다. 난 줄 어떻게 알았지? 마포서를 갔다. 그런데 형사가 사진을 보여주면서 채증에 찍힌 사람이 본인이 맞냐고 물었다. 사진엔 100킬로 몸무게였던 내가 있었다. 나는 그때 50킬로그램이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형사도 자기가 봐도 아니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 때문에 빠져 나왔다."

노래가 나를 찾아온다

수수는 이제 노래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쩌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끼를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밑에 쌍둥이 동생들도 모두 연극을 한다. 수수도 그런 끼가 없었다면 이렇게 단기간에 기타 치고 노래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래를 부를 때도 인위적으로 '편곡'하거나 꾸미지 않는다.

"동네 할머니들이 노래를 부르면 다 자기한테 맞춰 부른다. 나도 노래를 그렇게 나한테 맞춰 부른 거다. 나는 노래를 부르게 될 때는 사람을 생각한다. 기지촌 언니들, 죽은 언니들."

수수는 기지촌 언니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자살하는 10대 성 소수자들, 트렌스젠더 활동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HIV/AIDS 감염인들을 많이 봤다.

"대학원 다닐 때도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있었다. 대법원까지 가서 성별 정정도 하고 신체 수술도 다 하고, 끝났는데 페루에 가서 죽었다. 눈물이 많이 났다. 이유를 생각해봤더니 그 친구가 느꼈을 외로움, 자기가 처해 있는 존재를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외로움, 아무도 자기의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외로움, 두려움, 내가 괴물인지 사람인지 사람들이 자기한테 묻고. 코이카(해외봉사단)로 페루까지 가서도 자유로워지지 못했던 이런 사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게 이해가 간다."

수수는 노래할 때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고 기리면서 불렀다. 그런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부르면 느낌이 달랐다. 뭔가 해소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타인들과 공유하고 감정을 나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수가 살고 있는 방 안에는 작은 책상 위에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2016년 9월 25일 사망한 백남기씨 사진과, 일찍 죽었다는 젊은이 사진이 놓여 있다.

"이 아이는 탈학교 학생이었다.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에 다니던 친군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데 끝내 말을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이런 친구들이 나에게 노래를 할 수밖에 없게 했다. 말을 하거나 NGO 활동하거나 하는 거로는 한계가 있다."

수수는 자신이 기타를 치면서 처음 노래할 때가 언제인지 기억에 없다. 전에는 기타를 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2년 전에 어떤 술자리에서 노래를 했는데 수수 친구의 남자친구가 노래하는 걸 듣더니 기타를 주겠다고 했다. 몇 달 뒤에 기타를 받아서 그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전에도 기타를 몇 번 받았지만 너무 커서 못 갖고 다녔다. 길에서 다니면서 잘 준비를 하니까 침낭을 갖고 다니는 게 낫다. 기타가 생기면 다른 이들한테 줬다. 너무 커서. 근데 이번 기타는 나한테 딱 맞는다."

수수가 지금 갖고 있는 기타는 네모지게 생긴 특이한 기타다.

수수 방 안에 있는 책상 위의 모습. 고 백남기 농민과 일찍 세상을 뜬 어떤 소녀의 사진이 놓여 있다.
 수수 방 안에 있는 책상 위의 모습. 고 백남기 농민과 일찍 세상을 뜬 어떤 소녀의 사진이 놓여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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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수수는 지금 구례에서 살고 있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뒤, 추모하는 순례길이 있었다. 수수의 친구들이 그 순례길에서 오가다 수수 이야기를 했다. 순천에 살고 있는 농부가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아는 다른 농부의 집을 빌려 줬다. 순천 농부도 이 집 농부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인도여행을 이야기 나누다가 서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아무 인연도 없는 수수에게 그냥 살라고 빌려준 것이다. 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만난다.


수수는 이곳에 와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 이 집을 왔는데 전기도 안 나오고 물도 안 나와서 청소를 할 수가 없었다. 고민은 나중에 하고 커피나 마시자 하고 읍내를 나갔다. '느티나무'라는 2층 카페가 있어 올라갔더니 카페가 아니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실이었다. 구례 전교조, 농민회 등이 공동투자한 공유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서울에서 귀농한 정태연씨를 만났다. 정태연씨 부인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지리산사람들'의 대표인 윤주옥씨다. 수수의 집은 바로 그이들이 사는 집 근처였다.


처음 만난 날, 정태연씨는 수수에게 말했다.


"갈 데도 없으니 우리집에 가서 밥이나 먹읍시다."


정태연씨 부인 윤주옥씨는 남편이 무작정 집에 데리고 온 수수를 탐탁지 않게 봤다. 윤주옥씨는 수수의 첫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머리가 짧았다. 미소년 같은 느낌. 내가 알던 사람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수수가 말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궁금해하더라. 밀양 할매 노래를 했다."


수수는 순출 블루스를 불렀다. 밀양 고전면에 살고 있는 할머니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었다.


윤주옥씨 딸 결이가 밀양 송전탑 투쟁 때 밀양에 가 있었다. 그런데 수수가 밀양 할매 노래를 하니까 호감과 연대 의식이 생겼다. 서로 아픈 이들을 보듬는 연대의식은 이렇게 생전부지 초면의 사람과도 허물없이 만든다.


수수는 이곳에서 학교 다닐 때 알던 친구도 20년 만에 만났다. '지리산사람들'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수수는 벌이가 없지만 이런 단체에 회비를 내야 친구가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후원회원 가입을 했다.


수수는 지금 벌이가 없다. 아주 가끔 페미니즘이나 성매매 관련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조금이나마 생활비가 생긴다. 얼마 전 밀양에서 처음으로 공연료를 받기도 했다. 재작년부터 서울에 '장애여성공감' 지적장애여성 합창단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그이들과 같이 '일곱빛깔 무지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거기서 주는 차비도 생활비에 도움이 된다.


"노래를 하고 싶어 좋아하던 술이랑 담배도 끊었다. 내가 기억하는 많은 죽음들이 있고, 머릿속에 늘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택에 있는 언니들, 동두천에 있는 아이들이랄지 그 사람들은 내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다. 에스더라는 친구, 밀양의 어떤 소녀, 그런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 근데 그 이야기를 낱낱이 하는 게 아니고 공감하는 어떤 지점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다."


수수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또 있다.


"미군 '위안부' 관련해서 박정희 정권, 한국 정부의 잘못에 대해서 미군 '위안부' 100여 명 정도가 소송단을 꾸려서 소송을 하고 있는데 최종 판결이 내년 2월에 나온다.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고, 거기서 부를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나온 삶을 보면 수수는 어린 스무 살 무렵부터 기지촌 언니들을 만났다. 무엇이 그곳에서 발목을 잡았을까.


"동두천 아이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 그 아이들 만났을 때 미리 온 미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동두천 삶이 끝나지 않고 어디에 가든 부닥치는 삶이다. 그런 게 연결되고 사람들에게 역사가, 진보가 일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고 잊혀지고 버려진 삶의 조각들 안에 이미 숨겨진 미래가 있다고 나는 많이 느낀다. 그런 것들을 연결해 주는 파동, 그런 걸로 노래를 하고 싶다. (기지촌)언니들이 내년 2월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고 나도 몸뚱이가 성하다면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게 지금의 목표다."


수수는 자기가 노래를 만드는 게 아니고 노래가 자기를 찾아온다고 했다.


"글쟁이도 마찬가지 아닌가? 글쟁이가 글을 쓰는 게 아니고 글이 자기를 찾아온다고, 나는 노래가 내가 감히 한다고 얘길 못한다. 물론 싱어송라이터라는 소개를 할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노래가 나한테 온다. 어떤 노래를 만드는 게 아니고 어떤 노래가 들어오게 살아야 한다. 예를 들면 글 쓸 때 특별한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런 거는 삶의 자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갈고 닦은 것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사회학적이고 정치적인 인간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거기 위치시킨 것이 결정이 돼서 그런 게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면 그게 노래로 나오는 거다."


수수가 기타를 들고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난 떠나가야겠어. 나에게 이곳은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는 있지만 모든것이 낯설기만 해. 외로움에 길들여지는 후로 차라리 혼자가 마음 편한 것을 어쩌면 어쩌면 너는 이해 못하지. 내가 너를 모르는 것처럼. 아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는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응답하라 1994' OST, '서울 이곳은' 중)


전남 구례 동산마을에 있는 수수가 살고 있는 집.
 전남 구례 동산마을에 있는 수수가 살고 있는 집.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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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18년 1월호에 실릴 글입니다.



태그:#안건모, #작은책, #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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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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